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in Another World Player RAW novel - Chapter 169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169화
#심판관의 진면목
“하이데의 움직임이 잠잠해졌습니다. 주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는 것인가?”
“예.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 같았는데 냉정을 되찾은 모양입니다.”
“의외로군. 사방을 옥죄면 스스로 뛰쳐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하르스마이어의 입김이 닿은 모양입니다.”
“흠, 그런가. 알겠다.”
어나니머스로부터 하이데 쪽의 동향을 전해들은 칼라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곁에는 이클립스의 대장들과 운량, 레기온, 요쿠스도 함께 하고 있었다.
최근에 합류한 벨제인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칼라반이 건네준 심연의 안대를 한 채 앉아 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듣자하니 이번에 카르마제가 신성 교단 라파엘을 상대로 승전보를 울렸다던데.”
“그 소식은 나도 들었다.”
“당장 움직일 건가요?”
“당분간 하르스마이어 쪽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우리도 카르마제를 먼저 노린다.”
“흐음… 이제야 제국의 기둥을…….”
“카르마제는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물이다. 거기다 대기사장에 올랐을 정도로 일신의 무력 또한 상당해.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하지만 여자에는 약한 인물이기도 하죠. 특히나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꽂혀 있을 때는 더욱더.”
벨제인의 말에 칼라반이 순순히 동의했다.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가 직접 움직이겠어요.”
“생각해둔 계획이 있나?”
“그 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배신을 당해봐야 분이 풀리겠어요.”
“흠… 히리엘 공주를 만나보려는 건가?”
“네. 일단은 만나보고 결정하려 합니다.”
“알겠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칼라반님. 당신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우선은 카르마제의 손발부터 자를 생각이다.”
“손발부터요?”
“그래.”
“그거 기대되네요. 손발이 다 잘려나가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신까지 당한 카르마제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벨제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레기온은 그런 벨제인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혹의 마녀가 살아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
“무섭다. 저 여자.”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아요, 요쿠스. 난 예전부터 솔 기사단의 만인대장 중 당신이랑 이아퀸드가 제일 두려웠으니까.”
“거짓말. 거짓말이다.”
“제정신인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지만요.”
벨제인의 알 수 없는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레기온은 벨제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서서히 움직여보도록 할까.”
칼라반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때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주군. 헤이나님이 찾아왔습니다.”
“헤이나가?”
“칼라반!”
멀리서부터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벨제인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헤이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칼라반을 노려보았다.
“뭐냐.”
“너무한 것 아냐?”
“뭐가 말이냐.”
“어떻게 나한테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사전에 알려주는 것도 없이… 혼자 블레이드에 올라!?”
“아. 그것 때문인가.”
“‘아. 그것 때문인가?’ 이씨… 내 남자의 일을 어째서 내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해!?”
“풉.”
“커헙!”
헤이나의 말에 몇몇 이들이 헛기침을 해댔다.
벨제인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사이에 다른 사람이 생기신 건가요?”
“우리 대장. 인기인. 인기남. 기적이다.”
요쿠스는 어느새 헤이나의 곁에 다가와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동그란 눈으로 자신의 이곳저곳을 바라보는 요쿠스의 모습에 헤이나가 인상을 구겼다.
“못 보던 사이에 사람도 많이 늘었네?”
“그렇게 되었다.”
“어우… 정말…….”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온 거지?”
“그야 나도 너와 함께하려고! 그 말을 전하러 왔어.”
“응?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아직 모르는 거야? 라그나로크엔 이미 너에 관한 소문들이 쫙 퍼졌는데.”
“소문이라. 이번엔 어떤 내용이지?”
“네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
“전쟁을?”
“그래. 그래서 체르피히님도 무기상들과 긴밀히 거래를 하고 있다 들었는데?”
“그런가. 체르피히 쪽이었나 보군.”
소문의 근원지는 굳이 알아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체르피히가 관련된 일이라면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서 어디랑 전쟁을 하려는 건데?”
“카르마제다.”
“카… 카르마제!? 설마 카르마제 왕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
“와… 처음부터 너무 스케일 크게 잡는 것 아냐?”
헤이나가 놀라워하는 때 벨제인도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헤이나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아. 소개가 늦었군. 라그나로크에서 알게 된 동료다.”
“뭐어? 그냥 동료?”
“후후 그렇군요. 그런데 여기 있는 이 아가씨께선 칼라반님을 마음에 두고 계신 것 같은데요?”
“그, 그야 그런데… 당신은 누구예요? 설마…….”
“걱정 마세요. 저는 칼라반님과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헤이나가 벨제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안대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매력 있는 얼굴상이었다.
그녀가 자연스레 경계심을 품으려는 때 벨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여기 있는 이 분이랑 그런 관계로 엮이면 피곤해지실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마어마하거든요. 이 분을 마음에 둔 여인들이.”
“예에? 그 말은 저 말고도 칼라반을 좋아하는 여자가…….”
“더 있어요. 특히 한 명은… 음…….”
벨제인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더 할 필요 없는 말이었다.
“아무튼 사람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의하는 것이 좋아요.”
“상관없어요. 제가 이겨내면 되니까.”
“후후 좋은 패기예요. 그런 마음은 응원할게요.”
“오늘 처음 보는 언니인데 굉장히 마음에 드는 분이네요.”
“어머? 감사해라.”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는 말이 어색하게 서로 쿵짝이 잘 맞게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이런 점이 벨제인의 능력이기도 했다.
