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ien In The Field RAW novel - Chapter (21)
필드의 외계인-21화(21/404)
제21화
며칠 후.
5월 초, 부에노스아이레스 라 보카 거리.
“응? 저기 저 사람들 뭐지?”
사람들의 시선은 한곳을 향했다.
“왜 요새 유스에서 날아다니는 동양인 애 있잖아.”
“아~ 우리 승리 요정?”
“응, 걔 가족들이잖아.”
길거리를 걷거나 음식점에 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엔 열 명 넘는 사람들이 ‘YOO JI WOO’라고 마킹된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정작 그 사람들은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축구의 나라에서 이렇게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니는 건 밥을 먹는 것만큼 흔한 일이니까.
“사장님! 유는 언제쯤 2군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무슨 말 없어요?”
줄리아의 말에 주변에서 시선이 집중됐다.
“아직 못 물어봤어.”
“에? 진짜요? 사장님 성격이시면 바로 물어봤을 거 같은데.”
“오랜만에 아들이 웃으며 축구 하고 있는데 괜히 부담을 주긴 싫더라고.”
한국에 있을 때는 집에서도 축구 얘기하는 걸 꺼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집에 오면 먼저 축구 얘기를 꺼낼 만큼 밝아진 아들에게 언제 프로가 될 거냐며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아들이 그동안 즐기지 못한 축구를 원 없이 즐기면서 할 수 있게끔.
“그러니까 너희들도 가만히 기다려. 알겠지?”
“아들 바보이신 사장님답네요.”
“우리 아내는 더 해.”
“진짜요? 꼭 한번 뵙고 싶네요.”
유한우는 순간 아내 서설희를 떠올렸다.
첫 만남을 2006년 때, 독일에서 월드컵을 보다 만난 사이라 결혼 후에도 같이 축구 경기를 보러 가는 걸 즐겼다.
지금이야 애들이 있어서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축구에 미쳐있다면 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삶 자체가 축구에 맞춰져 있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진짜 대단했지.’
그렇게 도착한 경기장.
아들의 경기를 보러 몇 번 왔지만, 오늘따라 사람들이 많았다.
“6년 만에 우승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이 많네.”
보카 주니어스 U-20은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어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조기 우승을 확정 짓는 거였다.
“그야 당연하죠! 매년 리버 플레이트 녀석들이 우승 타이틀이니 뭐니 다 가져갔는데!”
“맞아! 그 닭대가리들, 그리고 엄청나게 조롱했지.”
“으으, 운만 더럽게 좋은 것들.”
“우리가 봐준 것도 모르고 말이야.”
이야기를 나누며 좌석으로 가자 이미 도착한 한인회 사람들이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어!”
아이들과 음료를 마시던 여성분이 유한우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총무님 오셨습니다!”
“다들 유니폼 잘 어울리시네요!”
한인회 가족들 전원이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사장님이 예쁘게 맞춰줘서 그렇죠. 이곳으로 오시죠. 주문하신 플래카드도 왔습니다.”
앞에서 젊은 사람들이 벽에 거는 문구를 보자 유한우는 활짝 웃었다.
“흐흐흐흐.”
“마음에 드세요?”
“네, 제 아들이 기뻐하는 얼굴이 벌써 기대됩니다.”
줄리아가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뭐라고 적혀 있는 거예요?”
* * *
며칠 전에 1부 리그를 보고 와서 그런지 경기를 준비하면서도 가슴이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도 얼른 올라가고 싶다.
라 봄보네라에서 뛰고 싶다.
그 열망이 온몸을 휘감았다.
경기를 위해 워밍업을 하러 필드로 나오자 귓가에 엄청난 환호가 들렸다.
“…….”
환호가 나온 곳을 보는 순간 말을 잃었다.
“유, 저기 네 가족이야?”
“…….”
라우타로 오르반이 와서 묻는데 난 고개를 저었다.
유니폼도 유니폼이지만, 그 앞에 내걸린 플래카드.
< 유지우를 사랑하는 모임, 유사모! >
여러 플래카드에서 유독 저게 눈에 띄는 이유는 한국어로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 거야?”
“내가 나중에 말해 줄게.”
“응.”
라우타로 오르반은 별말을 안 했고 워밍업을 시작했다.
10분가량의 워밍업이 끝나고 라커룸으로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의 허락을 맡고선 아버지가 있는 관중석으로 걸어갔다.
“아버지?”
보카 주니어스 엠블럼이 새겨진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팔에 완장을 찬 아버지는 무슨 전투에 나가는 전사 같았다.
“우리 아들!”
“이건 다 뭐예요?”
“하하하하하! 아들이 향수병에 빠질까 봐 그리운 한국어로 만들었다!”
주변에서도 모두 반겨줬다.
“유!!! 내가 왔다!”
“줄리아 좀 앉아!”
식당 직원.
“꼭 이기세요!”
한인회 사람들.
“몸 충분히 풀었지?”
