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the supporters are hammocked RAW novel - Chapter 73
73화 No.104 흑사방 (5)
백사(白蛇).
사분오열되어 수면 밑으로 숨어든 마교의 몇 안 남은 장로.
방주인 흑사조차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로, 흑사방 공략에서는 매우 불확실한 변수로 작용한다.
어떤 뚜렷한 규칙성 없이 흑사방 내부를 정처 없이 배회하다가, ‘정말 운이 없으면’ 마주치게 되는 것.
그리고 지금이 바로 정말 운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현우가 백사의 경지를 가늠해 보려 했으나, 그의 안목으로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B급 던전의 히든 보스답게 실력이 고현우보다 한참은 윗줄인 것이다.
‘승부를 겨룬다면 필패.’
그것도 열 합 이내에 승부가 갈릴 것이다.
무공의 차이가 월등하니 도주 또한 불가능할 터.
그러나 아직 절망하기는 이르다.
‘아직은 활로가 남았다.’
김호는 공략본을 만들 때 이 희박한 확률 역시 계산 내에 두었다.
당연히 백사를 마주치는 상황의 대처법도 존재했다.
다만 그 대처법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문제가 남았고, 그건 앞으로 고현우가 하기에 달렸다.
한편, 백사 역시 새하얀 동공으로 고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고현우의 기도가 읽히는지 나지막이 감탄한다.
“약관도 안 되는 나이에 그 정도 성취라니 대단하구나.”
“전부 스승님과 친우들의 덕입니다.”
“좋은 스승과 친우를 두었다. 허나 아쉬운 일이야.”
백사는 고현우를 제법 좋게 보는 듯했으나, 그럼에도 흑사방의 일원으로서 할 일을 다하려는 모양이다.
갈무리된 기세가 조금씩 풀려나며 장내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10년, 아니, 5년만 더 주어졌어도 뛰어난 검수로서 이름을 날렸을 터인데, 오늘 노부를 만나게 되었으니……. 네 운이 없음을 탓하거라.”
백사의 소매가 펄럭이려던 찰나.
고현우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선배님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선배님께서는 현양진인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하다마다.”
백사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과거 정마대전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이유.
이는 당시 그를 제압했던 도가의 고수, 현양진인이 마지막 순간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백사와 약속한 것이, 언젠가 전도유망한 후기지수를 죽일 일이 생기거든 그 역시 한 번 자비를 베풀라는 것.
고현우가 하는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목숨 빚 갚아라, 우리 보내 줘라’가 되겠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전대 고수들 간의 약속을 들먹이자니 마음이 한켠이 불편한 고현우였으나, 이 또한 공략의 일부려니 여기고 넘어가기로 했다.
백사가 답했다.
“노부가 분명 그런 약속을 하기는 했다. 허나 너에게 자비를 베풀 가치가 있는지는 확인해 보기 전까지 모르는 일 아니겠느냐.”
‘전도유망한 후기지수’를 살려 보내기로 했으니,
전도유망하지 않으면 그냥 죽이겠다는 뜻.
신병철이 속으로 항의했다.
‘아니, 방금은 대단한 성취라면서요? 노친네가 말을 막 바꾸시네?’
그러나 왠지 지금 입을 열었다간 처맞을 것 같아서 잠자코 찌그러져 있었다.
고현우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실력을 보는데 복잡하게 돌아갈 필요 있겠느냐? 노부의 손에서 삼 초식을 버틴다면 보내 주도록 하마.”
‘……여기까지는 됐다.’
고현우가 늘어뜨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공략대로 어떻게든 삼 초식 버티기로 끌고 가는 데는 성공했다.
백사와의 정면 승부는 절대 상대가 안 되지만, 삼 초식이라면 가능성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이 상황에서 활로를 여는 유일한 방법이다.
“선배님의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좋다. 너는 준비하도록 해라.”
물론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보인다 뿐이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겨우 삼 초식에 불과할지언정 자신보다 몇 단계는 더 뛰어난 고수의 손에서 버텨야 할 테니까.
백사가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언뜻 보기에는 일반적인 장검과 비슷했다.
다만 자루에서부터 검병, 검날까지 모든 것이 하얗고, 끄트머리가 뱀의 혓바닥처럼 둘로 나뉘어 있었다.
백사의 독문 무기, 사설검(蛇舌劍).
백사가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말했다.
