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in Another World Player RAW novel - Chapter 75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075화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 75화
#네가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들을 구출 하느냐인데…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결코 인질들을 눈에 띄는 곳에다 두었을 리 없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인질들이니만큼 경계도 삼엄할 테지요.”
운량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중 제르단이 놀란 눈을 했다.
“에?! 잠깐만, 잠깐만요… 지금 어째서 얘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 겁니까? 벌써 이 여자의 어머니란 분과 그 세키라드라는 사람을 구해주기로 결정이 난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구해주고 늑대 부족이 힘을 되찾는다면 산악 민족들이 아라곤 영지로 침입해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이다. 특히나 우리가 독수리 부족과 힘을 합친다면 곰 부족도 더는 어떻게 하지 못해.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대륙인들의 땅을 넘보지 않을 거다. 이것은 족장의 딸인 내가 목을 걸고 약속해주겠다.”
세오나의 단호한 말에 칼라반이 제르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는군.”
“후우… 결국 일이 이렇게…….”
“두렵나?”
“그럼 안 두렵겠습니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블레이드 하르스마이어님인데…….”
“이봐 너. 무서우면 지금이라도 빠지는 게 어때?”
뒤에서 듣고 있던 헤이나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녀의 반응에 제르단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하다는 얘기였지요. 왜냐하면…….”
제르단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주저하거나 망설이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산악 민족의 습격이 있었던 날부터 칼라반을 따라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저 제르단은 공민 지부장님을 따를 것을 결심했거든요!”
“갑자기?”
“갑자기가 아닙니다. 산악 민족들의 습격이 있었을 때 공민 지부장님은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영지민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 모습에 솔직히 놀랐습니다. 감춰두었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냉철한 상황 판단력과 영지민들의 목숨까지 소중하게 여겨주시는… 그 모습에 마음을 달리한 겁니다.”
제르단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이곳으로 보내진 지부장들은 한심한 자들뿐이었습니다. 아니, 비단 이곳으로 보내진 자들만은 아니었죠. 처음 라그나로크에 몸을 담고 만난 제 상관마저도 살인에 미친 작자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보다 못한 저는 끝내 상관을 제 손으로 죽였고, 이를 알게 된 하르스마이어님의 수족 알카가스님께서 평생 상관을 죽일 수 있는 일을 주겠다며 이곳으로 보내진 겁니다.”
“그랬군…….”
“저는 상대가 누구건 그들의 명령 때문에 이곳으로 보내진 지부장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없었습니다. 이곳으로 보내진 지부장들은 하나 같이 후안무치들뿐이었으니까요. 동네 시정잡배들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대부분 이라벨을 함부로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제르단의 시선이 이라벨에게로 향했다.
그동안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라벨은 몇몇 지부장들에게 폭력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녀석은 그것들을 꿋꿋하게 견뎌냈다. 어린 나이임에도 이곳으로 온 지부장이 곧 세상을 바꿔줄 사람들 중 한 명이라 생각하며 견뎌온 것이다.
제르단으로선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었다.
어린아이가 기특하다는 마음보단 제 나이에 맞게 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르단은 이참에 한풀이겸 그동안의 얘기들을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주로 이라벨이 어떻게 부모를 잃었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그는 이곳에 와서도 이라벨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그의 얘기가 점점 길어짐에도 칼라반이나 유운량은 귀찮아하는 내색 한 번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제르단과 이라벨의 얘기들을 진심으로 경청해주었다.
“그런 사정이 있었나…….”
제르단의 얘기가 끝나고 칼라반이 이라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갑작스런 칼라반의 손길에 이라벨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이상하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 것이다.
녀석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감췄다.
“으… 눈물을 보이면 안 돼요… 눈물을 보이면…….”
그동안 눈물을 보이면 더욱 폭력을 당했다. 이라벨은 그 기억에 사무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때 이라벨의 등 뒤로 따뜻한 감촉이 전해졌다. 누군가 그를 상냥히 끌어안아준 것이다.
