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ne in Another World Player RAW novel - Chapter 94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094화
나 홀로 이세계 플레이어 ― 94화
#사자생환(死者生還)
“조금 전 당신은 죽은 사람이라는 말 때문인가요? 그런 거라면 더더욱 상관없지 않아요? 당신을 찾는 사람도 없을 테고… 또 당신의 과거가 어떻든 어떤 일을 해왔건 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저는 제가 본 것만 믿으니까요. 지금까지 제가 지켜봐온 후밀리스 당신은 신비롭지만 마음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게다가 말은 안 해도 주변사람들을 위한 노력들을 하고 계시다는 것… 이제는 제게 그런 행동들까지 보이기 시작했는걸요.”
“죄송합니다… 저는… 감히 가족을 갖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후밀리스가 미안함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후밀리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져있었다.
이에 소니아가 후밀리스의 두 손을 잡았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다시금 후밀리스의 손으로 전해졌다.
“아주 솔직하게…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말하자면… 어느 날부터인가 저는 당신을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 당신에 대한 연민인가도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겉모습이 아닌 제 자신을 바라봐주는 당신이었기에 좋은 거였어요. 물론… 당신이 제 모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당신만은 온전한 저를 바라봐주시는 것 같아 행복했어요. 그러니 저와 함께 해주시지 않겠어요?”
“저는…….”
“물론 지금 당장 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언제까지고 당신의 답을 기다릴 수 있어요. 그리고 혹시나 제가 당신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했다는 것에 대한 부담은 생각지 말아주세요. 그만큼 당신도 저와 뷰렉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힘이 되어주신 것도 많으니까요. 그러니 지금은 오직 저를 여자로서… 그렇게만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
후밀리스는 아무런 답을 해주지 못하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의 말을 한껏 뱉어낸 소니아는 무안함에 괜히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두 사람한테 주려고 맛있는 음식도 싸왔는데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네요.”
“아, 조금 전부터 나던 향기로운 냄새가 그 음식이었나 보군요.”
“맞아요. 우선 이곳부터 정리하고 늦었지만 저녁을 차려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겠습니다.”
“아니에요. 일단은 쉬고 계세요.”
소니아는 혹시 몰라 후밀리스의 주변부터 정리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움직이다가 날카로운 것에 베여 다칠 지도 몰랐으니 배려한 것이다.
그녀가 정리를 하는 동안 후밀리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소니아는 그의 생각에 방해되지 않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저벅저벅.
그때 후밀리스의 귓가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발소리가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말씀을 들어드릴 상황이 아닌 것 같군요.”
“그런가.”
후밀리스의 정중한 사과에 짤막한 답이 들려왔다. 처음 듣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언제 시간이 되지?”
“흐음… 일단은 이곳이 정리가 되어야 하니까 적어도 내일쯤에나 말씀을 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급한 일이 아니라면 다음에 들러주시겠습니까?”
“그렇군…….”
사내는 짧은 답과 함께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주변을 정리하던 소니아가 그를 붙잡았다.
“괜찮으니까 말씀 나누세요. 이곳은 제가 정리하면 되니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하지만 이곳은 어지러우니 다른 방에서…….”
“아닙니다. 장소는 어느 곳이던 상관없습니다. 아가씨께서 불편하지만 않으시다면…….”
“저는 불편할 것 없는데 혹시나 손님분의 얘기를 제가 듣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지금 이곳이 좀 정신 사나운 상태기도 하고…….”
“아니, 괜찮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사내는 후밀리스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후밀리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소니아가 빠르게 다가가 그를 근처 의자에 앉혀주었다.
“고맙습니다, 소니아 씨.”
“아니요, 뭘요.”
소니아는 다시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사정이 생겼어서…….”
“괜찮다. 그보다 더한 모습도 봤으니까.”
사내의 말을 들은 후밀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다짜고짜 말을 놓는 걸로 봐서 앞의 사내는 귀족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소니아에게는 정중한 어투를 구사했다.
그 말은 이곳에 머무는 귀족이 아닐 수도 있었다.
디라키온에 있는 귀족들이라면 한 번쯤 소니아의 이름을 들어봤을 테고 이렇듯 정중한 말투를 할 리도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후밀리스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보다 더한 모습도 봤다는 말이었다.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떤 일로 저를 찾아주신 겁니까?”
“나의 얘기를 듣고, 그대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 말해주면 좋겠군.”
“흐음… 알겠습니다. 말씀해주시신다면 성심 성의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사내는 조용히 후밀리스의 앞에 앉았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있는 후밀리스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거의 5년이라는 세월을 넘게 알고 지낸 여인이었다.”
사내가 얘기를 시작하자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소니아도 귀를 열고 그의 얘기를 들었다.
그녀 역시도 다른 사람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기에 모른 척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사내도 소니아가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듣는다 해도 상관없는 얘기였으니 말이다.
“나는 모든 것이 끝나고 그녀와 함께 본래 내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어떤 일을 끝내는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전쟁.”
사내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근래에 쉽게 들을 수 없는 낯선 단어였다.
