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Tycoon Wizard RAW novel - Chapter 28
28화. 그랜드 캐년 (2)
똑똑-.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황량한 벌판이 전부인 있는 스프링스 랜치에 도착한 것은 이미 오후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온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말도 없이 각자의 방으로 직행했다.
그런데 갑자기 노크를 한다고?
“네, 무슨 일이시죠?”
“잠도 안 오는데, 같이 맥주나 한 잔 어때요?”
오면서 그렇게 잠을 잤는데 잠이 올 리가 있나.
덕분에 운전만 내리 한 나는 엄청 피곤한데.
“그러죠. 저도 마침 잠이 안 오던 참인데.”
지금 튀어나온 이 말이 내 머리 나온 말인지, 아니면 다른 신체 부위에서 내린 명령인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따각-.
리조트라 그런가, 냉장고에 가득한 맥주를 꺼내서 캔을 따자 경쾌한 소리가 작게 울렸다.
등 뒤로 켜진 거실의 전등을 조명 삼아 베란다에 나오자 리조트 앞의 탁 트인 벌판에서부터 선선한 바람이 제법 기분 좋게 불어왔다.
“한국에서 일 때문에 왔다고 했죠?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요?”
“그냥 작은 부품 제조회사를 운영하는데, 이번에 IT 회사 한 곳이랑 새로운 계약을 하게 됐거든요.”
“IT 회사면··· 아, 그럼 혹시 실리콘 밸리에 있다가 온 거예요?”
거리로 따지면 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인데도 한 번에 거길 떠올린다.
미국이야 워낙 넓어서 천 킬로미터 정도면 가깝게 느껴지기라도 하는 걸까? 문득 이 넓은 땅을 가진 나라가 살짝 부럽다고 느꼈다.
“맞아요. 그래서 한국으로 가려면 캐년랜드 필즈 공항에서 다시 라스베이거스 공항까지 가야하죠.”
“저도 한국에는 작년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작년이라.
정확한 날짜야 모르겠지만, 어쩐지 내가 병원에서 누워있을 때였을 것 같다.
“관···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했었던 기억이 나요.”
“제 나라가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니 조금 뿌듯하네요.”
“내일 라스베이거스로 가신다고 했죠? 그럼 저도 내일 그쪽으로 가볼까 봐요.”
“상당히 즉흥적으로 여행을 다니는 중인가 봐요?”
“네. 혼자 여행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치, 근데 솔직히 별로 재미는 없어요. 같이 웃고 떠들면서 즐길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자랐겠구나.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을 여행하는 건 상당한 비용이 필요한 일인데, 그걸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수 있을 정도라면.
‘이제 겨우 대학생이나 되어 보이는데, 그런 돈을 직접 벌었을 것 같지는 않고.’
물론 학교를 다니면서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어쩐지 지금 옆에서 맥주를 홀짝 거리는 여자는 그런 쪽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런데 자동차에 대해서 잘 알아요? 아까 보닛을 열어서 살펴보는 것 같던데.”
“뭐··· 아빠가 차를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차를 자주 접해봤거든요. 그렇다고 대단한 지식까지는 아니에요.”
“그렇군요.”
어색한 침묵과 짧은 대화의 반복.
가봤던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어떨 때는 친구 흉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비어버린 맥주캔이 6개를 넘어갔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까지 붙잡았죠?”
“그런 건 아니지만··· 잠이 오기 시작하는 걸 보니 잘 시간이 지나긴 했나 보네요.”
“그럼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네, 그러죠.”
선선했던 바람이 조금 쌀쌀하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 두 사람은 조금의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
“키 줘요. 오늘은 내가 운전할게요.”
어제는 내가 했으니 오늘은 자기가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내민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나는 말 없이 자동차 키를 건네줬다.
한국에서도 운전할 기회가 자주 있었던 것은 아니라, 외국에서 하려니 내심 불안했는데.
먼저 해준다고 나서니 오히려 고맙다.
뉴욕처럼 차가 빽빽한 곳도 아니고, 시골 국도 수준으로 한산한 도로라 위험 요소도 없어 보이고.
‘기분 참 이상하네.’
옆 자리에는 금발의 미녀가 운전을 하고, 조수석에 앉아 창밖으로 펼쳐진 그랜드 캐년의 절경을 보고 있으니 뭔가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묘하다.
처음에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는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뻤고, 방열핀에 새겼던 마법진이 처음 작동을 할 때는 한없이 감사했다.
대만에서 이욱기 과장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는 얼떨떨했고, 권석영 대표가 투자 소식을 들고 찾아왔을 때는 이게 꿈인가 싶기도 했었다.
갑자기 문래동의 커다란 건물을 공짜로 빌려준다는 오성락 어르신이 나타나고, 글로벌 기업의 CEO가 미국으로 초청을 하질 않나, 통장에 수십 억원이 들어오는 일이 불과 3달 사이에 일어났다.
