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in Another World Player RAW novel - Chapter 3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003화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3화
후웅―!
푸슉―!!
예기를 뿜어내는 검날이 번쩍이자 칼라반의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칼라반 님!!”
“대장님!!!”
“크아아―!!!”
솔 기사단과 칼라반 휘하 군단병들이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치는 가운데 어둠의 정령들도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병사들과 기사들도 착잡한 표정을 짓긴 마찬가지였다.
푹!
칼라반은 검을 대지에 꽂으며 버티고 섰다.
이어 그는 분노를 머금은 차가운 눈빛으로 아크로이어와 데포르를 바라보았다.
“약속은… 지켜줄 거라 믿겠습니다. 부디…크학! 제 마지막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아아… 그것은 걱정 말게.”
아크로이어가 만면에 미소를 띠우며 답했다.
잠시 몸에 경련을 일으키던 칼라반이 마침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렇게… 뛰어난 대 기사장 한 명을 떠나보내는군… 과연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
테오스는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아크로이어의 협박에 못 이겨 그의 편에 서긴 했지만 칼라반은 자신이 인정하는 가장 뛰어난 대 기사장 중 한 명이었다.
“칼라반…….”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데포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차갑게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어째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칼라반 님이 얼마나 당신을 아꼈는데… 그러실 수 있는 겁니까!!!”
“이것은 말도 안 됩니다!!!”
솔 기사단의 기사들이 흉성을 터트렸다.
“쯧… 죽어서도 내게는 무릎을 꿇기 싫다는 거냐?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놈이로군…….”
꿋꿋이 선 채로 죽어버린 칼라반을 보며 아크로이어가 혀를 찼다.
“저들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나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죽이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라. 그리고 칼라반의 가족들도 모두 잡아들여.”
“예…? 하지만 칼라반과의 약속은…….”
“크하하하! 이봐 테오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아직도 그걸 모르는 건가?”
그 말을 들은 테오스의 얼굴은 착잡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결국 아크로이어는 처음부터 칼라반과의 약속은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의 기회
적막한 어둠이 낮게 깔린 차가운 대지는 까마귀들이 어지럽혀 놓은 잔해들로 가득했다.
아직 수급되지 않은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조용히 한쪽에 뉘여 있는 시체로 향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체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은 복잡함이 가득했다.
“나의 소중한 친구여…….”
그는 한쪽 무릎을 굽혀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칼라반의 얼굴을 쓰다듬어주었다.
“누구십니까…….”
그때 그의 뒤편에서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쪽 다리가 잘린 상태로 바위에 기대앉아 있던 레클레이였다.
“네가 레클레이라는 인간이로구나.”
그가 뒤돌아보자 레클레이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 모습은…….”
상대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본 레클레이가 어떻게 해서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럴 필요 없다. 몸도 성치 않은데 그 상태로 있거라.”
“하지만…….”
“어차피 나는 인간들이 말하는 격식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예…….”
레클레이는 그럼에도 정중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렇다. 눈앞에 있는 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어둠의 정령왕 아포칼립스가 바로 그의 정체였다.
“마지막 칼라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늘 그러셨지만…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당당하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으셨지요.”
“후후. 아둔할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던 녀석이었다. 본래 있던 세계에서 사랑 받지 못하고 자라왔다 들었는데도 말이야… 하지만 이곳에선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았기에 그것을 베풀어야 한다 여겼던 좋은 친구였어.”
아포칼립스의 말에 어쩐지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레클레이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너는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칼라반 님이 쓸쓸해하시지 않도록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이 사실을 알면 칼라반 녀석이 좋아하겠구나.”
“그리고… 칼라반 님을 다시 뵐 수 있다면 꼭 전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레클레이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보군…….”
“예… 저희가 아크로이어 황자에게 속았습니다… 그는, 아니, 그 새끼는…!! 애초부터 제 주군과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레클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살아 기뻐하던 동료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모두 아크로이어가 만들어낸 광경이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습니다. 저희 동료들은 아크로이어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명 놈은 칼라반 님의 소중한 여동생까지도…….”
“그랬나…….”
아포칼립스는 침묵을 지키며 레클레이가 감정을 추스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저는 부상을 입은 데다 어차피 죽어가는 목숨이었기 때문에 살려둔 겁니다. 아니, 데포르 님이 저를 구해주고자 하셨지만 저는 그 여자에게 목숨을 구걸받기 싫었습니다. 제 주군의 몸에 검을 들이민 여자를!! 주군을 배신한 여자의 손을!! 어찌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시 레클레이가 울분을 토해내었다.
