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e supporters are hammocked RAW novel - Chapter 202
202화 김호 베개
서예인은 입장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로 경기장에서 걸어 나왔다.
그것만 봐도 결과가 대강 짐작되었지만, 나는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몇 등?”
“1등.”
“아주 훌륭합니다.”
반면 홍연화는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모습이 아주 판이하게 달랐다.
들어갈 때는 나름 자신감이 넘쳐 보였는데, 지금은 우울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 나온다.
둘이 입장했다 나온 시기가 같은 걸 보니,
“너네 싸웠니?”
“해치웠어.”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홍연화의 귀에도 이 말이 들린 모양이었다.
슬픈 눈빛이 이쪽을 향한다.
“…….”
서예인이 홍연화를 빤히 마주 보나 싶더니, 천천히 손가락을 펴서 V자를 그려 보였다.
나는 서예인의 손가락을 도로 고이 접었다.
“그러면 못 써.”
“안 돼?”
“응, 매너가 아니지.”
온갖 비매너 행위에 도가 튼 나조차도 경기 직후에는 말을 아끼고, 가급적이면 상대를 격려해 주려 하는 편이다.
얻는 것 없이 화만 돋구는 것은 내 미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경기 내용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싸웠길래 애가 또 저렇게 쭈굴해졌지?
“리플레이 좀 보자.”
“응.”
서예인이 리플레이를 건네자 나는 그것을 빠르게 돌려 보기 시작했다.
내 평가가 궁금한지 서예인이 같이 수정구를 들여다보고, 홍연화 역시 발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멈춰서 이쪽을 흘끔거린다.
나는 계속 수정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디씩 했다.
“나쁘지 않은데.”
“역류막. 좋은 걸로 잘 배웠네.”
“강희찬 쓰러뜨린 다음 판단도 좋았고.”
그럴 때마다 홍연화의 표정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밝아졌다.
곧 리플레이가 끝나자 나는 홍연화에게 말했다.
“고생했어. 졌다고 너무 우울해하지 마라.”
“……고마워.”
홍연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등을 돌려 아레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디선가 작게 훌쩍, 하고 코를 훔치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얼마간 홍연화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으니 서예인이 내 옷소매를 슬슬 잡아당겼다.
“나도 칭찬.”
“그래, 아주 훌륭하게 해치웠더구나.”
홍연화의 운영은 나쁘지 않았다.
며칠만에 역류막을 실전에 사용할 정도로 연마했다는 점도 높게 평가할 만하고.
다만 불행한 점은 상대로 총사를 만났다는 점, 그리고 그 총사가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서예인이라는 점이었다.
다른 원거리 계열이었다면 홍연화가 마지막 순간, 화염 마법들을 집중했을 때 그대로 당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반면 서예인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세를 침착하게 관찰하다가, 최적의 한 순간을 잡아내 불릿 타임을 시전했다.
그리고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없어 보이는 공세의 아주 작은 틈을 발견해 빠져나왔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킬 운용이었다.
내 옷소매를 슬슬 잡아당기며 더욱 가까이 붙는 서예인.
회색빛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1등 두 번 했어.”
“그렇네.”
“소원권.”
뿅망치 게임에서 10승을 하면 소원권을 주기로 약속한 상태.
그러나 도중에 불릿 타임의 랭크가 상승했기에 8승으로 그쳤고, 남은 2승은 대인전에서 1등을 하는 걸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것을 서예인은 두 경기에서 가볍게 1등씩을 달성해 버린 것이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이렇게까지 잘 했는데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베개?”
“베개……!”
* * *
특수훈련실로 돌아온 나와 서예인.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소원이 김호 베개 베고 자는 거,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난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진짜 잠이 잘 오냐.”
– 끄덕끄덕,
“그래, 정 그게 소원이라면.”
베고 자든 안고 자든 마음대로 하렴.
오늘 나는 김호 베개가 되련다.
나는 멀거니 선 채, 이다음은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서예인을 쳐다보았다.
“…….”
특수훈련실 이곳저곳을 휘휘 둘러보는 서예인.
시선이 구석진 곳에 자주 머무르는 걸로 보아, 최적의 낮잠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내 서예인이 나를 한 쪽으로 약하게 잡아끌었고, 나는 순순히 거기에 이끌려서 따라갔다.
예상대로 우리가 걸음을 멈춘 곳은 벽면 한구석.
낮잠 장소를 정했으니, 그다음 중요한 것을 정해야 했다.
“그럼 저는 앉을까요, 누울까요, 아니면 엎드릴까요?”
“……!?”
서예인이 눈을 조금 치켜떴다.
그런 다양한 옵션이 존재할 줄은 몰랐나 보다.
세상 진지한 태도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앉으라는 뜻이군.
내가 순순히 벽에 등을 맞대고 앉자, 다음으로 서예인은 인벤토리를 뒤적거리더니 두툼한 담요를 꺼냈다.
“담요까지 가져왔어? 본격적이네.”
“응.”
담요를 온몸에 둘둘 말고 내 바로 옆자리에 앉는 서예인.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불과 5초도 안 돼서 새근새근 잠들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특성 생기는 거 아닌가 몰라.’
[베개]를 습득했다며 알림 메시지가 떠오를 것 같다.물론 내가 알기로 그런 특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렇게 베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나였으나, 앉아서 멍하니 시간만 낭비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서예인과 같이 낮잠을 자기에는 별로 안 졸리기도 했고.
따라서 나는 조금 미뤄 두었던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찾아야지, 까마귀.’
다음 주에 당규영과 어느 던전에 들어갈지 정하려면, 던전 까마귀의 위치와 등장 시각을 파악하고, 다음을 예측해야 한다.