그랬던 시간들이 다 지나고.
낯선 땅에서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는 사람이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앉아서야.
왜 그 모든 일들이 하필 지금 실감나기 시작하는 걸까.
그렇다고 그 동안에도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한 적도 딱히 없었는데도.
“무슨 생각 해요? 갑자기 기분이 좋아보이네요. 한국에 있는 애인 생각이라도 했나요?”
“그냥 가족 생각이요.”
“결혼했어요?!”
이건 문화 차이인가, 아니면 그냥 이 사람의 상상력이 충만한 건가.
결혼을 했는데 다른 여자를 숙소로 끌어들일 리가 있나.
물론 아무 일도 없긴 했지만.
“아뇨. 부모님이랑 동생이요. 그리고 저 애인 없어요.”
“진짜? 왜요?”
“그야···.”
모르겠네.
진짜, 왜 없지?
바쁘다면 바빴다 할 수는 있겠지만, 솔직히 사생활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바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내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글쎄요. 지금까지는 딱히 생각이 없었달까요?”
“그럼 지금은 어떤데요? 절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어요?”
‘이 여자, 뭐지? ···설마 산업 스파이, 뭐 그런 건가?’
분명히 우연한 만남이었다.
그나마 내가 최소한의 행선지를 알린 사람은 레이와 권석영 대표 뿐이고, 캐년랜드에 도착한 뒤의 경로는 거의 즉흥에 가까웠으니까.
심지어 부모님에게 전화를 할 때도 자세한 위치는 말한 적이 없으니 누군가 먼저 날 기다리고 있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것 하나만 제외하고 생각하면 오히려 산업 스파이일 확률에 무게가 실린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외모를 가진 여자가 처음 만난 외국인 남성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현하는 게 말이 되나.
‘내가 무슨 연예인같이 잘 생긴 얼굴도 아니고.’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안목은 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필 내가 가는 길에 멈춰서 있던 자동차.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범죄형 남성 듀오의 등장.
영화도 이렇게 만들면 클리셰 덩어리라고 욕할 판이다.
‘그래. 아무리 미국이라 개방적이라고 해도 처음 본 남자를 따라서 호텔에 가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아무리 미국이라도 제정신이면 그런 일이 가능하겠어?
처음엔 갸웃하며 하나 둘 떠오르던 의심은 어느덧 점차 확신으로 변해갔고, 결국 나는 하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버리고 말았다.
“그쪽 이름이 리아라고 했나요?”
“···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네?”
표정을 보니 뭔가 찔리는 게 있네.
딱 걸렸다.
내가 감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우리 이제 그만 솔직히 말해봅시다.”
“···죄송해요. 말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됐으니까 말해봐요. 어디서 보냈어요?”
“···네? 보내다니, 저를요?”
여기까지 와서 또 뭘 감추려고.
“왜, 방열핀 제조법 알아오라고 시켰습니까? 어디서··· 아아, 인텔? 인텔이네. 맞죠? 와, 그 아줌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을 하다 보니 점점 스스로의 가설이 맞다는 확신이 들면서 언성마저 점점 높아졌다.
그래서 리아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미처 살펴볼 생각을 못했다.
“산업 스파이가 얼마나 중죄인지 모르는 모양인···.”
차는 어느새 갓길에 멈춰 섰고, 리아는 조금 전까지 상냥하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눈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산업 스파이? 그러니까, 내가 지금 당신한테 미인계로 사기를 치려고 했다는 거죠?”
“···아, 아닌가요?”
“맞아요. 그냥 그런 거라고 해두죠. 아아, 아쉽게도 이렇게 들통났으니 전 이만 꺼져야 하는 거겠죠?”
긁적.
나도 모르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옆통수를 슬쩍 긁었다.
그리고 조금 내려온 손가락으로 다시 목 언저리를 조금 긁적여보다가.
“···아니에요?”
“그쪽 마음대로 생각해요. 난 여기서 내릴 테니까.”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었다.
작은 배낭 하나만 가지고서 차에서 내린 그녀가 진짜 바람 소리가 들렸다고 착각할 정도로 몸을 돌려서 왔던 길로 가버리는 걸 차에 앉아 멍하니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던 내 입에서 문득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런 병신.”
뭔지는 모르겠는데, 왠지 실수를 한 것 같긴 하다.
***
라스베이거스 공항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남짓.
어제까지는 분명 미국에 온 김에 가기 전에 카지노라도 한 번 들려볼까 생각을 했었는데, 어째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아.”
누가보면 카지노에서 전재산을 날리고 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겠네.
그렇게 어딘가 정신이 좀 멍한 기분으로 탑승구 앞에 앉아있었는데, 탑승 시간이 다가오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 신경쓰지 말자.’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실수 좀 했다고 한들 어떤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탑승 시작하겠습니다.”