“다치지 말고! 저딴 놈들은 단숨에 숨통을 끊어줘야 해!”
“이대로 컵까지 가자!”
그리고 알리샤 아주머니네 가족까지.
“이겨라.”
아버지가 난간에 기대어 주먹을 내밀자 피식 웃으며 주먹을 맞댔다.
“예.”
아버지의 미소를 보자 거짓말처럼 1군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몸이 가벼워졌다.
욕심부리지 말자.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그냥 하던 대로 하면 언젠가 올라가겠지.
지금은 그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신경 쓰자.
* * *
“흐—아. 돌아오시자마자 여기 오신 거예요?”
운영팀원인 다니엘은 옆 사람에게 음료를 건네줬다.
그 음료를 받는 사람은 유지우를 스카우트한 로드리고였다.
“내가 데리고 온 선수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봐야지.”
아시아 일정을 끝내고 어젯밤에 입국해 구단으로 출근도 하지 않고 곧장 경기장을 찾아왔다.
“극성이시라니까.”
다니엘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로드리고의 열정을 말릴 사람은 구단 그 어느 곳에도 없었으니까.
“1군에서는 언질이 없어?”
“무슨 언질이요?”
“유를 1군으로 올리는 거.”
“있죠. 7월에 2군으로 올려서 상황을 보고 괜찮으면 2030년 1월에 1군으로 올릴 거라고 내부적으로 말이 나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로드리고는 살짝 놀랐다.
“호오, 얼간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일 처리 잘하네.”
“물론, 유소년 총괄 단장은 아직 이르다고 하지만요.”
“그놈은 항상 그래. 보는 눈은 있지만, 신중해도 너무 신중해. 그래서 기회 못 받는 녀석들이 클럽을 떠나 버리잖아.”
“어쩔 수 없죠.”
다니엘도 착잡했다.
실제로 보수적인 운영을 하는 유소년 총괄 단장 후안 몬테로 때문에 떠난 유능한 선수들이 많았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놈은 겁쟁이야. 선수를 빠르게 올렸다가 폼이 망가지면 자기가 책임을 질까 봐 그러는 거라고.”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렇지?”
“근데 저 혼내려고 부른 거예요?”
“아니, 유에 대한 구단의 의견 좀 들어보려고.”
“그러면 저 이제 가도 돼요?”
“가긴 어디를 가. 보고 가야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어느덧 관중석에 사람들이 채워졌고 곧이어 주심의 휘슬과 동시에 보카 주니어스 U-20의 킥오프로 경기가 시작됐다.
“유!”
시작하자마자 세바스티안이 선택한 곳은 오른쪽 윙포워드로 출전한 유지우였다.
“온다! 리카!”
산 로렌소 감독은 유지우의 위험도를 알고 있었다.
경기 초반부터 그 주위로 두 명의 선수, 그리고 백업 선수까지 총 세 명의 선수로 압박을 가했다.
‘수비 라인의 균형이 무너진다고 해도 저놈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된다.’
아시아 선수라고 무시해선 안 됐다.
국적에 가려진 실력.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아시아인이라고 무시했다가 당한 클럽이 수두룩했으니까.
“좀 더 타이트하게! 공이 빠져나갈 곳을 최대한 없애!”
산 로렌소는 사전에 훈련한 대로 유지우를 몰아붙였다.
퍼—–억!
상대 선수가 욕을 하면서 거칠게 몸으로 부딪쳤지만, 유지우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왜소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바디 밸런스.
자세를 낮추며 그 힘을 이용했고 발바닥으로 볼을 끌며 상대 선수들의 발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러다가.
한 번의 틈이 보이자.
툭, 투—둑!
라 크로케타(팬텀 드리블)로 빠져나갔다.
180cm가 넘는 체구의 선수들을 172cm의 선수가 찢어버리자 관중들은 감탄했다.
“유의 플레이는 보는 맛이 있다니까!”
“몸으로 찍어 눌러도 안 밀려.”
“하는 거 보면 곧 2군으로 올라가겠는데?”
이미 팬들 사이에서 유지우의 돌파력은 인정받았다.
상대가 아무리 에워싸도 뚫고 나오는 시원한 모습에 벌써 유지우의 팬층이 생겨날 정도였다.
20분 후.
아직 득점이 나오지 않았다.
유지우가 오른쪽 측면부터 올라와서 시도한 슈팅은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유는 다 좋은데 패스를 너무 안 해, 방금도 기예르모한테 줬으면 득점 찬스 나오는 거였잖아.”
패스는 여전히 부족했다.
“흐음.”
“뭘 그렇게 생각해?”
“사실 유에 관해서 들은 게 있거든.”
그 말을 한 팬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렸다.
“뭔데?”
“한국에서 유가 휘말린 일 알지?”
“감독 폭행? 유에 관해 찾아본 사람이라면 다 알지.”
남성 팬은 한마디 했다.