카르마제는 결국 이런 벨제인의 능력을 철저히 이용했던 것이다.
“카르마제…….”
그의 얼굴을 떠올린 칼라반이 이를 꽉 깨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내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후 그들이 먼저 향한 곳은 카르마제가 다스리는 이나쿠스 왕국이었다.
이나쿠스 왕국은 제국 서남부에 위치했으며 라그나로크와도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접해 있었다.
칼라반은 이나쿠스 왕국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근처 도시들을 돌아다녔다.
“이제 슬슬 시작할까 합니다.”
“도와줄까?”
“아니 괜찮습니다. 이 정도 일은 저 혼자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알겠다. 맡기마.”
“그럼.”
도시를 돌아다니는 도중 레기온이 자리를 비웠다.
그동안 어나니머스는 시도 때도 없이 레기온에게 많은 정보들을 가져다주었다.
모두 그들이 있는 도시 귀족들에 관한 정보들이었다.
그들은 특히나 카르마제와 연줄이 닿아있는 귀족들 위주로 파고들었다.
“이건 뭐,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되겠군. 대놓고 드러내는 정도라니…….”
이것만 해도 이나쿠스 왕국의 귀족들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제국 다른 지역에선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들을 이나쿠스 왕국의 귀족들은 대놓고 대범하게 저지르고 있었다.
하기야 사실상 카르마제와 그의 측근들이 이러한 일들을 장려하듯 묵인하고 있으니 누구 하나 나무랄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일을 해보겠군.”
레기온은 품속에 넣어두었던 심판관의 가면을 꺼냈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도시에 심판관이 나타날 거란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딩푸르 성의 성주 토퍼 백작은 그 시각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뭐라? 심판관이 나타나? 이것들이 어디 되도 않는 수작을…….”
“그게… 계속해서 소문이 번지고 있는 것을 보니 진짜인 것 같습니다.”
“개소리 말라 그래! 여기가 어딘데 감히 심판관이 나타나? 아마 다른 성의 귀족들이 헛소문을 퍼트린 걸 거다. 우리가 움츠려 있도록 말이야.”
“아니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심판관은 제국 황실의 직속이라… 이곳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다 옛날 말이다! 심판관들도 이 빠진 맹수들일 뿐이야. 그런 놈들이 뭐가 무섭다고…….”
“호오, 그거 재밌는 말이로군.”
그들의 앞으로 누군가 걸어왔다.
철가면을 쓴 그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 입을 열었다.
“시… 심판관이다. 진짜 심판관이…….”
“아……!”
“심판관이 나타났다!!”
토퍼 백작은 놀란 것도 잠시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반면 그의 수하들은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가만히들 있지 못하겠나!”
“그대는 내가 두렵지 않나보군?”
“네가 진짜 심판관이라는 증거가 있나?”
“이 심판관의 가면은 아무에게나 수여되지 않는다. 오로지 제국 황실의 인정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지.”
“그래서? 그것이 가짜일 수도 있질 않나?”
“안타깝지만 그런 일은 없을 거다. 황실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곧 그대가 직접 확인하게 될 테니까.”
레기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가슴엔 하나같이 모래시계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토퍼 백작을 비롯한 이곳의 다른 이들까지 포위해버렸다.
“아… 심판관의 황실병들…….”
“이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곧 황실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과 같다. 싸워볼 생각인가?”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토퍼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설마 정말로 제국의 심판관이 이곳에 나타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 그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스륵.
토퍼 백작은 몰래 자신의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그곳엔 작은 단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레기온의 행동이 더 빨랐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어느새 레기온의 검이 토퍼 백작의 목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토퍼 백작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못했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입술만 파르르 떨고 있을 뿐이었다.
“토퍼 백작. 네놈에 대한 죄목은 찬찬히 훑어보기로 하지.”
“시, 심판관님… 제… 제발 한 번만 봐주…….”
“그딴 것은 없다. 죄를 지었으면 달게 벌을 받아라.”
“으… 으으.”
레기온은 토퍼 백작의 죄목들을 상세히 읊어주었다.
모두 어나니머스와 체르피히 쪽 사람들이 알려준 정보들이었다.
그가 하나씩 말할 때마다 토퍼 백작의 얼굴은 더욱더 창백해졌다.
“이 정도면 재산 몰수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군.”
모든 죄목을 말한 레기온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토퍼 백작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다고 무사할 것 같으냐! 이곳은 카르마제 왕께서 다스리는 이나쿠스 왕국이다! 아무리 제국의 개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관여할 자격 따윈……!”
“웃기는 소리 마라. 어차피 이나쿠스 왕국 또한 제국의 일부다. 그러니 제국이 행하는 일에 더 이상 반감을 품는다면 이 자리에서 널 즉각 처형하겠다.”
“크윽……!”
처형이라는 말에 토퍼 백작이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드물게 심판관들 중 정말로 귀족을 죽이는 자들이 존재했다.
이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심판관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은 아직까지도 심판관들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있었다.
제국 황실이 때로 그들을 이용해 귀족들의 숨통을 조이기도 했던 것이다.
“제기랄…….”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 토퍼 백작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경고 하나 하지. 오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만약 나의 존재가 다른 영지에도 알려지게 된다면…….”
레기온은 토퍼 백작을 향해 일부러 얼음장 같은 경고를 날렸다.
그러나 이미 그의 귀엔 레기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시체처럼 넋을 잃은 토퍼 백작을 보며 레기온이 이만 몸을 돌렸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