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GATE RAW novel - Chapter 283
화
사실 일을 저질러 놓고 그 대응을 기다리는 것은 정말 피가 마르는 일이다. 물론 이미 어느 정도는 대책을 세워 놓았다. 설마하니 거점 도시를 날려 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모성에서 본보기로 공격하기 딱 좋은 곳은 모라산 마을이다. 그래서 모라산 마을은 그냥 비워버렸다. 당분간 빈 상태로 유지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곳이 처가가 있는 마을인데 여긴 아직 연합에서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고 그냥 뒀다. 나머진 모두 연합과 관계가 있는 마을이나 도시들이고, 선주민들의 마을들이라도 연합에서 알고 있는 곳은 나와 직접 관계가 있는 곳은 없다. 물론 대지의 일족 마을들 중에서 연합이 알고 있는 곳이 몇 곳이 있긴 하지만 그곳까지 모두 대피 명령을 내리기엔 내 입김이 좀 약했다. 그래서 일단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해서 대지의 일족들, 아니 선주민 전체에게 알려 두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방에 마을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내 경고에 대해서 별로 믿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괴수라고 해도 한 방에 마을이나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린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데 그걸 어딘지도 모르는 먼 곳에서 할 수도 있다는 내 경고가 그들에게 제대로 먹혀들길 바라는 것이 솔직히 내 억지였을 것이다.
어쨌건 며칠이 그냥 흘러갔다.
그 동안 어디에도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아니 공격을 받아서 한 방에 날아가서 소식을 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고다비의 연락으로는 플레인 게이트가 이상 현상을 보인 적이 없다니까 아직 아무 일도 없는 상태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흐르는 동안에 제2 데블 플레인에도 듀풀렉 게이트가 여기저기 제법 설치가 되었고, 부유선과 은폐 도구도 많이 퍼졌다. 거기다가 대지의 일족 프락칸들이 건너가서 정화 의식을 하는 행사도 다시 치러졌다. 그러니까 이쪽에선 돌아가며 프락칸을 파견하고 그 쪽에서는 하코테 깝딴을 주축으로 해서 다른 네 명의 깝딴을 보내서 다섯 깝딴이 괴수 사냥에 동참을 해서 능력을 보태주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깝딴 다섯은 사냥을 해야 하는 특이점을 들어서 경험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아예 이쪽 제3 데블 플레인으로 이민을 온 셈 치기로 한 거고, 프락칸들은 돌아가며 한 달이나 두 달 정도씩 노력봉사를 하러 가는 식이 된 것이다.
그래도 스추알라나 그의 아버지는 물론이고 새로 솟구치는 번개 일족과 뜻을 함께 하기로 한 부족들까지 모두가 불만이 없다고 했다. 그들로서는 땅이 되살아나고 그곳에서 예전처럼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불안은 땅이 죽어서 수확이 없어지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데 그거 이쪽의 프락칸들이 해결을 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더구나 그들은 지금까지 사냥해서 모은 코어가 상당히 많았다. 오죽하면 실버 코어까지 부족에 한 둘이 있을 정도이겠는가.
사실 실버 코어가 있다는 말은 괴수를 사냥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괴수 사냥은 무척 어렵다. 사실 대전사가 우후죽순으로 널려 있는 우리 제3 데블 플레인에서도 괴수 사냥은 무척 희귀한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대전사의 수도 별로 없는 제2 데블 플레인에서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건 아주 간단한 답이 있다. 그쪽에는 깝딴이 있다는 거다. 그들 깝딴들은 괴수라도 자연으로 돌려 보내는 능력이 있다. 아니 지역 코어라도 걸리면 자연의 기운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깝딴들이다. 모이면 모일수록 더 큰 힘을 내기도 한다. 그러니 이런 이들이 있으면 힘이 모자라서 자연으로 돌려 보내진 못해도 괴수를 대전사들이 사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는 것이다.