“선수를 양보하겠다.”
“그럼 한 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고현우가 공력을 잔뜩 끌어올렸다.
다음 순간 불어 가는 거센 바람에 올라타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
강하게 일점을 찔러 상대방의 방어 초식을 유도한다.
그걸로 삼 초식 중 하나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급류(急流)]“…….”
백사의 새하얀 동공이 찔러 들어오는 고현우를 눈에 담았다.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친다.
“……바람뿐만 아니라 기의 흐름까지 제어하는군. 보통 절기가 아니로다. 허나.”
백사의 미간이 고현우의 주술검에 꿰뚫리려는 찰나.
백사가 검세를 취하더니 이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초식의 형태가 매우 낯익었기에 고현우는 보는 즉시 그것을 알아보았다.
‘독사수동?’
독사수동(毒蛇守洞).
독사가 똬리를 틀고 동굴을 지키는 모양새를 흉내 낸 초식이다.
삼재검법 같은 기본공 다음으로 잘 알려진, 매우 단순한 초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백사가 펼치는 독사수동은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식이 펼쳐지는 순간, 그의 손에 들린 사설검이 뱀 혓바닥처럼 양옆으로 쩍 갈라졌다.
사설검은 칼날이 유연하게 휘는 연검(軟劍)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갈래로 휜 칼날들은 각기 다른 두 개의 검로를 그려 냈다.
주술검에 한껏 집중한 검기가 독사수동 하나와 충돌하더니 서로 상쇄되어 사라졌다.
뒤이어 두 번째 독사수동이 고현우를 덮쳐 왔다.
전신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지고, 고현우의 신형이 뒤로 날아가서 벽을 부수고 처박혔다.
– 콰지직!
“크으으으…….”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거대한 뱀 꼬리에 후려 맞은 느낌.
백사가 고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맹한 맛은 있으나 뒷일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 초식이구나. 동귀어진에나 쓸 법하다.”
“…….”
“다음 준비하거라.”
두 번째 초식.
선수를 양보했으니 지금부터는 백사가 공격할 것이다.
고현우가 안 움직이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즉시 백사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가까워져 온다.
아래로 늘어뜨린 사설검에서 어떤 초식이 펼쳐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끄트머리가 부르르 떨리며 갈라지는 모습을 보면 그 순간이 임박했음은 분명하다.
어차피 보고 대처한다고 대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최선의 한 수로 맞설 뿐.’
[청류(淸流)]고현우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이 점차 칼날에 감겨들었다.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백사를 향해 겨누어졌다.
백사의 사설검도 구불거리며 둘로 갈라졌다.
백사는 그것을 그대로 앞으로 뻗으며 찔러 들어왔다.
이번에도 매우 눈에 익은 초식이었다.
[독사출동(毒蛇出洞)]투로가 훤히 보이는 찌르기 둘.
그러나 고현우의 눈에는 굵은 뱀 두 마리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짓쳐 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 기세가 무척이나 압도적이라 투로가 보인다 한들 쳐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해내야만 한다.’
고현우의 눈이 굳은 결의를 머금었다.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사설검의 아주 미세한 구부러짐 하나까지 읽으려 했다.
그렇게 마주 청류를 휘두르기 직전.
문득 그의 머릿속에 아까 보았던 달마상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달마상을 이루던 무수한 선들.
그중 하나가 눈앞 허공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고현우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선을 따라 청류를 그었다.
– 번쩍!
순간 스쳐 지나간 깨달음 덕일까.
방금 그의 청류는 여태까지 그가 펼쳤던 어떤 것보다도 완벽했다.
그럼에도 백사의 독사출동을 방어하기에는 완벽함이 부족했다.
백사는 한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반면, 고현우의 신형은 한참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쿨럭.”
내부가 진탕되어 코와 입에서 죽은 피가 터져 나왔다.
찢어진 손아귀에서 흐르는 피가 주술검을 타고 흐른다.
‘이렇게까지 해도 역부족이란 말인가…….’
자신의 역량을 뛰어넘는 검초를 펼쳤는데도 상대를 단 한 발짝도 물러나게 하지 못하다니.
아직 둘 사이에 그만큼 아득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에만 집중한 탓에 고현우는 깨닫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백사를 한자리에 멈춰 세운 것만 해도 엄청난 성과였다.