이내 그의 시선이 차가운 대지에 누워있는 칼라반에게로 향했다.
“저는… 저는 주군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바보 같은 우리 칼라반 님은! 저들의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으신 겁니다!!! 만약… 만약 다시 주군을 만나 뵙게 되면 욕 한 바가지 쏟아 부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리고 나서……!”
레클레이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칼라반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전장에서 보았던 칼라반의 그 넓은 등이, 든든했던 모습이 지금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아포칼립스 님은 칼라반 님과 둘도 없는 친우라고 들었습니다… 제발… 칼라반 님을 능멸한 인간들에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쿵!
레클레이는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부탁했다.
“정령술사가 나를 소환하지 않는 이상 정령왕인 내가 인간들의 일에 직접 관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단호한 거절이었다.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레클레이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이 일은 칼라반의 문제다. 내가 아닌 칼라반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예……?”
순간 무슨 말인지 몰라 레클레이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죽은 사람이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죽은 칼라반이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이여. 나는 지금 칼라반의 영혼을 본래의 세계로 다시 돌려놓으려 한다. 그가 본디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이니 말이다.”
“그런…….”
“그러나 나는 네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제안이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칼라반은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나를 비롯한 어둠의 정령들은 칼라반의 분노에 깊게 동조하고 있다. 정령들 모두 칼라반의 깊은 분노를 마음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지. 그러니 너와 칼라반에게 기회를 주겠다.”
아포칼립스의 심상치 않은 말에 레클레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너에게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정령들의 길을 열 수 있는 힘을 주겠다. 네가 길을 열 수 있는 것은 단 한번.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다.”
“단 한 명…….”
레클레이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정령들의 길을 열게 된 너는 모든 힘을 소진해 죽음을 면치 못할 테지.”
“아…….”
그때서야 레클레이는 아포칼립스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너의 목숨을 대가로 칼라반을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하겠습니다.”
아포칼립스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예상과 다르게 레클레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던 것이다.
“네가 칼라반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겠다는 것이냐?”
“저는 어차피 이곳에서 천천히 죽어갈 운명이었습니다. 칼라반 님이 쓸쓸해하시지 않도록 곁을 지켜드리고자 했지만… 저의 주군을 다시 뵐 수 있는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택할 것입니다.”
결심이 선 레클레이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눈이로구나.”
아포칼립스가 양 팔을 들어올렸다.
후우우웅―!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거센 강풍이 몰아치며 어두운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슈와아아아―!
칼라반의 몸에서 흘러나온 밝은 빛이 어지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칼라반이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너는 그곳에서 홀로 죽어갈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이레아 님을 위해서라도… 칼라반 님을 위해서라도!! 꼭 그분을 모셔오겠습니다.”
“행운을 비마.”
슈콰아아아―!!!
칠흑 같은 어둠이 칼라반과 레클레이를 순식간에 휘감았다.
대기가 요동치고 대지가 흔들거릴 정도의 광활한 힘이 아포칼립스를 중심으로 뻗어나갔다.
“칼라반… 우리 어둠의 정령들은 언제까지고 그대를 기다릴 것이다.”
칼라반의 시체와 레클레이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모든 것을 마친 아포칼립스는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기 위해 아공간을 열었다.
그런 아포칼립스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 * *
“으…으음…….”
“이봐요!! 이봐요. 정신이 듭니까!?”
칼라반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마지막 그의 기억은 카르마제의 검에 찔렸을 때였다.
고통을 애써 참으며 검으로 바닥을 짚고 섰었다.
그리고 보였던 아크로이어와 데포르의 표정.
환하게 웃고 있었던 아크로이어와 다르게 데포르는 복잡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중요치 않았다.
믿었던 그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편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칼라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으니 말이다.
“동공 상태를 확인해보니 분명히 의식이 돌아온 것 같습니다.”
“후우… 정말 다행이야… 늦었으면 못 살렸을 수도 있어.”
칼라반의 흐릿하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졌다.
“어떻게…….”
분명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건만 자신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네. 이건 기적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어요. 골든타임을 훨씬 놓쳤는데도 이렇게 살아 계시다니.”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골든타임……?”
“젊은 사람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 살아 있어야 희망이 있는 겁니다. 남은 가족들을 위해서도 결코 그런 선택을 해선 안 돼요!”
단호한 그의 말에 칼라반은 점차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