그렇게 제2 데블 플레인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냥한 괴수의 코어, 즉 실버 코어나 간혹 골드 코어가 부족의 용맹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관되어 전해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걸 내가 좀 챙긴 것도 뭐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준 것이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모성의 반응을 기다리며 손 놓고 지낼 수는 없으니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면서 태연한 척 시간을 보냈다. 물론 속은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연락이 왔다.
얼굴도 보지 못했던 프로커란 작자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 자리에 탁테드와 러츠커도 나온다니 연합의 실세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 될 것 같다. 그나저나 헛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제5 거점 도시의 이알 상점. 그 응접실에 나와 포포니, 텀덤 그리고 허틀러와 연합 그랜드 마스터 삼인방이 모두 모였다. 거기에 고다비와 의외의 까흐제도 모습을 드러냈다. 뭔 일로 이 사람들이 모두 몰려 나왔을까?
“처음 보는군.”
“나도 처음 보네요. 그쪽이 프로커?”
“그렇다. 내가 프로커다.”
“알겠지만 나는 세이컵니다.”
뭐 니가 날 밑으로 보면 나도 널 위로 봐줄 이유가 없지. 그래도 아직은 이 정도로 대우를 해 주는데 상황 나빠지면 너, 이놈, 저놈 할 수도 있는 일이거든?
“다른 분들도 다시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나는 안면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꺼번에 몰아서 인사를 했다.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슬쩍 웃음을 짓는 것으로 인사를 받아 준다. 물론 까흐제는 얼굴이 잔뜩 찌푸러져 있다. 저럴 걸 왜 여기까지 온 걸까? 뭔가 얻을 것이 있으니 왔겠지?
“이번에 아주 제대로 사고를 쳤더군?”
프로커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앉은 나를 보며 말문을 그렇게 열었다.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쌍방이 서로 마주 보며 앉은 이 모양은 참 고전적인 협상 테이블의 모습이다. 이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사고라, 그 전에 협박을 먼저 받아서 말입니다. 내가 또 그런 협박 같은 거 받으면 뚜껑이 열려서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라서.”
“하긴 이번에 모성에서 실수를 하긴 했지. 건드려도 어설프게 건드리면 안 되는 건데 말이야. 말도 없이 끝장을 볼 것이 아니면 그냥 두고 기회를 봤어야 하는 건데 너무 일찍 이빨을 드러내는 실수를 했어.”
우와 아주 대놓고 죽일 기회를 잘 노렸어야 한다는 말을 하네? 이거 지금 도발인 거야?
“프로커, 당신이 계속 그렇게 말을 한다면 우린 당신을 배재하고 이야기를 할 거요.”
러츠커 저 양반이 박쥐라고 했지? 다르게는 조율자? 뭐 그런?
“좋아. 내 기분이나 생각은 필요가 없는 거니까 말이야. 그래 전에 전한 메시지에 보니까 하나의 행성을 중간에 두고 데블 플레인에 대한 모든 거래를 그곳에서 하자고 했지? 거기에 플레인 게이트에 대한 전면적인 폐쇄까지 이야기를 했더군.”
“뭐 다른 행성으로 가는 거야 이쪽에서 알아서 오고 가면 될 일인데 굳이 플레인 게이트가 필요 있나?”
“그럼 자네는 행성 어디건 자유롭게 다니면서 모성에선 데블 플레인으로 통하는 플레인 게이트를 포기하라는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래서?”
“자네 역시 교역 행성이 될 그곳으로 통하는 게이트 이외의 게이트는 모두 철수를 하라는 이야기지. 그렇게 하면 모성에서도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데블 플레인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자네에게 넘기겠다고 하더군.”
“데블 플레인에 대한 모든 권리라. 웃기는 이야기로군. 모성이 언제부터 데블 플레인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 모성에서 해 준 것은 플레인 게이트를 열어서 일개미와 헌터를 데블 플레인에 밀어 넣는 것 밖엔 없었던 걸로 아는데?”
“플레인 게이트가 없었으면 데블 플레인에 누가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자네가 여기 있는 것도 모두 플레인 게이트의 덕이란 것을 잊지 말게.”
어이구 열 받으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