백사 역시 그렇게 생각한 듯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 나이에 노부의 독사출동을 이리도 수월하게 막아 내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너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백사가 사설검을 칼끝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늘어뜨렸다.
그 상태에서 공력을 더욱 끌어올리자,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압박감이 장내를 짓눌렀다.
“노부도 실력을 더 보이는 게 옳겠지. 마지막이다. 받아 보거라.”
유형화된 기운이 압축되며 점차 백사의 외견과 같은 백색을 띠었다.
백색 투기를 두른 백사의 모습은 한 자루 날카로운 명검 같기도 했고, 똬리를 튼 거대한 구렁이 같기도 했다.
눈앞의 구렁이가 고현우를 노려보며, 곧 튀어 나가려는 것처럼 한껏 몸을 웅크렸다.
고현우는 직감했다.
백사가 곧 절기를 펼칠 것이며, 그 절기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막아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그러나 아직 쓰러지기에는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사부가 남긴 뜻이 있었고, 해결해야 할 사문의 숙원이 있었으며,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친우들이 있었다.
아직은 그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
이내 고현우는 어떤 결심을 한 듯했다.
주술검을 중단으로 세우고 기세를 끌어올린다.
어디선가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며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
백사의 눈이 바람과 하나 된 기의 흐름을 읽었다.
그리고 고현우가 지금 펼치려는 것이 매우 수비적인 초식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적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극도로 유(柔)에 치중한 초식.
그러나…….
‘이게 전부인가?’
백사의 눈에는 영 차지 않았다.
차라리 두 번째 격돌 때 사용한 초식이 나아 보였다.
공격적인 측면에서든 수비적인 측면에서든.
‘저게 다일 리가 없다.’
백사 자신이 더 강력한 초식을 꺼내는데, 고현우가 더 약한 초식으로 대응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분명 다른 수단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노부의 알량한 자비심을 기대하는 거라면……. 너는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될 것이다.’
마침내 백사가 초식을 전개했다.
[백리등천(白螭登天)]거대한 백색 이무기가 시야를 가득 메우며 고현우에게 짓쳐 들었다.
그에 비하면 검 한 자루를 내세우고 서 있는 고현우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한없이 미약해 보였다.
– 콰아아아아—!
내세운 주술검이 부르르 떨리며 금이 쩍쩍 가고 고현우의 코와 입가에서 죽은 피가 줄줄 흘렀다.
백사의 예상대로, 고현우의 방어 초식은 백색 이무기를 흘려보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또한 예상대로 백리등천을 흘려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대로 이무기가 눈앞의 먹잇감을 단숨에 집어삼키는 착각이 드는 찰나,
고현우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 파아앗!
모든 것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잠깐의 정적.
“…….”
백사의 표정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것이었다.
고현우는 여전히 주술검을 세운 자세 그대로였다.
그러나 반대쪽 손에는 어느새 길쭉한 것이 들려 있었다.
낡은 천으로 돌돌 말고 쇠사슬로 감아 두었던 것이, 일부가 찢어져 묵빛 광택이 드러났다.
검집째로 든 장검.
그것이 백사의 마지막 절초를 해소해 버린 듯했다.
“쿨럭.”
고현우가 또 한 움큼 죽은 피를 게워 냈다.
조금 전보다 안색이 훨씬 파리해진 것으로 보아 잠깐 저 장검을 쥔 것만으로도 제법 큰 대가를 치른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대단한 명검이로다…….’
백사가 감탄했다.
보통 경지에 오른 고수를 보면 잘 벼려진 한 자루 검 같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이건 그 반대였다.
검 대신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사이를 가로막는 느낌.
도대체 저 장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장검을 소유한 고현우의 정체는?
궁금한 건 많았으나, 승부는 끝났다.
더 물어봤자 구차할 뿐이었다.
백사가 사설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노부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 길을 열어라.”
이미 장내에는 소란을 듣고 흑의인들이 잔뜩 몰려든 상태였는데, 백사의 명령에 썰물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고현우는 바로 발걸음을 떼지 않고, 백사에게 더없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기대하마.”
그리고 신병철과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흑의인들 중 대주급 무사 하나가 백사에게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놈들의 수급을 취해 돌아오겠습니다.”
말장난을 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현양진인과의 약속을 되짚어 보면, ‘백사’가 살려 준다고 했지, ‘흑사방 무사’가 살려 준다고 한 적은 없다.
