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9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99)화(99/171)
수도, 랑그 엘리사는 세벨리아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진 장소였다. 북부로 가기 전까지 그녀는 생의 대부분을 수도에서 보냈으나 실은 그 누구보다 아는 게 없었다.
“아무런 간섭 없이 수도를 거닐 수 있다니,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세벨리아는 데니사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녀가 긴장과 흥분의 경계에서 뺨을 붉히자 데니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오늘 아침 부로 세벨리아는 정식으로 칼 어펜츠의 조카인 벨라 어펜츠가 되었다. 그 말인즉슨 사일러스의 되지도 않는 수작을 일차적으로 거를 수 있는 안전망이 하나 생겼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건 여전했다.
“아가씨,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시는 건 어떨까요? 신분 등록이 완료되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행정적인 절차일 뿐이잖아요. 사람들이 몰려들거나 강압적으로 구는 걸 막을 수는 없어요.”
“그런 걸 막고자 내가 있는 거지. 웨든 후작가의 말라깽이 호위들이 인버네스의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차가운 목소리가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데니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고 있는 커다란 응접실 창문 너머에 디하트가 보란 듯 서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벨라. 잠은 잘 잤는지 모르겠군요. 원한다면 클로드와 워츠의 방을 멀리 옮겨 줄게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클로드 씨는 일단 제 삼촌이 되셨고, 워츠 씨도 지금은 제 주치의잖아요. 근데 옷이 왜 그래요? 소매가 완전히 흙투성이네요.”
세벨리아가 여상하게 물었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디하트가 눈을 반짝거린다 싶더니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방금 꺾어 낸 듯 물기 어린 수국 다발이었다.
“밤새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정원에 들렀어요. 색깔이 꼭…….”
푸르게 반짝이는 꽃은 누가 봐도 세벨리아의 눈처럼 맑고 선명했다. 대놓고 수작을 부리는 행태에 데니사는 헛숨을 삼켰다. 저게 미쳤나 싶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세벨리아의 말에 그녀는 아주 잠깐 디하트가 불쌍하다고 생각해 버렸다.
“아, 가지치기를 하고 남은 꽃들이군요. 버리는 걸 굳이 왜 가지고 왔어요?”
세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디하트는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확인사살을 하듯 세벨리아가 이어 말했다.
“그나저나 당신, 정말 꽃을 좋아하네요. 하긴 연구소에서도 그 취미생활은 버리지 못했었죠. 여기도 혹시 온실이 있나요?”
“있, 긴 하지요.”
“아하. 그럼 산책할 때 그쪽으로는 가지 않을게요. 괜히 당신 취미생활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당신의 눈동자 색을 닮았다며 꽃을 건네려던 디하트의 계획은 과거에 그가 벌였던 악행으로 인해 처참하리만치 망가졌다.
“내, 가.”
내가 당신을 방해라고 생각할 리 없잖아요. 버리는 꽃을 줄 리가 없잖아요. 나는 그저 당신이 불안해 보여서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졌으면 했을 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
과거의 편린들이 유리 조각처럼 심장에 파고들었다. 끔찍한 통증을 느끼며 디하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와 변명을 한들 그녀가 받았던 상처를 낫게 할 수도 없을 텐데.
한낮의 태양처럼 생기 넘쳤던 두 눈동자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탐스럽고 예쁜 꽃만 골라 묶어 낸 꽃다발이 힘없이 흔들렸다.
“디하트, 왜 그래요?”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디하트는 엉망진창인 얼굴을 그녀에게 내보일 뻔하다 가까스로 고개를 숙였다.
억울한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동시에 디하트는 그런 자신에게 끔찍한 회의감을 느꼈다. 세벨리아를 상대로 감히 억울하다는 감정을 품다니. 그는 뜨거운 한숨을 삼키고서 꽃다발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아니에요. 당신이 말한 대로… 버리기 전에 잠깐 보여 주려고 들렀을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디하트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세벨리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데니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 뻔했다.
디하트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 주제를 모르고 헛짓을 하려 한 제 잘못이었다. 겨우 날뛰는 감정을 가라앉힌 그가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벨리아를 향해 말했다.
“사실 저녁 약속을 잊지 말라고 말해 주러 왔어요. 오페라 하우스에 가기로 한 거 기억하고 있죠?”
“아, 그 얘기 말인데. 정말 우리가 가기로 한 오페라 하우스가 엘리샤 대극장인가요? 제국에서 가장 큰 곳 말이에요.”
세벨리아가 기대와 불안이 반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평생을 집 밖에 나가 본 적 없는 그녀는 귀동냥으로만 듣던 장소를 직접 방문하게 된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두려운 모양이었다.
디하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따지자면 ‘벨라 어펜츠’의 데뷔탕트나 마찬가지니까요. 당신의 공식적인 첫 등장을 대극장이 아닌 곳에서 치를 수는 없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제 난 어디까지나 평민이에요.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아요.”
