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en In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16)
필드의 외계인-16화(16/404)
제16화
2029년 새해가 되자 주변 사람들이 날 대하는 게 뭔가 달라졌다.
“지우!”
알리샤와 마르시오는 더 이상 날 ‘아드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편하게 이름으로 불렀다.
“이거 가져가서 동료 선수들이랑 같이 먹어.”
“이게 뭐예요?”
“연말에 온 덩치 크고 빡빡머리인 애 있잖아?”
“기예르모요?”
“걔가 엠파나다 잘 먹더라고. 가져가서 훈련하다가 배고프면 같이 먹어.”
“감사해요.”
매일 식사를 차려주시는 것도 모자라 틈틈이 간식거리를 챙겨줬다.
그리고 디에고 로시는 매일 전화나 문자로.
– “2군으로 언제 올 거냐고!”
2군으로 얼른 오라며 보챘다.
때가 되면 알아서 올라가겠지, 내가 가고 싶다고 올라갈 수가 있나.
“유! 오늘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아내가 언제 한번 데려오라고 해서.”
훈련이 끝나면 감독님은 짐 정리하는 나에게 찾아와선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어색한 미소로 상황을 모면하는 게 힘들었다.
주변 사람들만 그러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은 심심해서 동네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처음 보는 사람들도 나를 알아봤다.
“꼬마야! 과일 먹을래?”
동네 과일 가게 아주머니가 날 알아보곤 과일을 선뜻 내어줬다.
“집에 생선은 안 부족해?”
수산물 가게 아저씨도.
“애들은 완제품을 좋아한다고요! 이거 먹을래?”
동네 어른들도 다 친근하게 대했다.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한 건가?
“어! 꼬마야!”
“꼬마라니! 엄연히 지우 유라는 이름이 있다고!”
“지우! 발음하기도 편한 이름이네.”
“찌우!”
…아니,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이건 정도가 심하잖아요.
* * *
2월, 쿨라우수라(clausura) 기간이 되자 U-20 선수단은 새롭게 개편됐다.
“와.”
“라커룸이 다 바뀌다니.”
“오! 이거 봐봐, 등번호도 새롭게 배정됐다!”
“난 6번!”
“14번!”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에서 이긴 보상으로 구단에서는 낡은 라커룸을 뜯어고쳤다.
“유, 너는 몇 번이야?”
기예르모 다린은 9번 유니폼을 들고서 나에게 물었고 난 라커룸에 걸린 유니폼을 꺼냈다.
“10번.”
10번 유니폼은 지금까지 주인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드디어 10번의 주인이 나온 건가?”
“네가 감독님 마음에 제대로 들었나 보다.”
“뭐 유라면 인정, 솔직히 크리스마스 더비에서 엄청났잖아. 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한 녀석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단번에 에이스 등극이지 뭐.”
다른 번호들도 중요했지만, 축구에서 10번의 번호가 주는 무게감은 다른 번호들과 달랐다.
‘에이스.’
선수단을 비롯해 모두에게 인정받는 선수들만 다는 번호였다.
탁.
가만히 유니폼을 보고 있자 어느새 내 뒤로 온 감독님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새로운 번호는 마음에 드나?”
“예.”
“부담감은?”
“있죠.”
감독님은 약간 실망한 눈치였다.
“그래도 감당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내 말에 금세 눈을 반짝였다.
“감당할 자신이라. 10번은 아르헨티나에서도 아주 특별한 번호다. 특히 보카 주니어스의 10번은 축구의 신 흔적이 깊게 새겨진 번호라 쉽게 달 수 있는 번호가 아니지.”
아르헨티나 축구의 신.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이 번호는 하늘의 별이 된 그의 번호였다.
프로가 아닌 유스 유니폼이라도 약간의 부담감은 있었다.
10번은 그만큼 아르헨티나에선 무게감이 있는 번호니까.
“애초에.”
그래도 한편으로는 인정을 받는 거 같아서 기뻤다.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로 바다를 건너 온 겁니다.”
그저 어중간한 선수로 남아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그 먼 거리를 바다 건너 이곳에 온 이유는 성공하고 싶어서였다.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최고의 축구 선수로.
“좋은 눈빛이군. 그런 눈빛이면 이 번호를 믿고 맡겨도 됐겠어.”
흐뭇한 미소를 지은 감독님은 라커룸 중앙으로 이동했다.
“주목!”
그러곤 선수들을 집중시켰다.
“라커룸이 바뀌어서 좋은 건 알지만, 들떠 있지 마라! 이 대우는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까!”
선수들은 일제히 뒷짐을 지고 감독님의 말을 경청했다.
“다음 주부터 U-20 유스 리그의 쿨라우수라가 시작된다.”
“네!”
“아페르투라(apertura)는 리버 플레이트 꼬맹이들에게 넘겨줬지만! 쿨라우수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 알겠나!”
