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in Another World Player RAW novel - Chapter 110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110화
#무대의 마스터
“음…? 내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게 아닌데…….”
“좀 더 음침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상상하셨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런 풍경을 예상하긴 했는데… 이건 정말 의외로군. 그렇지 않습니까?”
레기온이 칼라반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나니머스가 있는 곳은 좀 더 삼엄하고 음습한 분위기 일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처음 보이는 풍경이 농사짓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농부들이 밭일을 하고 있고, 한쪽의 사냥꾼들은 잡아온 짐승들을 그늘진 곳으로 옮기고 있는 광경이 영락없는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광경이긴 하군.”
칼라반도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조차도 당황한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살아가려면 먹을 것들이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어쌔신이라고 해서 늘 암살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뭐 한 때는 그랬지만요… 하지만 여기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니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한니발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실 조금 전부터 칼라반에게 떠오르는 메시지가 있었다.
무공을 익히고 내공이 증진됨에 따라 기감이 발달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메시지였다.
[살기가 감지되었습니다.] [살기가 감지되었습니다.]그들이 이곳으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경고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벌써부터 주목받고 있는 모양이로군.”
칼라반의 말이 끝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의 앞으로 다가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굵은 땀방울을 닦아내며 칼라반과 레기온을 빠르게 훑었다.
그리곤 한니발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보였다.
“돌아오셨습니까.”
“아… 예, 잘 지내셨어요, 페브르 아저씨.”
“사춘기 때의 치기 어린 행동치고는 꽤나 오래 걸렸군요. 다시 돌아온 이유는 마음을 다잡았기 때문입니까?”
“아뇨. 저는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런… 대장이 슬퍼하겠군요. 어쨌든 잘 돌아오셨습니다. 그나저나, 뒤에 있는 외부인들은 누구입니까? 이곳으로 외부인들의 출입은 금지입니다만… 그것은 공자님이 데려온 손님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드럽게 생긴 얼굴과 다르게 페브르라 불린 사내가 기세를 내뿜기 시작하자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농사를 짓던 이들도, 한쪽에 앉아 있던 사냥꾼들도 눈빛부터 달리하며 칼라반과 레기온을 노려보았다.
외부인인 칼라반과 레기온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곳이 어나니머스가 맞군.”
그들은 이제야 이곳이 어나니머스 한복판임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레기온마저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저기 평범하게 보이는 농부조차 눈빛이 달라지니 드러내는 존재감부터 달라졌다.
레기온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어쌔신들이 살아가는 마을.
한시라도 방심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은 장소였다.
그때 칼라반이 앞으로 나섰다.
“그대들의 대장과 얘기를 나누러 왔다.”
“우리들의 대장과? 글쎄… 우리 대장은 당신과 할 말이 없어 보이는데. 이만 돌아가십시오. 공자님이 데려온 손님이라 특별히 목숨을 끊지는 않을 테니 이곳에서 본 것 들은 것 어느 것 하나 밖에서 얘기하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페브르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별것 아닌 제스처였지만 그가 하니 살벌한 경고로 다가왔다.
“페브르 아저씨. 죄송하지만 이분은 제가 모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아버지와 한 번쯤은 얘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안 됩니다. 그리고 잊으셨습니까? 우리 어나니머스는 우리가 인정한 주인 외엔 그 누구도 모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철없는 방황은 그만두시고 다시 돌아오십시오.”
“아저씨야 말로 잊으셨어요? 저는 이곳이 바뀌지 않는 이상 결코 여기에 머물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이곳을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때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씀도 드렸을 텐데요?”
“호오… 그럼 우리들에게 변화를 가져다 줄 사람이 지금 저 자라고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제가 보기엔 저쪽 보다는 차라리 저쪽이 더 가능성 있어 보입니다만.”
페브르는 칼라반이 아닌 레기온 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레기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못 짚으셨습니다. 당신들과 대화를 나누러 온 사람은 제가 아닌 여기 계시는 제 주군입니다.”
“…당신 같은 자가 저 사내를 모신다고?”
“저 같은 놈이 이분을 군주로 모실 수 있어 얼마나 영광인지 모르겠군요.”
페브르의 말에 레기온이 거침없이 받아쳤다.
그러나 페브르는 아무런 감정 동요도 보이질 않았다. 그는 레기온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어쨌거나 당신들은 이제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여?”
그때 그들의 뒤편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색빛이 섞인 검은 머리칼의 중년인이 뒷짐을 진채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옷에 들고 있는 곡괭이는 영락없는 촌부의 모습이었다.
말투마저 구수한 그가 허허실실 웃으며 한니발을 바라보았다.
“아니, 너는 집나간 내 아들내미 아니냐아!?”
“아버지……!”
“껄껄! 언제 돌아온겨? 이제 막 돌아온겨?”
한니발이 사내를 아버지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반응에 칼라반과 레기온이 눈빛을 달리했다.
저렇듯 허술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지금 그들의 앞에 있는 자는 현재의 어나니머스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존재라는 얘기였다.
“이잉? 이 사람들은 누구여? 우리 아들내미 손님들인가?”
“아버지. 아버지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할 말은 네가 아니라 저짝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여?”
중년인의 시선이 칼라반에게로 향했다.