그리고 그걸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리플레이.’
나는 학생 상점을 열람하고 리플레이 항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최근에 공략된 지하층 던전 목록들을 훑다가, 하나를 선택해 100포인트를 지불했다.
손 위에 툭 떨어진 수정구.
그 안에는 학생 여럿의 모습이 비추고 있었다.
2학년 선배들로 이루어진 파티다.
그들은 커다란 범선에 탑승하여 어딘가로 항해하는 중이었다.
간혹 나타나는 해적들, 또는 해양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면서.
나는 거기까지만 보고 리플레이를 휙휙 넘기기 시작했다.
‘다 보기엔 시간이 아깝지.’
보통 지하층 던전은 공략에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까지 걸리기도 한다.
깃털뱀 제단 공략이 순식간에 끝난 반면, 대응표행 공략이 이틀이나 잡아먹은 것처럼 말이다.
이런 공략의 리플레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던전 까마귀를 찾으려면 이 리플레이 저 리플레이를 다 뒤져 봐야 하니,
‘중요한 부분만.’
다행인 점은 녀석들의 출몰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다는 거다.
내가 리플레이를 정지하는 시점에 까마귀가 보이지 않는다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느새 수정구 속의 범선은 바위로 이루어진 섬을 빙 둘러 지나고 있었다.
나는 개중 가장 높은 바위 꼭대기를 유심히 살폈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꽝이군.’
처음 고른 리플레이에서 바로 찾으리라곤 기대도 안 했다.
즉시 100포인트로 다음 리플레이를 구매하고 재생한다.
수정구 속 선배들은 끝없이 펼쳐진 황금빛 밀밭에 서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몰려드는 몬스터 군단이 보인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물론 그들이 치고받든 말든 그건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신 밀밭 한가운데에 세워진 허수아비를 살폈으나,
‘여기도 없고.’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미련없이 다음 리플레이, 또 다음 리플레이로 넘어간다.
그럴 때마다 수정구 속에는 차들이 바쁘게 오가는 도심이 나오기도 하고, 구름이 지척에 보일 정도로 높은 고산지대가 나타나기도 했다.
허나 어디에서도 차원 까마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100포인트씩 소모하던 것이 모이고 모여서 2천 포인트를 넘어섰을 무렵.
‘찾았다.’
나는 눈을 빛내며 수정구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한창 경기가 진행 중인 투기장.
던전 공략에 참여한 학생이 상대방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관중들은 경기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지른다.
그런 와중에 관중석 가장 높은 곳을 살펴보니, 웬 까마귀 한 마리가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까마귀의 외견은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았다.
일개 조류라고 보기에는 덩치가 크고, 머리에는 높이 솟은 신사 모자를 뒤집어썼다.
거기에 귀족적인 정장 차림, 한 손에는 가방까지.
‘까마귀 재봉사.’
정확히 내가 찾던 차원 까마귀였다.
나는 재봉사가 다음에 출몰할 장소를 분석한 후, 당규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김 호:까마귀 찾았습니다.] [당규영:어디??] [김 호:294번 들어가면 돼요.] [당규영:ㅇㅋ준비해 둠] [당규영:(동그라미 여우 이모티콘)]이걸로 다음주 대비는 모두 끝난 셈이다.
던전 공략을 진행하다가 잠깐 샛길로 빠져 까마귀 재봉사를 만난다.
녀석에게 뭘 부탁하든 공짜는 아닐 테지만, 지불할 보수는 이미 준비해 두었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걸 좋아하거든.’
예를 들면 보석 같은 거.
마력이 담겼으면 더욱 좋다.
마침 나에게는 홍연화에게 받은 큼지막한 루비 하나,
곽지철에게 받은 비교적 작은 에메랄드 하나,
그리고 정수지에게 중간고사 크리스탈을 몇 개 넘기며 교환한 큼지막한 에메랄드가 하나 있다.
이만하면 당장 공임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거다.
여기까지 계산을 마치고 나는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곤히 잠든 서예인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말 잘도 자는구나.’
내가 리플레이들을 잔뜩 확인하는 동안 제법 시간이 흘렀을 텐데, 도무지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모처럼 김호 베개를 손에 넣었으니 최대한 숙면을 취해 두고 싶겠지.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도 없어서, 나는 슬슬 서예인을 깨우기로 했다.
안정미의 연구를 통해 증명된 바, 인간 나무늘보를 깨우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바로 베개를 빼앗는 것.
그리고 지금 베개는 바로 나다.
따라서 나는 샥 하고 서예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편하게 기대던 어깨 베개가 사라지자 서예인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 기울더니, 바닥에 스르르 엎어져 버렸다.
“……?”
그렇게 엎어진 상태에서 눈꺼풀을 아주 조금 들어올리는 서예인.
뒹굴거리면서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거린다.
“어딨어…….”
“여기입니다, 아가씨.”
물론 ‘여기’란 현재 서예인의 위치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서예인이 힘없이 내 쪽으로 손짓했다.
“돌아와…….”
“오늘 낮잠은 여기까지만 자자. 이만 일어납시다.”
아니면 기숙사 가서 마저 자든가.
그러나 서예인은 납득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엎어진 채로 불만을 표출한다.
“약속……. 했으면서…….”
“했지요, 약속. 그런데…….”
서예인이 소원권을 쓰며 요구한 것은 나를 베개로 쓰는 것.
그러나.
‘얼마나’ 쓸지는 정한 적이 없다.
즉, 김호 베개를 하루 쓰는가, 한 시간 쓰는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렸다는 말이다.
“요즘 유료 아이템에는 기간 제한이 있어요.”
“그럴 수가…….”
서예인은 기간제 아이템의 매운맛을 보고 말았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