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e supporters are hammocked RAW novel - Chapter 102
102화 튼튼이 볼펜
고현우는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미동 하나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기의 파동과 함께 옅은 미풍이 불었고, 특수연공실의 농도 짙은 마나가 파도치듯 일렁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의 파동도 잠잠해지고 미풍도 점차 정돈되며 가라앉았을 무렵.
고현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아침이로군.’
고현우의 하루는 이렇듯 특수연공실에서 밤새 운기조식을 하다가 눈을 뜨면서 시작되었다.
벽곡단 한 움큼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단백질 쉐이크를 원 샷한 다음 교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실력을 배양하는 것만큼이나 지식을 쌓는 것 역시 중요하기에, 수업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들어가는 고현우였다.
몬스터와 던전, 스킬과 특성, 각종 아이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그에게는 더없이 유익하게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면 멘토인 선배 고수의 지도를 따라 수련을 하며, 주어진 실기 평가를 수행한다.
이쯤 되면 벌써 하루의 절반가량이 지나간 상태.
그러나 아직 휴식을 취하기에는 이르다.
틈틈이 한소미와 목검을 휘두르며 대련한다.
한소미는 여전히 별로 안 내키는 기색이었지만, 일단 대련에 들어서면 건성건성 하지 않고 끝까지 진지하게 임했다.
한바탕 검을 섞고 나면 고현우가 빙긋 웃으며 말한다.
– 한 소저, 오늘도 고생 많으셨소. 그럼 다음에 또.
– 흥, 당과 다 떨어지면 안 해 줄 거야.
콧방귀를 끼고 떠나는 한소미.
그러나 김호에게 듣기로는 당과를 꽤 많이, 한 아름 안겨 줬다 하니 다 떨어질 때까지는 한참 남지 않았나 싶다.
다음으로 조용한 곳에 홀로 앉아 명상에 들어간다.
수업, 멘토링, 공략전, 대련…….
배우고 겪은 모든 것을 되새기고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싶어서 고현우가 눈을 뜨면, 바로 앞에 세워 둔 달마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름 모를 기인이 조각한 달마상.
흑사방에서 김호가 얻은 뒤 통 크게도 제게 빌려준 것이다.
당시 잠시 살펴본 것만으로도 깨달음을 얻어 백사의 삼초식 시험을 견뎌 낼 수 있었다.
시간을 두고 관찰한다면 그 이상을 얻을지도 모른다.
“…….”
달마상의 웃는 얼굴을 뚫어져라 마주 보는 고현우.
어느 날은 별다른 소득 없이 시간 낭비만 하고 끝났지만,
어느 날은 아주 조금이나마 그 무리(武理)의 끝자락을 엿볼 수 있었다.
어느 날은 얻는 것이 꽤 많아, 그 흥취를 못 이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너울너울 검무를 추기도 했다.
달마상과 한참 눈싸움을 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덧 밤이 깊어 밖이 어두컴컴하다.
그때부터는 특수연공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간다.
또다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련 또 수련.
장래의 영웅을 꿈꾸는 용살학원 학생들조차 학을 뗄 듯한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고현우는 요즘이 가장 즐거웠다.
하루하루 강해진다는 느낌을 이토록 뚜렷하게 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일취월장이라는 단어가 그야말로 제격이었다.
이런 나날들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진다면 수련의 고통도 웃으면서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김 형에게 감사해야겠군.’
그리고 이토록 빠른 성장에 대해 즐거워하는 만큼, 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준 김호에 대한 고마움도 컸다.
돌이켜 보면 어느 하나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수연공실 시즌 패스, 튼튼이 클립, 주술검, 멘토링, 달마상, 한소미와의 대련…….
김호는 그것들이 ‘합당한 대가’라고 말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동료로서 던전에 함께 들어가, 목숨을 걸고 싸워 주는 대가라고.
그러나 고현우가 받아들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친우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손을 보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또한 무인이라면 강자와의 싸움에 기꺼이 목숨을 걸 줄 알아야 한다.
