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in Another World Player RAW novel - Chapter 127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127화
#소식
많은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는 들판 위에서 한 여인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그녀는 감자가 들어 있는 소쿠리를 한 손에 들고 뛰어노는 아이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쉬어가면서 하세요.”
“그래요. 아무리 젊다고 해도 그렇게 우직하게 일만 하다간 금방 병나.”
“그나저나 참 특이해… 요새 젊은 아가씨들은 이런 밭일보다 다른 일들을 하고 싶어 하는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근데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지 않아? 똑같이 맨날 흙을 만지는데 어쩜 저렇게 손이 고울까? 우리 몰래 뭐 좋은 거라도 먹거나 바르는 것 아냐!?”
“에이, 아직 젊잖아. 젊음의 힘이라고 저건. 그만 질투해 이 아줌마야.”
여인의 곁에 있던 중년의 여인들이 한마디씩 해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들은 힘든 밭일을 하면서도 군소리 한 번 없는 젊은 여인이 싫지만은 않은 듯했다.
처음 밭일을 하고 싶다 찾아왔을 때만해도 반신반의했으나 의외로 성실하고 근면한 여인의 모습에 모두가 인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 여인을 봤을 땐 어느 귀족가의 여식이라 봐도 무방할 만큼 고혹적인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가 다가가기 어려워하고 껄끄러워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여인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지라 친해지는데 더욱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날을 거듭함에도 변치 않고 묵묵하게 성실히 일을 하는 여인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도 차츰 그녀를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유… 우리 마을에서 어디 마음에 드는 총각 없어요? 내가 바로 소개시켜줄게!”
“그래그래. 굳이 우리 마을이 아니더라도 저기 외곽의 도시 남자라도 소개시켜줄까?”
“여기 있는 놈들은 그저 예쁜 여자밖에 안 찾아서 아가씨 같은 사람이 진짜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직 알아보질 못해.”
“그러게. 야속해라… 아가씨가 예쁘기까지 했으면 어느 남자든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중년의 여인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 젊은 여인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일을 이어갔다. 여인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있음에도 다른 여인들의 수다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집안 얘기까지 나올 무렵 다시금 관심사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로엔씨는 왜 이곳까지 와서 이런 일을 하는 거라고 했지?”
“…….”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제대로 듣질 못했네? 왜 이런 시골까지 와서 살고 있는 거야?”
그녀들의 물음에 지금껏 입을 닫고 있던 여인도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의 붉은 앵두같은 입술로 향해 있었다.
“그 사람이 이런 삶을 살길 원했었어요.”
“그 사람? 그 사람이라면… 설마 좋아하는 남자인 거야?”
중년 여인의 물음에 로엔이라 불린 여인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여인들이 소녀처럼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어쩐지 어쩐지이! 다른 남자들한테는 통 관심이 없다 했더니. 이미 마음에 두는 남자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같이 안 살고?”
“그러게? 로엔 씨는 혼자 살고 있지 않나?”
“죽었어요 그 사람은.”
그녀의 말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로엔이 담담하게 말한 탓도 있지만 더 이상 무어라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라 다들 눈치만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람이 죽기 전, 저를 만났을 때 이런 삶을 살고 싶다 말했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 사람이 원하던 삶을 살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대체 왜 그가 이런 삶을 그렸는지 알고 싶었으니까요.”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럼 그 남자를 대신해서……?”
“아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슬픔이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안 가…….”
“나도 가끔 싸우고 나면 우리 남편이 어디 길가다 코 박고 뒤져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이가 없어지면 당장 의지할 곳도 없고 막막해질 생각에… 새삼 내 곁에 있는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생각하게 되기도 하던데.”
“그래도 힘내! 지금처럼 씩씩하게 살아가야지!”
그녀들은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다시 일을 이어갔다.
순수하면서도 따뜻한 면을 지닌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로엔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때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낯선 사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여인들은 지나가는 행인이라 여기며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지만 로엔의 시선은 이미 그를 향해 있었다.
중년인은 그런 로엔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숙여보였다.
로엔은 하던 일을 멈추고 중년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라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요.”
“무슨 말이에요?”
“설마 아가씨께서 이런 곳에 머무르게 되실 줄이야…….”
“많이… 이상한가요?”
“당연히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들이 봐왔던 모습과 지금 이런 모습은 정반대입니다.”
“궁금했어요.”
“궁금하다니 어떤 것이 말입니까?”
“그 사람이 원하던 삶이 어떤 것인지요.”
“흠… 그래서 모든 것을 두고 이렇게 떠나와 살고 계신 겁니까? 그래, 막상 살아보니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 사람이 왜 모든 것을 버리고 이런 삶을 살고자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해요.”
로엔의 말에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새삼 놀랍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네 아직은… 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해요.”
“많은 분들이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데도요?”
“그런다 해도 제 마음은 변함없어요. 제가 없더라도 아저씨가 있고 또 다른 훌륭한 분들이 많잖아요?”
“후우…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가씨께서 제일 먼저 제국에게 검을 겨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름과 모습까지 바꿔가며 이런 곳에서 살려 하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일평생 목숨을 바쳐 지켜온 제국이에요. 다른 건 몰라도 제국민들을 지키고자 했던 그 사람의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저도 그 사람이 애써 지키고자 했던 것을 굳이 파괴하고 싶지 않아요.”