“괜찮아. 마음껏 울어. 네 나이 때는 슬프면 눈물짓고 기쁘면 웃는 거야. 그래도 돼.”
“아아…….”
이라벨을 안아준 이는 다름 아닌 헤이나였다.
그녀는 새하얀 팔로 이라벨을 한껏 안아주었다.
제국군의 손에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되었음에도 씩씩하게 자라준 것이 대견했던 것이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마침내 이라벨이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제르단이 입을 열엇다.
“그럼 이제 이곳에 있는 모두가 함께 하는 건가요?”
“흐음… 아직 제일 중요한 분이 따로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만…….”
유운량의 시선이 헤이나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함께 움직여 줄 수 있는지 아닌지는 차이는 컸다. 헤이나의 대답 여하에 따라 작전의 궤를 달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헤이나는 말없이 칼라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공민과 따로 얘기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나?”
“어려울 것 없다.”
헤이나가 먼저 밖으로 나서자 공민이 그 뒤를 따랐다.
이를 지켜보던 제르단이 슬쩍 유운량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두 분은 대체 무슨 관계인겁니까?”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예…? 그치만… 지금까지 지켜보기엔 아무사이가 아닌 것 같아보였는데 말이죠…….”
“후훗. 어쩌면 오늘부터는 두 분이 제르단님의 말씀대로 아무사이가 아닌 것처럼 될 수 있을 지도요.”
“아…….”
“사람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남녀 사이의 일은 더더욱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는 두 사람이 떠나간 방향을 보며 미소를 흘렸다.
그리곤 세오나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아… 그럼 두 분이 돌아오시기 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볼까요.”
일행들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온 칼라반과 헤이나는 산속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밤하늘에 수놓아진 수많은 별들은 아름다운 빛으로 존재감을 발산하는 대신 두 사람을 더 밝혀주는 기분이었다.
헤이나는 막상 바깥으로 나오긴 했지만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는 이것이 본인답지 않다는 생각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울창하게 뻗은 대나무들이 가득한 숲의 안에서 헤이나가 몸을 돌렸다.
“그나저나 너. 편지에, 아니, 그 정도면 쪽지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어떻게 겨우 세 글자만 적어놓을 수 있어?”
헤이나는 칼라반이 떠나기 전 편지를 남겨놓았었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에게 사과할 기회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은 칼라반도 답신을 남겨두었다. 남겨진 내용은 ‘알겠다.’ 단 세 글자였다.
뭔가 칼라반답다면 칼라반다운 쪽지였지만, 헤이나의 입장에선 어딘지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칼라반을 찾아온 것은 정말 지난번의 일을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그가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도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칼라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무작정 이곳까지 길을 나섰다. 그런데 막상 이곳까지 와보니 다른 생각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그때 칼라반의 답변이 이어졌다.
“필요한 말만 써놓았을 뿐이다.”
“어우… 진짜… 너 애인 없지!?”
“없다.”
“응, 그래. 너 하는 행동만 봐도 딱 그래 보여! 아니, 근데… 아아악! 왜 이렇게 약이 오르지!?”
헤이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머리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칼라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만 꿈뻑 거렸다.
사실 얼추 짐작은 할 수 있으나 헤이나의 반응이 재밌어 슬쩍 놀려주는 중이었다.
그러건 말건 헤이나는 곱게 눈을 흘기며 칼라반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우선 칼라반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일단 이전에는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괜찮다. 그리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으니.”
“얘기는 유운량한테 들었어.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헤이나는 혹시나 칼라반이 다시금 마음 상할까 싶어 구태여 입 밖으로 그 얘기를 직접 꺼내진 않았다. 칼라반도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느꼈기에 그저 담담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둘 사이에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선선한 밤바람이 고스란히 코끝에 느껴졌다.
온통 상대를 신경 쓰느라 들어오지 않던 주변 대나무들도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게 뻗어 있는 대나무를 만지던 헤이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하려는 일은 여동생의 복수인거야? 그걸 위해 라그나로크의 힘을 이용할 생각으로 블레이드 후보가 된 거겠지?”
“그렇다.”