그간 평화로운 시기가 지속되어 이제 서서히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잊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말에 후밀리스의 얼굴이 한층 굳어지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라… 그녀와 함께,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그 여성분은 같은 고향의 사람은 아니었나보군요.”
“그렇지. 또한 그녀는 나와 사뭇 다른 여인이었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달랐지. 아무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무렵, 나는 결국 누구보다 믿었던 그녀에게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지. 북받쳐 오르는 수많은 감정들 사이에서 도저히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 지경이더군.”
사내의 말에 후밀리스와 소니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배신이라니…….
그 어떤 사람이라도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소니아는 주먹까지 말아 쥐며 사내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반면 후밀리스는 차분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배신이라면… 어떤 배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시 그 여인분이 당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그와 함께 떠나려 했다거나 뭐 그런 경우입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낮은 어조로 말끝을 흐린 사내가 얼굴에 씁쓸함을 지우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니아도 괜히 씁쓸한 표정을 따라 짓고 말았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사내는 차라리 그런 경우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 일이 궁금한 것은 소니아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후밀리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 어떤 일이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만일 얘기하기 불편하시다면 말씀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그녀는 직접 나를 죽이려 했다.”
“흡……!?”
“……?!”
잠자코 얘기를 듣고 있던 소니아가 절로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놀란 것은 후밀리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굳은 얼굴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마지막 정이 남은 것인지, 미련이 남았던 것인지… 그녀는 끝내 자기 손으로 나를 죽이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까진 아니었는지 모르지. 그 여인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나를 죽이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 물론 나는… 어쩌면 그녀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마음이 꽤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세상에… 듣기에 너무 괴로운 얘기네요…….”
어느새 대놓고 사내의 얘기를 경청하기 시작한 소니아가 평소 버릇대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서 어찌된 겁니까? 이렇게 살아계신 것을 보니… 끝내 그 여인은 당신을 죽이지 못한 모양이로군요?”
“아니, 나는 죽었었다. 그러나 지금 살아 있기도 하지.”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나는… 사랑하는 여인과 나의 불씨들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죽었다.”
사내의 얘기를 듣던 후밀리스가 ‘불씨’라는 단어에 끄덕거리던 고개를 우뚝 멈췄다.
그는 느린 움직임으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얼굴을 들었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그는 마치 앞을 내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내 쪽을 응시했다.
그러건 말건 사내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곁에 섰다. 어쩌면 그가 나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고 멋진 사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아니, 솔직히 말해 이제는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짐작조차 되질 않는다. 짐작하길 포기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어.”
“어째서… 어째서 그들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으신 겁니까?”
“당시 난 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사랑하는 여인과 나를 따르는 불씨들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녀석들을 책임진 나의 역할이라 여겼으니까…….”
“바보같군요.”
후밀리스가 차갑게 말했다.
딱딱하고 냉정하게 보일 정도의 대답에 듣고 있던 소니아도 놀라고 말았다.
후밀리스가 저렇게 말하는 것은 그녀로서도 처음 봤기 때문이다.
“후후… 그것이 그대의 생각인가. 그렇다면 이번엔 내가 질문을 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지금의 그대라면 스스로의 소신과 가족. 둘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가?”
“…….”
후밀리스가 커다란 표정 변화를 보였다.
이내 그는 무겁게 닫혔던 입술을 어렵사리 열었다.
“저는… 가족을 택하겠습니다…….”
“그런가…….”
“당신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의 불씨들을 다시 되살릴 생각이다.”
“그랬군요… 그래서 절 찾아오신 겁니까?”
“그대가 먼저 떠오르더군.”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니아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곧 그들의 대화로 이어졌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생각보다 별로 놀라지 않는군.”
“아니요. 솔직히 말해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당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지금 제 심장은 주체되지 않을 정도로 뛰고 있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제 피가 다시금 뜨겁게 흐르는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로군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그날 당신은 제게 말했습니다. 살라고. 무게를 짊어진 채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라고 말이죠. 그러나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명령을 지키며 살아갔지만 그럼에도 제 스스로를 잊고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혹시 죽음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흐음… 글쎄…….”
사내는 후밀리스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경험이지만 죽음이라면 직접 겪어보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것이 과연 죽음이라고 불리 울 수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때 후밀리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죽음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것. 그것이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자신을 죽였고 또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문득 저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나.”
“그렇게 저는 살아 있지만 죽는 것을 택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신과는 반대로군요. 죽어 있지만 살아가는 당신과…….”
“그렇군. 묘하게 되었어.”
사내는 두 눈을 감고 있는 후밀리스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후밀리스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당신 덕분에 저는 잊고 있었던 것들을…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많이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요.”
“변화가 있었나?”
“물론입니다. 이곳으로 오고난 뒤 스스로를 놓지 말고 살아가라던 당신의 말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후밀리스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소니아가 그런 후밀리스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후밀리스도 안심하라는 듯 소니아의 손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사내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렇군.”
덜컹!
그때 누군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소니아는 바깥으로 나갔던 뷰렉스인 줄 알았으나 곧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뷰렉스의 친구잖아…? 그런데 그 몰골은…….”
“누, 누님…! 죄송합니다, 아니, 큰일났습니다!”
“큰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소니아는 갑자기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