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in Another World Player RAW novel - Chapter 69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069화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 69화
#속내
“그런가…….”
진심어린 한니발의 말에 칼라반도 더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때 지켜보던 운량이 슬쩍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 주군께서 걷고자 하는 길은 상당히 고됩니다. 어쩌면 세상을 등지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럼에도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세상을 등지는 것쯤은 라그나로크에 몸을 담은 순간부터 각오한 일입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일반 공병대 소속으로 늙어죽는 것보단, 제가 따르고 싶은 분의 일을 돕다 죽는 것이 훨씬 보람찰 것 같습니다.”
“흐음… 그것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만큼 멋진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한니발의 단호한 태도에 운량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것보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데 이런 눈빛을 가진 사람들은 대게 곧은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주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칼라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승낙이었다.
그는 눈앞에 한니발을 내려다보았다.
한니발의 모습에서 자꾸만 레클레이의 모습이 비춰졌다.
‘닮은 구석이 많군…….’
그래서인지 왠지 정이 가는 녀석이었다.
칼라반이 몸을 일으키려는 때 이라벨이 한껏 들뜬 얼굴로 들어왔다.
“우아!! 그러면 이 형아도 우리랑 같이 지내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었다. 혹시 불편할까봐 그러니?”
“아니요! 너무 좋아요!! 맨날 제르단님이랑 단 둘이서만 이곳에서 지냈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아지니까 신나요! 헤헤…….”
해맑게 웃고 있는 이라벨을 보며 모두가 웃음을 지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제르단도 피식 웃고 말았다.
항상 밝은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쓸쓸함을 뒤로 감추고 있던 이라벨이 어느 순간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짓게 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르단으로서도 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이다.
“하아… 이것 참 곤란하게 되었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난 어떻게 해야 하나…? 이라벨 녀석이 저렇게까지 좋아하는데…….”
제르단은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모두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러나 제르단은 몰랐지만 그가 했던 혼잣말은 칼라반에게도 생생히 들리고 있었다.
어느덧 날은 어두워져 모두들 각자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한니발은 칼라반에게 공손히 인사를 전하곤 이라벨이 안내해주는 곳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건물 안에 마련된 방은 많았다.
똑똑.
칼라반도 침소에 와 홀로 상념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접니다.”
제르단의 목소리였다.
어둑해진 밤중에 그가 홀로 찾아오자 칼라반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칼라반에게서 답이 없자 제르단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라.”
칼라반은 제르단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먼저 확인했다.
역시나 그가 들고 있는 것은 자그마한 술병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제르단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 잠이 안와서 말입니다. 요즘 술을 안마시면 잠을 잘 못자요. 그래서 이렇게 지부장님과 한 잔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바쁘시지 않다면 같이 한잔 하시겠습니까? 지부장님 말고 딱히 마실 사람이 없어서요…….”
“그러지.”
칼라반이 흔쾌히 승낙하자 제르단은 총총 걸음으로 달려왔다.
제르단은 술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가 먼저 칼라반에게 술을 건넸다.
“제가 먼저 따라드리겠습니다.”
제르단과 칼라반이 술을 나누고 첫잔을 들이켰다.
곧바로 술을 목에 넘긴 칼라반과 다르게 제르단은 슬며시 칼라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칼라반은 남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 다음 일어날 일은 안 봐도 훤했다.
[상태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만독지체 스킬이 발동되었습니다.]역시나 제르단이 가져온 술에는 독이 들었다.
칼라반은 일부러 눈꺼풀을 무겁게 했다.
그가 비틀거리며 술잔을 떨어트리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칼라반이 독에 반응하는 것을 보이자 제르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허리춤의 단검을 들어올렸다.
“당신에게 별다른 원한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역할은 라그나로크에서 이곳으로 보내진 이들을 죽이는 것…….”
제르단은 단검을 칼라반의 목에 가져갔다.
이전에 봐왔던 모습만이라면 단칼에 죽여버렸겠지만 조금의 망설임이 생긴 건 오늘 일 때문이었다.
한니발의 말을 들었을 때 본인도 울컥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공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곳으로 보내진 지부장 중 이라벨을 가장 인간적으로 대해준 것도 칼라반과 유운량이었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이곳까지 오시게 된 겁니까. 이곳 아라곤은 다른 말로 간부들의 무덤… 라그나로크에 필요 없다 여겨지거나 임무에 크게 실패한 인물들이 보내지는 곳인데…….”
“흐음… 그랬군요. 어쩐지 이곳에서의 임무가 지나치게 적다 생각했는데… 그런 용도로 임무가 주어지는 곳이었나 보군요.”
“……!?”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제르단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유운량이 파초선을 살랑거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에…!?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지부장님을 구하기엔…….”
“그런 사연이 있었군.”
이어 들리는 칼라반의 목소리에 제르단이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칼라반을 쫓았다.
그러나 칼라반은 이미 제르단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 있는 뒤였다.
제르단은 혹시 몰라 다시 칼라반의 술잔을 들여다보았다.
술잔은 깔끔히 비워져있었다.