로엔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중년인은 더 이상 말을 보태는 것을 포기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참 이해할 수 없군요… 그 사람은 제국에 반란을 가한 사람이 아닙니까?”
“정말 그 소문을 믿으시나요?”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국 황실이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그들을 죽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저는 그들이 만들어낸 소문은 믿지 않지만… 만약 정말로 그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하더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게다가 그 분은 이미 아가씨가 아닌 다른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면서요!? 심지어 그 분은 저희들의 적이기도 했습니다! 대체 그런 분을 왜 이렇게까지!!”
“사람 마음이 마음먹은 대로 다 되던가요? 벨리아드.”
“후우…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분이 죽음을 맞이하신 지도 벌써 꽤나 시간이 흘렀건만…….”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라… 맞아요. 그렇게 되긴 하더군요. 그런데 그것 아시나요? 시간이 흐르며 생겨난 아픔의 빈자리를 결국 무뎌진 슬픔이 대신하게 돼요. 그 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그 사람을 위해 검을 들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이런 후회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으니까…….”
그녀의 답에 벨리아드는 마음을 굳힌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속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펼쳐들었다.
“좋습니다. 얼마나 확고한 마음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받아온 마지막 명령을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부로 아가씨의 모든 권한을 박탈한다는 내용입니다.”
벨리아드는 로엔에게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천천히 읽어 내리던 로엔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벨리아드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들었다.
슥.
날카로운 검날로 엄지손가락을 베어내자 붉은 핏방울이 이슬처럼 맺혔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종이에 가져가 꾹 눌렀다.
“확인했어요.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권한과 지위를… 박탈합니다…….”
말을 하는 벨리아드의 얼굴은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반면 로엔은 괜찮다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눈빛엔 아쉬움도, 씁쓸함도 묻어 있지 않았다.
이를 본 벨리아드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눈치채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무엇을요?”
“이것은 다른 의미로… 아가씨께 자유를 드리는 것이란 걸 말입니다.”
“그렇군요.”
“이제 아가씨는 저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혼자의 몸이 되었다는 소리죠. 하지만 반대로… 이제는 아가씨가 검을 들어도 저희들의 뜻과는 무관하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즉, 아가씨께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셔도 저희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런 벨리아드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사실 로엔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다.
“벨리아드.”
“예 말씀하십시오.”
“미안해요.”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버지께도 철없게 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어요.”
“하하하! 아닙니다. 아가씨께서는 오히려 너무 일찍 철이 든 편이지요. 주군께선 그 어린 나이에 아가씨를 전쟁터에 내보냈다고 속으론 얼마나 괴로워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철없게 구셔도 됩니다. 그 누구도 나라를 위해 싸워온 아가씨를 비난하지 못할 테니까요. 주군께서는 좀 슬퍼하시겠지만… 그래도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실 때 돌아오십시오. 저희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특히나 누구보다 아가씨를 따르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알겠어요. 고마워요 벨리아드.”
“후후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럴 때 아가씨 곁에 머물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지요.”
“저와 다르게 벨리아드 아저씨는 모두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니 이곳에 머물 필요 없어요.”
“매정하시긴… 아가씨 핑계라도 대면서 이곳으로 와보려 했습니다만… 아, 그나저나 아가씨께서 계속 이곳에 머문다고 하니 그 엄청난 인간들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벌써부터 심란해지는군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눈빛만으로도 이미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주고받은 듯했다.
“아, 조금이나마 아가씨께 선물이 될 수 있는 소식일지 몰라 준비해보았습니다만… 들어보시겠습니까?”
“무슨 소식인데요?”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그 분이 살아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이라면…….”
“짐작하시는 분 말입니다.”
“그럴 리가요… 그러기엔 그 사람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이가 너무도 많은 걸요.”
“후후 그 분이 워낙 신비한 인물인 것은 아가씨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일말의 희망도 없는 얘기는 아닐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어둠의 정령을 봤다는 이가 있습니다.”
“네……?”
“다만 소문의 근거가 어나니머스 쪽이라 아직 조심하고 있긴 합니다만… 아가씨께는 조금이라도 희망이 될 수 있는 얘기가 아닐는지… 뿐만 아니라 이 얘기를 알고 있는 것도 저와 아가씨 둘뿐입니다.”
“…….”
“먼저 찾아 나서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만약… 정말 만약 그가 정말 살아 있다 하더라도 기다릴 생각이에요.”
“어째섭니까?”
“제가 먼저 나서는 것과 그 사람이 저를 필요로 해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벨리아드는 여인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렇기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이만 살며시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전했다.
“저는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많이 바쁠 텐데 어렵게 시간 내주어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마워요 벨리아드. 그리고 혹시나 제가 필요해질 일이 있거든 그때는 직접 오지 말고 다른 사람을 보내셔도 되요.”
“후후 싫습니다. 이렇게라도 아가씨 얼굴을 보러 오는 것이 제 삶의 낙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저는 이만.”
돌아선 벨리아드는 복잡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로엔은 그런 벨리아드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이… 칼라반이 정말 살아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