대가를 받을 게 아니라, 오히려 기회를 마련해준 김호에게 고마워해야 맞다.
그렇다면 그 당연한 것들을 모두 빼고, 그가 김호에게 해 준 것은 무엇이 있는가?
언제나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은 느낌이었다.
‘이 빚은 두고 두고 갚아 나가야 할 것이다.’
고현우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천풍문의 제자는 은(恩)도 원(怨)도, 결코 잊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 * *
“받아.”
고현우는 김호가 불쑥 내미는 물건을 조건반사적으로 받아들었다.
받고 나서 확인해 보니 손바닥만 한 작고 가느다란 상자였다.
“웬 것이오?”
“네 거.”
김호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빨리 열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또 뭘 자꾸 주나 싶으면서도 내용물이 궁금하기도 했기에 고현우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진 볼펜 한 자루.
뚜껑을 여닫는 형태이며 전체적으로 은은한 검은 광택을 머금었다.
“허어.”
고현우는 천성이 무인으로 학용품 따위에 가치를 두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이 볼펜을 봤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임이 느껴졌다.
멍하니 볼펜을 들여다보던 고현우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전체적으로 검은빛을 띠고 있어 다른 금속인 줄 알았으나,
“이것은 만년한철이 아니오?”
흑사방에서 온갖 고난 끝에 얻은 [방주의 주괴 상자].
거기에 서예인의 엄청난 행운이 더해져서 뽑은 만년한철.
이 볼펜은 바로 그 만년한철로 제작한 것이었다.
김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찬가지로 은은한 묵빛을 머금은 단봉을 내보였다.
새로 제작한 무기인 듯했다.
“이거 만들고 재료가 조금 남더라. 낭비하기도 아깝고 해서 대장장이 아재—선배님한테 따로 부탁을 드렸지.”
“으음…….”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으나, 고현우는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장인이라는 작자들이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부탁 몇 마디 한다고 뭘 더 만들어 줄 리가.
분명 모종의 거래가 오갔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호가 고현우의 앞주머니에 꽂아 둔 클립을 가리키고,
[튼튼이 클립(D)]▷무기 내구도 보호
▷무기 내구도 자동회복
다시 볼펜을 가리켰다.
“그거랑 그거, 붙여 봐라.”
“……?”
고현우가 의아함에 볼펜을 자세히 확인해 보니, 과연 뚜껑 부분에 아주 작고 정교한 홈이 마련되어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클립을 장착하자 처음부터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애초에 두 아이템을 합치는 것을 상정했던가.
고현우가 김호의 설계에 감탄하며 아이템 설명을 확인했다.
그리고 또다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엄청난……!”
[튼튼이 볼펜(A)]▷매우 높은 마나 전도율
▷손상 방지(A) 적용
▷무기 손상 방지(C) 적용
▷무기 내구도 자동회복
만년한철이 재료로 들어갔을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그럼에도 무려 A급이다.
고현우가 하산하고 본 아이템 중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튼튼이 클립]의 ‘무기 내구도 보호’ 옵션은 분명 도움은 주는 듯했으나 크게 체감은 되지 않았었다.어렴풋이 [깃털뱀 주술검]의 높은 내구도와 상호 보환된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
이제는 그 ‘무기 내구도 보호’가 ‘무기 손상 방지(C)’로 바뀌었다.
확실하게 랭크로 매겨지는 C급.
C급이 결코 낮지 않은 등급임을 감안하면, 앞으로 고현우가 강한 초식을 연이어 사용하더라도 주술검이 파괴되는 모습은 보기 어려우리라.
게다가 볼펜은 볼펜이지만 무려 만년한철로 제작한 볼펜이다.
만년한철의 강도를 생각하면 누구 머리를 찍어 버리기에는 충분하니 부무장으로 써도 좋을 듯했다.
다만 아이템의 성능은 성능이고…….
이미 김호에게 조금씩 부채감이 쌓여 가는 고현우의 입장에서 이 튼튼이 볼펜은 마냥 달갑기만 한 선물은 아니었다.