세벨리아가 고개를 내젓자 디하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창틀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음, 그래요. 차를 다 마시고 나면 의상실에서 사람들이 올 거니 미리 마음의 준비나 해 둬요.”
“의상을 맞추려는 건가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첫인상이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어도, 그것들의 토대를 결정지을 수는 있죠.”
“…….”
“오늘 저녁 당신이 웨든 후작이 잃어버린 불쌍한 딸이 아니라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아름답고 강인한 벨라 어펜츠라는 걸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킵시다.”
그가 누누이 강조했듯, 먼저 선수를 치는 놈이 이기는 법이었다. 디하트가 나지막하게 덧붙인 말에 세벨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는 자신의 복수를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으니까. 세벨리아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당연한 겁니다. 우리의 상대가 얼마나 교활한 자인지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다 잘될 겁니다. 그 누구도 당신을 그 빌어먹을 웨든으로 데려갈 수 없어요.”
디하트는 어느새 창틀을 훌쩍 넘어 세벨리아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그를 붙잡고 일으키려다 그만두었다. 디하트가 다른 쪽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기 때문이다.
‘이상한 습관이 든 것 같은데.’
하지만 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는 디하트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해 보였다. 매번 헝클어져 있던 검은 머리를 말끔히 정리한 사내에게선 폐인 같았단 과거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움푹 팼던 뺨에 살이 오르고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을 깔끔히 밀어낸 금빛 눈동자의 사내는 그 자체로도 태양처럼 빛났다. 세벨리아조차도 한순간이나마 마음이 흔들렸을 정도니까.
“알겠으니 그만 일어나요. 우리 둘만 대극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워츠 씨랑 클로드 씨도 챙겨야죠.”
세벨리아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며 말했다. 시무룩해지는 디하트의 표정을 외면하며 그녀는 데니사와 함께 응접실을 나섰다. 터덜터덜 응접실을 나오는 발소리가 멀찍이서 들리다 사라졌다.
“하아.”
복도 중간에 서서 세벨리아는 한숨이 내쉬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손에 넣기 위해 별의별 계책을 짜고 있을 텐데 한순간이지만 그의 외모에 넋을 놓다니.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정말 생긴 것만큼은 완벽한 남자라니까.’
그러고 보니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예의범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계약 결혼 상대에게도 그럭저럭 잘 맞춰 줬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 잘 살았을 거야.’
디하트가 알았다면 미치고 팔짝 뛸 생각을 하며 세벨리아는 방으로 올라갔다. 의상실 직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간단하게 몸단장을 할 생각이었다.
* * *
저녁이 되어 대극장에 불이 밝혀졌다. 일렁이는 불빛을 받은 장밋빛 대리석 건물은 마치 붉은 장미처럼 화려하게 수도를 장식했다. 사랑받는 황후였던 엘리샤의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엘리샤라는 이름은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네이튼?”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홀의 한편에 웨든 후작가의 쌍둥이가 있었다. 넬리아와 네이튼 웨든. 개중 넬리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즐기며 네이튼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황후가 되면 대극장의 이름은 넬리아가 될 거야.”
네이튼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요즘 따라 자신이 황후가 된 후에 할 일을 이렇게 말하고 다니고는 했다. 일황자와의 약혼이 제법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뜻대로 해, 누이.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잊지 말자고.”
“어머, 당연하지. 그렇게 쉬운 일을 어떻게 잊니. 그 애는 언제나 나한테 약했다는 거 기억 안 나?”
오늘 점심 무렵, 넬리아는 사일러스로부터 대극장에 가서 세벨리아가 나타나면 그녀를 설득해 가능하면 데려오라는 부탁을 받았다. 세벨리아의 생사에 별 관심 없던 그녀는 아버지가 찾던 실종된 여동생이란 게 살아 있는 세벨리아였다는 것에 조금 놀랐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대극장에 오는 건 확실한 거지?”
“그래. 엘릿 스트리트의 의상실 직원들이 죄다 인버네스 저택으로 몰려갔더군. 귀족도 아닌 그 애가 초청장 하나 없이 무도회에 갈 수 있을 리는 없고, 공작의 이름으로 박스 석까지 예매했으니 당연히 나타날 거야.”
조금 시간이 지나자 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다수가 중앙의 귀족이거나 그보다 재산이 많은 평민이었으나 간간이 타 지역 출신들로 보이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잠시 뒤, 직원이 나왔다. 관객들을 자리로 안내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이쯤 되니 세벨리아가 대극장에 올 것이라 확신했던 네이튼도 조급함이 들었다.
“1층 티켓을 구입하신 분들은 이쪽으로…….”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 순간 한곳에 멈췄다. 그러더니 얼어붙은 것처럼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