“복수의 대상은 당연히…….”
“아크로이어 황제의 목이다.”
칼라반의 무섭도록 가라앉은 목소리. 그가 이토록 차가운 눈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칼라반은 말수가 적긴 하지만 눈빛이나 표정만큼은 부드럽고 온화함이 드러나 있었다. 적어도 헤이나는 그를 지켜보며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칼라반이 그녀의 오빠를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래 심성이 나쁘지 않다는 것쯤은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고, 아이를 위해 몸을 던지던 그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도착해 오랜 만에 칼라반을 봤을 때도 그는 영지민들을 지키기 위해 산악 민족들의 습격을 막고 있었다.
그때도 헤이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남몰래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여주는 칼라반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을 두고 보는 것 같아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래, 이것 또한 너겠지. 내가 모르는 너의 모습도 아직 많을 테니까.”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어쨌거나 나는 분명 저번에 관한 일에 대해 사과했어.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다른 어떤 사과보다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으니.”
“그럼 이제 내가 질문 하나만 해도 돼?”
“궁금한 것도 많군. 질문이 뭔가?”
칼라반이 피식 미소 짓고 말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자신에 대해 이렇게 궁금해 해주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나마 오랫동안 함께 했던 연화도 자신에 대해 무언가 물어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였지. 오히려 그때는 내가 그녀에 대해 많은 것들을 물어본 것 같군…….’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눈앞에 있는 헤이나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건 말건 그녀는 새삼 진지해진 얼굴로 칼라반과 얼굴을 가까이 했다.
“너, 날 어떻게 생각해?”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돌직구에 이번엔 칼라반도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어떤 의도에서 이런 말을 던진 것인지 쉽게 짐작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워낙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정의 여인이라 더욱 그랬다.
그가 쉽게 답을 못하자 헤이나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칼라반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넌 어째서 나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저기 있는 그 누구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 아냐? 내 말이 맞지 않아? 내가 말이야…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실력도 블레이드 후보들 중에서 상위권에 속하는데다 나름 독자적인 세력도 갖추고 있는 어메이징한 여자라고! 내 말 알아들어!?!?”
그녀의 난데없는 말에 칼라반도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잠시나마 다른 쪽으로 생각한 자신에게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무슨 얘기인지 안다. 네 말대로 헤이나 너는 내게 과분한 사람이지.”
“그래! 그런데 왜, 어째서! 나한테는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냐고!? 솔직히 지금 네 주변에서 가장 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난데!!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하라고 날! 아이씨… 그리고 이걸 꼭 내 입으로 얘길 해야 하나??”
“이미 다 얘기 했…….”
“시끄럽고! 또 그 나를 믿는다는 둥, 너를 믿는다는 둥 그런 이상한 헛소리 할 생각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 그래서 내가 필요해? 안 필요해? 다른 것 다 필요 없고 그것만 말해.”
마른 침을 삼키는 그녀의 눈동자와 칼라반의 눈동자가 한데 마주했다.
칼라반이 침묵을 지킨 이 순간은 아주 잠깐의 찰나였지만 헤이나에겐 그 어떤 시간보다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칼라반의 깊은 눈동자가 헤이나를 지그시 응시했다. 이번엔 헤이나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칼라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헤이나의 입꼬리를 절로 올라가게 만들었다.
“네가 필요하다.”
“…그래, 그 한 마디면 충분해 난.”
헤이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붉게 상기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칼라반을 등지고 섰다.
“그 머…먼저 가. 나는 잠깐 밤공기 좀 쐬다 갈 테니까.”
“같이 있다 가지.”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처…천천히 따라갈 테니까… 음… 먼저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누고 있어.”
“…알겠다.”
그녀가 거듭 만류하자 칼라반도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가자 헤이나는 남몰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녀는 아직까지 떨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강한 상대를 만나도 떨지 않던 그녀건만 이상하게도 칼라반의 앞에만 서면 밀려오는 긴장으로 몸이 떨렸다.
그녀는 주책맞게 쿵쾅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쓰…쓸데없이 눈동자도 이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