고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김 형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소. 허나 계속 이렇게 받기만 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못하구려.”
그러자 김호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계속 받기만 한다니, 계산이 왜 그렇게 되냐. 흑사방에 같이 들어갔는데 너한테도 지분이 돌아가야 맞지.”
“그렇지 않소. 본인의 지분은 달마상만으로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하오.”
“그건 잠깐 빌려준 건데 왜 차고 넘쳐?”
“빌려준 것은 달마상이지만, 김 형이 실제로 본인에게 준 것은 기연을 얻을 기회 아니오? 목숨을 걸 가치는 충분하지.”
“음. 그러냐.”
고현우가 뜻을 굽힐 기미를 보이지 않자 김호가 잠시 침음하더니, 이내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정 그러면 선금이라고 생각해.”
‘선금’이라는 말은 다음에 그들이 얻을 무언가에서, 고현우의 지분을 볼펜으로 대신한 셈 치자는 말이다.
그 무언가는 십중팔구 던전 보상이 될 테고, 그것은 곧 조만간 던전에 들어갈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건 듣던 중 반가운 말이로군. 지하로 내려가는 거요?”
“어. 가서 가져올 게 있어.”
“좋소. 본인의 검이 필요하다면 언제고 말만 하시오.”
“그래?”
김호가 고현우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럼 오늘 밤.”
* * *
늦은 밤.
고현우와 김호가 던전동 인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에는 이미 신병철이 대기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뺀질거리지만 의뢰 하나는 철저하게 수행한다.
신병철이 인기척을 느끼고 두 사람을 쳐다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고현우가 인사를 건넸다.
“신 형.”
“아이고 고객님들, 어떻게 저녁 식사는 잘들 하셨는지……. 자! 이것들 받으시고.”
신병철이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무개 뱃지]와 2학년 넥타이핀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인식방해 마법을 통해 혹시나 마주칠 선배들의 의심을 피해 가기 위함이다.
김호가 교복에 뱃지를 달며 물었다.
“이번에도 선배들 세 번씩 보고 그러는 거 아니지.”
“아유, 당연히 아니지요. 선배가 뭐야, 쥐새끼 한 마리 안 마주치게 스무스하게! 모시겠습니다.”
“저번에도 비슷한 소리 하지 않았니?”
“아잇, 이번에는 진짜다. 한번 믿어 보셔.”
신병철이 호언장담하더니, 앞장서면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일행은 신병철이 안내하는 대로 원형 계단을 밟고, 이따금씩 다른 통로로 방향을 틀며 지하 깊은 곳으로 향했다.
듬성듬성 숱이 빠진 깍두기 머리를 보며 걷다가 고현우가 말문을 열었다.
“확실히 신 형의 길잡이 역할이 상당히 능숙해진 듯하오. 이전과는 여러모로 다르구려.”
신병철이 처음 그들과 지하층에 내려왔을 때는 중간중간 멈추거나 오른쪽 통로를 선택할지, 아니면 왼쪽 계단을 타고 내려갈지 고민하는 등, 다소 헤매는 느낌을 받았었다.
반면 지금은 주저함이 거의 없고 내려가는 속도도 가볍게 달리는 정도로 빠른 편이다.
고현우의 칭찬에 신병철이 우쭐거렸다.
“요즘 내가 지하에 한두 팀 데려다 주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이쯤 되면 나도 경력자 아니겠냐?”
“하하하,”
다만 여전히 유감스러운 점 하나는 이번에도 뚜벅이 신세라는 것이다.
당규영처럼 기막힌 은신 스킬을 가졌거나 채다빈처럼 마법공학 장비들을 무력화시킬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승강기를 이용할 수가 없었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1학년 길잡이를 고용하면 퀄리티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김호도 고현우도 던전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이런 사소한 불편함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스타일이었기에, 그저 열심히 뚜벅거리며 내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D층.
목적지에 도달하자, 불길하게 입을 벌린 포탈이 그들을 반겼다.
[No.353] [깃털뱀 사원]서포터가 다 해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