단지 그와 시선을 마주한 것뿐이건만 순간적으로 칼라반은 전신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허술해 보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은근한 기도는 날카롭게 잘 벼려진 칼날과 같았다.
중년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허허롭게 웃으며 모자를 치켜 올렸다.
“그럼 이짝으로 모셔야제. 다들 뭐 허나? 아주 오랜만에 손님 맞을 준비나햐.”
“아니, 대장! 지금 손님을 맞겠다는 건가!?”
“불만 있는 겨? 그러면 지금 얘기 혀.”
사내가 페브르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페브르는 인상을 굳힐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상 쓸 것 없어. 저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맞이하는 손님이니까. 어나니머스의 리더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여. 그래도 일단 저자들 덕분에 내 아들내미가 돌아왔으니까 감사 인사는 혀야제.”
“쯧… 대장도 참… 저들이 누군 줄 알고…….”
“아무렴. 우리 아들이 고집은 쎄도 아무나 이리로 데려올 만큼 아둔한 놈은 아니제. 그렇지 않어?”
“저어… 죄송합니다, 아버지…….”
“죄송할 것 없어. 미안해 할 것도 없고. 너처럼 젊은 나이에는 그런 혈기도 있어야 하는 것이여. 그러니 되었다.”
중년인이 돌아서자 이곳으로 모여들었던 어쌔신들도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감시의 시선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어쌔신들은 주위에 맴돌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칼라반의 기감에 잡히는 이들만 해도 수십은 되니 시스템 오로라의 안내 메시지도 계속해서 떠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칼라반은 다른 것보다 중년인의 걸음걸이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는 마치 보법이나 경공을 익힌 사람처럼 일정하면서도 가벼운 보폭을 유지했다.
그런데 이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마치 공중에 떠서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가까이 있어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걸음이 자꾸만 칼라반의 시선을 훔쳤다.
중년인이 안내한 곳은 이곳 안쪽으로 자리한 성의 내부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여기저기 먼지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 비치된 화려한 장식물들과 화려한 건축 구조들은 과거 어나니머스의 영광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 좋은 곳으로 데려오려고 생각하다보니 이곳을 택하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해서 그러니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구만.”
중년인은 자리를 권하며 자신은 위쪽에 있는 돌부리에 걸터앉았다.
중앙에 마련된 상석은 아무도 앉지 않고 공석으로 남겨두었다.
“우선 당신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겠구만. 덕분에 우리 아들내미가 돌아왔으니. 참으로 고맙소.”
“아닙니다.”
“당신들이 부탁하지 않았으면 아마 못난 아들놈은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도 안했겠제. 그렇지 않어?”
중년인이 한니발을 바라보며 웃었다.
한니발은 괜히 헛기침을 해대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자아… 아비로서의 감사 인사는 이만하면 된 것 같고… 무슨 일로 이곳까지 겁도 없이 찾아온 것이여?”
후우웅―!!
웃고 있었지만 중년인에게서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레기온은 그가 흘려보내는 기운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어나니머스가 괜히 유명해진 것이 아니었군…….’
다른 자들도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풍겼지만 눈앞에 있는 중년인은 차원이 달랐다.
아마 곁에 있는 페브르라는 사내보다 몇 수 위인 듯 보였다.
그러나 칼라반은 그의 기세를 마주하고도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잘 알고 왔는가?”
“물론이다.”
“그렇구만. 그러면 이곳으로 발을 들인 이유가 있겠제?”
슈슉!
유령처럼 사라진 중년인이 순식간에 칼라반의 앞에 걸터앉았다.
그는 칼라반과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했다.
“우리 아들내미를 이곳까지 데려와줬으니 다른 누군가를 암살하려는 거라면 특별히 들어주도록 하겠다. 그러나… 겁 없이 어나니머스의 가면 뒤로 발을 들인 이상 너희들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것이여.”
“아니, 암살은 필요 없다.”
“호오… 암살은 필요 없다!? 그럼 원하는 것이 뭐여?”
“나는 어나니머스 무대의 마스터가 되러 왔다.”
칼라반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자 중년인은 물론 이곳으로 모인 모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중년인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너,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여?”
“물론.”
“그 말을 감당할 자신도 있고?”
“그렇지 않았으면 이곳까지 찾아오지 않았을 거다.”
“호오…….”
지금껏 허허실실 웃고 있던 중년인이 처음으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두 눈은 맹렬히 칼라반을 노려보았다.
칼라반도 이에 물러서지 않고 그를 마주 응시했다.
둘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레기온이 한니발의 귓가에 슬쩍 속삭였다.
“어나니머스 무대의 마스터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어나니머스의 마스터가 되겠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무슨… 네 아버지가 어나니머스의 대장이 아니었나?”
그의 물음에 한니발이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의 아버지는 리더 격인 인물입니다. 다들 아버지를 편의상 대장으로 부르지만, 이것과 어나니머스 무대의 마스터가 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왜?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만…….”
“제 아버지는 어나니머스 어쌔신들의 의견을 듣고 모아서 의사결정을 진행하지만, 어나니머스의 마스터는 다릅니다. 그의 뜻이 곧 어나니머스의 뜻이 되고, 그의 암살행이 곧 어나니머스의 예술이 되는 겁니다. 아직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음…….”
“공민님의 말 한 마디면 그곳이 어디든, 어떤 일을 해야 하건 어나니머스 전체가 움직일 거라는 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