또한 백사가 살려 준다고 한 것은 고현우지, 그 옆의 신병철과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수하를 보내 해한다 한들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백사는 고개를 저었다.
“가게 두어라. 노부를 졸렬한 필부로 만들 셈이냐?”
이미 넘치도록 자격을 증명한 고현우였다.
백사는 방금 전의 승부를 더럽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정파와 사파, 마교를 나누기 이전에 그 또한 한 사람의 무인인 것이다.
이토록 백사의 의지가 확고함에도, 대주급 무사는 추격조를 보낼 것을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
“비고가 뚫렸습니다. 이대로 보낸다면 방주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겁니다.”
– 서걱!
사설검이 쭉 갈라지더니 대주의 몸을 휘감고 단숨에 세 토막을 내 버렸다.
이제 백사의 음성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노부의 은원보다 그깟 비고의 물건 몇 개가 더 중요하단 말이냐?”
“……!”
“……!”
흑의인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더 이상 없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백사가 고현우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다 죽어 가는 몸으로도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모습.
투지로 불타오르는 눈빛.
저런 자는 자신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저놈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 * *
고현우는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통로를 걸었다.
신병철이 연신 뒤쪽을 살폈으나 흑사방 무사들은 정말로 더 쫓아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노친네가 말장난은 안 하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기는 이르지만, 촌각을 다툴 정도로 급한 상황은 지난 것 같다.
그렇게 판단한 신병철은 인벤토리에서 포션 하나를 꺼냈다.
고급진 유리병 안에 붉은 액체가 찰랑거린다.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가자. 마셔.”
고현우는 신병철이 넘겨주는 포션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맛이 보통 쓴 게 아니었는지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으나, 곧 얼굴에 서서히 혈색이 돌아왔다.
“후우……. 한결 낫구려. 고맙소.”
“한결 나아야지. 안 나으면 이상하지.”
회복을 확신한다는 어조였다.
고현우가 그제야 시선을 내려보니 빈 유리병부터가 보통 고급진 게 아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물의 가치도 결코 낮지 않을 터.
“이건…….”
“하이포션이라는 물건이시다.”
“신 형의 출혈이 컸겠소. 이런 귀한 물건을 내주다니.”
“컸지. 대출혈이지. 근데 별수 있나?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언젠가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상황을 대비해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 둔 하이포션이었다.
신병철 본인은 한 방울도 못 마셔 봤다.
그러나 운이 지지리도 없게도 히든 보스를 조우했고, 고현우가 목숨을 걸고 싸워 준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사지 멀쩡히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무리 손해 득실에 민감한 신병철이라지만, 뒷짐만 지고 모른 척하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고현우가 내상을 잔뜩 입은 채로는 도저히 속도가 안 나고, 만에 하나 추격대가 붙었을 때 답이 없을 테니 선뜻 하이포션을 꺼낸 것이다.
고현우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 형도 중요한 순간에는 배포가 크군. 진정 사나이라 할 수 있소.”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다, 이 말씀이야. 잘 기억해 둬.”
“하하, 이를 말이오?”
다만 하이포션의 가치가 가치이다 보니 미련이 아예 안 남을 수는 없었다.
신병철은 차라리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마침 고현우와 백사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 물었다.
“근데, 다시 찾아뵙는다고?”
“그렇소.”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어차피 다음에 오면 저 양반은 너 기억 못 할걸?”
이 던전에는 이미 검술 동아리의 입찰이 걸려 있다고 한다.
가까운 미래에 그들이 던전을 파괴할 것이고, 시간이 흘러 재생성된 흑사방에서 백사는 고현우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고현우는 굳게 다짐한 듯했다.
“그가 본인을 기억하고 못 하고는 중요치 않소. 중요한 것은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지.”
백사가 과거의 은원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그가 과거의 은원만을 중요시했다면 구태여 ‘전도유망한지 시험해 보겠다’라는 핑계를 대며 손속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실력 차가 그 정도나 난다면 한눈에 기도가 보이고, 손속을 섞더라도 한 수로 충분했을 테니까.
아마도 삼 초식이나 교환하게 된 진짜 이유는, 언젠가 성장한 고현우와 제대로 겨루어 보고 싶다는 무인의 호승심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번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한들, 전후 사정을 설명한다면 기꺼이 승부에 임하리라.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