그렇다고 칼라반이 자신 모르게 술을 따로 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목격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 분명 독에 중독되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이 정도 독은 내게 통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제르단은 조용히 단검을 역수로 말아 쥐었다.
자세를 낮게 고쳐 잡으며 칼라반과 유운량을 살폈다.
“싸워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블레이드 후보님께 검을 들이민 것을 들켰으니 이렇게라도 해야겠지요.”
“어리석은 짓을…….”
“비록 제가 도박과 술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긴 했지만… 만만하게 보시면 곤란할겁니다.”
우우웅―!
제르단이 들고 있는 단검에 푸른 마나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유운량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주군께 두 번씩이나 검을 겨눌 수 있도록 둘 순 없지요.”
“헛소리!”
제르단은 유운량을 먼저 제압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사실 그는 칼라반보다 유운량의 존재를 더 신경 쓰고 있었다.
가까이서 지켜본 칼라반은 그다지 별 볼일 없다 판단되었지만 유운량에 관한 정보는 적었다.
워낙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제르단으로서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차림새나 말하는 어투 그리고 칼라반이 그를 설명했던 것까지 합쳐서 그나마 전투계열이 아닌 머리를 쓰는 쪽으로 여기고 있었다.
휘우웅―!
콰당!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유운량을 향해 뛰쳐나가던 제르단의 시야가 빙글 돌아버린 것이다.
몸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제르단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듯하군요.”
운량의 말에 제르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우선 재빠르게 몸부터 일으켰다.
“아…….”
그제야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보다 몸이 무거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마나홀의 마나를 자유롭게 운용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방해라도 받는 것 같았다.
“이제야 느끼셨습니까?”
“……!?”
“이곳은 이미 제가 관리하는 공간입니다. 진법을 발동시킨 이상… 평소와 같은 실력을 발휘하시긴 어려울 겁니다.”
제르단을 가볍게 넘겨버렸던 운량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는 다시 한 번 덤벼보려면 덤벼보라는 듯 부채질을 살랑거렸다.
제르단은 곧바로 방향을 바꿔 칼라반에게로 향했다.
사실 다른 것보다 칼라반의 목만 베면 자신의 임무는 끝이었다.
그러니 자신과 유운량과의 대치에 잠시나마 방심하고 있을 칼라반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르단의 오산이었다.
칼라반은 숱한 전장을 다닌 몸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상황에서 방심하고 있을 리 없었다.
휘욱―!
주륵.
칼라반의 검끝이 제르단의 목에 닿았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을 터였다.
제르단은 자신의 목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촉에 시선을 내렸다.
칼라반이 조금만 힘을 준다면 이 차가운 검날은 자신의 목을 베고 지나갈 것이 분명했다.
제르단은 고개를 숙이며 들고 있던 단검을 내려놓았다.
딸카당―!
“후우… 그냥 죽이십시오.”
“싫다.”
“예…?”
“그대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건 삶을 포기한 눈빛이야. 아니… 포기라기보다 목적도 희망도 없는 눈빛이라야 맞겠군.”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그래서 일부러 도박꾼에 술주정뱅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칼라반의 말에 제르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와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자신의 내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마치 발가벗은 것 같은 느낌에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그리 확신하듯 말씀하십니까.”
“이건 시스템의 도움도 뭣도 필요 없지… 내가 전장에서 보아온 수많은 눈빛들이 그러했으니…….”
칼라반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가 검을 거두자 제르단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지? 그대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이곳에 남아 한량같이 지내며 지부장으로 오는 자들을 죽이며 살아가고 있는 건가?”
“그건…….”
쿵쿵쿵!
그때 문을 두드리는 격한 소리가 들려왔다.
칼라반과 유운량, 제르단은 동시에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음… 이상하군요. 이렇게 늦은 시각에 이곳을 방문할 만한 사람은 없는데…….”
“소리를 보아하니 무슨 다급한 일인 것 같다.”
칼라반은 제르단을 겨누던 검을 거두어들였다.
제르단은 한 방울 흘러내리는 자신의 핏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저를… 죽이지 않으시는 겁니까?”
“음? 그대를 죽여야 할 이유가 있나?”
“죽여야 할 이유라뇨? 당연한 것 아닙니까…? 라그나로크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이유가 어찌되었건 블레이드 후보님께 감히 검을 겨누었는데… 아니 공민님이 블레이드 후보 신분이 아니더라도 저보다 상관인 사람을 죽이려 했는데…….”
“그래서 내가 죽었나?”
“아… 아닙니다… 그것은 아니지만…….”
“훗. 지금까지 날 죽이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면… 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샀을 거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라. 네가 내게 내민 검은 내 목 언저리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내가 널 죽이기까지 할 이유도 없다. 물론 네 검에 살기가 가득했었더라면 모르겠지만… 망설임이 가득했던 검이라면 더더욱 그럴 이유가 없지.”
칼라반의 말에 제르단은 자신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설마하니 칼라반이 자신의 마음 상태마저 느끼고 있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당신은 대체…….”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여유도 그렇고 자신에게 검을 겨눈 상대를 이토록 쉽게 용서하는 배포도 그렇고, 갑자기 눈앞에 있는 칼라반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