“유가 패스를 하지 않는 게 그거랑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고민하는 사이에 한 사람은 필드에서 펼쳐지는 플레이를 보곤 피식 웃었다.
“근데 뭐.”
철렁.
“패스를 안 해도 대단하잖아.”
치명적인 패스가 없지만, 치명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
그렇기에 팬들은 더욱 환호를 질렀다.
“하긴.”
“멋지면 됐지!”
“패스가 없어도 유한테는 드리블이 있으니까!”
오른쪽 측면에서 올라오며 기예르모의 패스를 원터치 슈팅으로 마무리한 유지우의 골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라우타로.”
세리머니 한 뒤에 유지우는 라우타로 오르반에게 손짓했다.
“왜?”
“내가 한 가지 생각한 게 있는데 들어볼래?”
유지우는 더는 필드에서 조용히 있지 않았다.
어느덧 자신이 주도해 나가는 걸 즐겼다.
1년의 공백으로 잊혔던 감각.
한국에서 징계가 풀리고 다시 필드를 밟으며 ‘드리블’의 감각이 돌아왔다면 이번에는.
‘플레이 메이킹(Play Making).’
아르헨티나에서 여러 경험 덕분에 잊혔던 다른 감각도 돌아왔다.
“어떤 거?”
유지우가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하자 라우타로 오르반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사인은 눈짓으로 맞추자.”
“응!”
그 뒤에도 유지우는 측면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상대 선수가 고립시키려고 오면 중앙으로 달려 나가며 그들의 빈 곳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툭.
결정적인 패스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횡패스로 라우타로 오르반과 압박을 절묘하게 피했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파괴력.
그로 인해 느껴지는 극강의 카타르시스.
“그렇지!”
그들은 서서히 유지우가 펼치는 마법에 빠져갔다.
그 마법의 하이라이트는 아직이었다.
스윽.
유지우는 침착하게 필드 위 상황을 살폈다.
산 로렌소가 압박 강도를 높여 자신에게 몰리는 상황에 신호를 내렸다.
찡긋.
라우타로 오르반은 신호가 나오자 망설이지 않았다.
끄덕.
유지우가 중앙에 있는 라우타로 오르반과 스위칭으로 위치를 바꾸자 산 로렌소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로돌포 핀티는 벤치에서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 상황에서 스위칭을?’
훈련 때도 맞추지 않은 플레이였다.
스위칭 플레이는 서로의 플레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신뢰가 있지 않은 이상은 불가능했으니까.
‘설마, 유가 드디어 마음을 연 건가?’
스위칭으로 산 로렌소의 라인을 박살 낸 유지우는 중앙에서 볼을 터치하고 기예르모 다린을 봤다.
센터백을 등지면서 오프사이드 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위치에 있었다.
패스?
돌파?
평소였다면 돌파로 했을 테지만, 유지우는 점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축구 하는 게 외로웠다. 그래서 패스를 줄이고 돌파를 늘렸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축구 하는 건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앞에서 웃으며 뒤통수를 치는 친구들이 아닌 항상 즐겁게 해주는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투—-웅.
마침내 잊혔던 신뢰가 유지우의 발끝에서 시작되어 골대까지 이어졌다.
‘쟤가 패스를?!’
다들 당황한 틈에 기예르모 다린이 수비진을 무너트리고 들어가며 발을 쭉 뻗었다.
“나와!”
골키퍼도 달려 나왔다.
그러나 반응하는 게 늦었다.
유지우가 패스한 위치는 수비수와 골키퍼의 사이 공간.
골키퍼가 가장 판단하기 어려운 곳으로 들어갔으니까.
툭.
골키퍼가 한 걸음 정도 늦었고 기예르모 다린은 가볍게 발만 가져다 대며 볼의 방향만 틀었다.
볼은 발을 맞고선 골키퍼를 지나쳐 왼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고 수비수 한 명이 죽기 살기로 따라갔다.
촤—–악!
슬라이딩까지 하며 볼을 걷어내려고 했지만, 볼은 이미 골대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와아아아아아아!
골을 넣은 기예르모 다린에게 초점이 맞춰졌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니었다.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줄리아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는 유한우에게 물었다.
“…사장님, 유가 패스도 저렇게 잘했어요?”
남들이 볼 때도 완벽한 패스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한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응?”
말을 잊은 그들을 보곤 유한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말 안 했나? 우리 아들, 사건 전에는 돌파를 주로 하는 크랙 스타일이 아니라 중앙 미드필더에서 패스 뿌려주던 사령관 스타일이었어.”
유지우가 처음 필드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드리블이 아닌 패스였다.
“…네?! 그게 정말이에요?”
모두가 놀랐다.
딱 봐도 유지우는 드리블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처럼 보였는데 중원 사령관 출신이라니.
“응.”
“왜 말 안 해주셨어요!”
줄리아가 팔을 잡아당기며 투덜거리자 유한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무도 안 물어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