“예!”
유스 리그는 프로 리그처럼 경기 수가 많지 않았다.
아직 자라는 선수들이기에 무리하지 않게 적정 경기 수를 유지해줬고 그래서 전반기 아페르투라 15경기, 후반기 쿨라우수라 15경기로 1년 동안 30경기를 치른다.
거기에 매년 8월, 아페르투라 1위 팀과 쿨라우수라 1위 팀이 대결하는 아르헨티나 최고 유스를 가리는 결정전인 아르헨티나 주니어컵(Argentina Junior Cup)이 열리며 1년에 총 31경기를 치르게 된다.
“첫 경기는 아르헨티노 주니어스 U-20 애들이다. 경기에 나갈 포지션을 발표한다.”
감독님은 골키퍼부터 수비 순서로 발표했다.
엔트리에 든 선수들은 밝은 미소를, 그렇지 못한 선수들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유, 넌 오른쪽 공격형 미드필더로 나간다.”
“네.”
태연하게 대답하자 감독님은 웃었다.
“오른쪽 윙포워드가 아니라 당황하진 않았어?”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온 지 얼마 안 된 선수에게 여러 포지션을 경험시키는 건 일반적인 일이잖아요.”
유스팀에서 포지션 변경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여러 포지션을 경험시킨 후, 가장 뛰어난 포지션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이니까.
“…넌 인생 두 번째 사는 거 아니냐?”
그런 나에게 감독님이 이상한 소리를 던졌고.
“그러면 로또를 샀겠죠.”
가볍게 받아줬다.
“아. 하긴 그렇군.”
그런데 그걸 왜 납득하시는 겁니까.
* * *
2월 8일.
보카 주니어스 U-20 vs 아르헨티노 주니어스 U-20.
“기예르모, 원래 이렇게 많은 관중이 찾아와?”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에서의 활약 때문에 경기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관중이 찾아왔다.
“평소는 이 수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아마 크리스마스 더비를 보고 온 관중들인 것 같다.”
거기다가 구단 관계자들이 경기장에 왔다는 소식을 사전에 들어서 그런지 선수들의 표정은 무언가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뭐가?”
“너 메짤라로 뛰는 건 처음이잖아.”
메짤라(Mezz’ala), 4-3-3 포메이션에서 두 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처음이라도 영상으로 많이 봤어.”
메짤라는 처음이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를 하는 건지는 파악했다.
차명훈이 보내준 자료도 많은 도움이 됐고 훈련하면서 코치진들의 도움으로 익숙해졌으니까 큰 문제는 없었다.
“…영상?”
기예르모 다린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윙에서 하던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아.”
그렇게 선수들은 각자 포지션으로 갔다.
나랑 같이 메짤라에서 호흡을 맞출 선수는 ‘라우타로 오르반’이었다.
“저, 저기.”
굉장히 소심한 성격.
지난 미니 엘 수페르클라시코에서 안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주긴 했어도 제대로 활약하지 못한 녀석이었다.
“응?”
“어떤 스타일로 플레이할 거야…? 아! 오해는 하지 마. 그냥 궁금해서…. 거기에 맞춰서 플레이하는 게 편하기도 하고….”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걸 봐선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음, 그냥 훈련에서 맞춘 대로 하면 되지 않아?”
“아….”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네가 훈련할 때, 워낙 다양한 패턴을 보여줘서 헷갈려. 그러니까 득점을 주로 노리는 미드라이커인지 횡적으로 하는 하프 윙인지, 종적으로 하는 박스 투 박스, 아니면 수비적으로 하는 인콘트리스타(Incontrista)…. 네가 하려는 스타일만 말해줘.”
똑똑한 거 같기도 하단 말이지.
“소통하면서 맞추자.”
“…어?”
“필드에서 변수가 많잖아. 그러니까 소통하면서 맞추는 게 편하지 않겠어?”
내 제안에 라우타로는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인 제안이네.”
* * *
삐—-익!
경기가 시작되고 10분이 흘렀다.
우리는 지난 경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수비적인 불안함을 해결하지 못했다.
감독님이 그 점을 고치려고 노력했으나 니자레노까지 2군으로 올라가는 탓에 선수들의 호흡이 맞지 않아 아르헨티노 주니어스 U-20에게 번번이 슈팅을 허용했다.
촤—-악!
그럴 때마다 내가 내려가서 커버를 해줬다.
공격할 때는 위로.
수비할 때는 아래로.
필드 전체를 누볐다.
‘그건 그렇고.’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상하게 플레이가 편하다는 거였다.
몇 분 후,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건 또 한 명의 메짤라, 라우타로 오르반 덕분이었다.
“내가 갈게!”
혹시라도 내가 커버하지 못하는 구역이 생기면 라우타로 오르반이 재빠르게 한발 먼저 이동해 커버하며 부담 없이 편하게 해줬다.