길게 늘어선 이코노미 줄의 옆에 한산한 일등석 탑승구로 향하는 와중에, 문득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옆에 서 있던 한 여자의 손에 들린 영문 잡지 한 권.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잡지의 표지에 실린 사진이었다.
“···리아?”
“네?”
“저기, 죄송한데 잡지에 있는 표지 모델이 누군지 혹시 아세요?”
“헐···. 클라리아를 몰라요?”
“클라리아?”
이름이 리아가 아니라 클라리아였어?
“혹시 뭐하는 사람인지도 알아요?”
“뭐 어디 무인도에 있다가 왔어요? 요즘 제일 유명한 가수인데··· 작년에 한국에도 왔었잖아요. 진짜 몰라요? 세상에, 우리 아빠도 클라리아는 아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세상을 등지고 살았었나 싶었다.
한 동안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진짜 실수했구나.”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조금 닮은 사람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왜 그런 곳에서 혼자 있었던 거지? 도망이라도 친 건가.
‘어쨌든··· 진짜 산업 스파이는 아니었구나.’
우습네.
이제와 아니면 어떻고 또 맞으면 어떤가.
저런 유명인과 새벽에 맥주를 마실 수 있었던 게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긴하지만, 진짜 볼 일은 없겠지.
씁쓸하게 웃으며 비행기 좌석에 가서 앉았다.
“안녕?”
“···응?”
옆 자리에는 선글라스를 반쯤 내린 채로 웃으며 인사를 건네오는 클라리아가 앉아 있었다.
아니, 리아가.
***
일등석이 좋은 이유야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로 많지만, 지금 이 순간 일등석이 가장 좋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좌석이 넓고, 심지어 칸막이가 높아서 앉아 있으면 좌석에 있는 사람ㅇ리 잘 보이지 않는 다는 거.
리아는 굳이 편한 자기 좌석을 놔두고 내 좌석의 발 받침대에 걸터 앉아 있었다.
“···왜 여기 있는 건데.”
“심심해서.”
심심하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한국까지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제정신인가?
“유명한 사람이던데,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알았구나.”
“조금 전에. 들어오다가 잡지에 실린 사진을 우연히 봤어.”
“처음부터 감추려고 했던 건 아냐. 모르고 있었는데 괜히 불편하게 생각할까 싶어서 말을 아낀 거지.”
사고를 당하기 전의 기억에는 분명 클라리아라는 가수가 없었다.
그 말은 유명해 지기 시작한 게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건데, 어딜가나 사람들이 알아보는 상황에 아직은 적응을 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잠시나마 편하게 지냈던 거겠지.
“상관없어. 신경 안 쓰니까.”
마주 앉은 채로 생글생글 웃으며 날 보고 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진짜 엄청난 미남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절대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래도 오해는 풀렸네?”
“오해?”
“나보고 미녀 스파이라고 했잖아.”
“···미녀 스파이라고 안 했는데. 산업 스파이라고 했지.”
“내 미인계에 넘어왔다며, 그럼 미녀라고 생각했다는 거 아냐? 뭐야, 영 솔직하지 못하네.”
말을 말자.
···근데 또 저게 맞는 말이긴 하네.
무려 11시간이 넘는 비행 중에, 우리 둘은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승무원들은 리아를 알아본 것 같으면서도 설마하는 눈치였고.
그렇게 인천 공항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울리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대표님. AMD와의 계약 건으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딱히 숨기려고 한 일도 아니긴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알아냈네.
한국 기자들의 정보력에 살짝 감탄했다.
심 비서의 문자를 보면서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리아가 슬쩍 물어왔다.
“무슨 문자길래?”
“별 건 아니고··· 이번 계약 건 때문에 기자가 인터뷰 요청을 해왔다고 하네.”
“그래? 기자까지 올 정도면 엄청 큰 계약이었나 봐?”
자랑할 의도는 없었는데, 리아가 워낙에 유명한 가수라는 걸 알게 돼서 그런가.
내심 조금은 레벨을 맞추고 싶었던 건지.
“뭐··· 조금? 이거 괜히 공항까지 찾아온 건 아닌가 모르겠네.”
촤좌자자작-.
입국 게이트가 열리자 마자 미친 듯이 터지는 플래시와 카메라 셔터음.
뒤쪽에서 리아가 나오고 있다는 걸 의식했나?
나도 모르게 허세가 가득 담긴 말이 튀어나왔다.
“여러분, 인터뷰는 정식으로 기자회견 일정을 잡아서···.”
“거기, 남자 분! 좀 비켜봐요!”
“저 사람 뭐야? 사진 가리지 말고 나와요!”
기자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내 바로 뒤에서 리아가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헤-. 나 여기 온 거, 걸렸나 봐.”
아··· 내가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