퍼—-억!
몸싸움이면 몸싸움.
촤—–악!
태클이면 태클.
플레이에 망설임이 없었다.
소심한 성격과 달리 플레이 스타일은 화끈했다.
볼이 나간 사이에 라우타로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라우타로.”
“응?”
“넌 원래 그렇게 플레이하는 거야? 크리스마스 때도 그렇고 지금도 뒤만 봐주고 있잖아.”
내가 본 라우타로는 자기가 돋보이려고 하는 것보단 동료를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하는 선수였다.
이런 선수라면 공격형 미드필더보다는 후방을 지원하는 홀딩 미드필더가 더 적성에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라우타로는 내 말을 듣고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앞집 마리아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먹을 때의 미소처럼 해맑은 미소였다.
“응! 누군가를 도와주면서 플레이하는 게 재미있고 무엇보다… 너랑 뛰는 게 재밌어. 그동안 같이 뛴 애들은 소통도 안 되고 플레이 스타일도 제각각이라서 도와주는 게 힘들었거든.”
그 말에 난 잠깐 말을 잃었다가 대답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너랑 뛰니까 편하고 좋네.”
호흡도 나쁘지 않았고 계속해서 소통하며 플레이하니 불편한 것도 없었다.
라우타로가 많이 맞춰주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편안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이번에는 라우타로가 나에게 질문했다.
“뭔데?”
“넌 왜 패스를 안 해? 대부분 돌파로 해결하려고만 하고? 패스로 풀어갈 상황이 많았잖아.”
경기가 시작되고 15분.
그 시간 동안 내가 한 패스라곤 라우타로와 주고받은 횡패스 6개가 고작이었다.
“…그게 익숙해서.”
패스로 풀어가는 방식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무작정 돌파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는 건 잘 알았다. 축구는 99%의 패스로 이뤄진 스포츠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패스를 할 때마다 망설여졌다.
이래도 되나?
이 패스가 가면 나에게 다시 기회가 올까?
한국에서 했던 경험.
그 경험 때문에 패스라는 건 어느새 나에게 두려운 것이 되어 있었다.
이어서 경기가 진행됐다.
그 후에도 패스하지 않고 돌파를 하려다가 막히면 백패스를 보내 상황을 살피기를 반복했다.
‘압박이 빨라졌어.’
초반보다 압박하는 타이밍이 빨라졌다.
그렇다고 틈이 없는 건 아니었다.
퍼—억!
몸싸움에서 버티며 수비수를 등지고 있는 사이에 홀딩 미드필더인 세바스티안이 패스를 보냈다.
발만 뻗어 원터치로 방향만 틀어 라우타로에게 주고 재빠르게 돌아서 달려갔다.
툭.
라우타로와 2대1 패스를 하며 압박하던 선수를 가볍게 제쳐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백업도 빠르다.’
오른쪽 풀백이 어느새 라인을 올려 백업을 온 거였다.
볼을 받는 타이밍에 맞춰 들어오는 스탠딩 태클을 보곤 볼을 발바닥으로 끄는 드래그 백으로 피했다.
탓!
그러곤 순간 스피드로 옆을 빠져나갔다.
드리블하면서도 고개를 들어 전방을 살피니 기예르모 다린이 센터백 중 한 명을 끌고 다니며 공간을 창출하려고 분주했다.
하지만 워낙 타이트한 수비에 제대로 된 공간이 생겨나지 않았다.
오른쪽 윙포워드도.
왼쪽 윙포워드도.
침투하는 모션만 할 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나에게 보이는 오로지 골문 하나면 충분했으니까.
휘릭.
앞을 가로막는 수비 두 명 사이로 마르세유턴을 해서 들어갔다.
그대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는데.
꽉.
수비 두 명이 유니폼을 붙잡고 늘어졌다.
균형이 흔들려 몸이 뒤로 쏠렸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뒤로 넘어질 상황.
그때였다.
내 시야에 달려 나오는 골키퍼가 보였다.
투-웅.
머리보다는 본능이 앞섰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며 골키퍼의 머리 위로 시도한 로빙슛.
볼이 발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유니폼을 잡아끌던 두 명의 수비수와 같이 넘어졌다.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볼을 응시했다.
“으윽!”
골키퍼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막으려고 했으나 아슬아슬하게 볼에 닿지 못했다.
철렁.
동시에 귀로 들려오는 함성.
자리에서 일어나 세레머니를 하려는데 뭔가가 무거웠다.
“그만 놓지?”
아래를 보니 수비수 한 명이 여전히 내 유니폼을 붙잡고 있었다.
“내 유니폼이 가지고 싶어?”
“…젠장.”
“그렇게 원해도 이건 안 줄 거야.”
이 유니폼은 아버지한테 주기로 약속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