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101)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101화(101/101)
#101. 生
‘마족…!’
용사 이즈미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차마 친우에게 검을 겨눌 수 없던 그가 손을 뻗었다.
“세드릭!”
세계가 산산이 조각난다.
호천이 죽으며 그가 형성한 크랙이 뒤늦게 붕괴된 탓이다. 세드릭은 두 날개를 웅크린 채 조각나는 하늘로부터 유스티나스를 보호했다.
그리고 이어, 검은 세계가 샅샅이 흩어지고 푸른 민천(旻天)이 드러나는 순간.
세드릭은 날아올랐다.
“-이런, 이런!”
그리고 같은 하늘.
허공을 밟고 서 있는 한 사내가 세드릭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자가 네 녀석이로구나! 음! 그렇다면 동료 된 도리로서 내가 마중을 나오는 것이 옳겠지!”
“……네놈은, 뭐냐.”
“나 말인가?”
척!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근육질 사내는, 탈의한 가슴팍을 한껏 내밀며 크게 외쳤다.
“이 몸은 불의 마족! 민천(旻天) 레프라고 한다! 앞으로 네 전우가 될 사나이지!”
“…….”
세드릭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를 지나쳐 날았다. 대놓고 무시당한 레프가 화들짝 놀라 폴짝폴짝 허공을 밟으며 그를 쫓았다.
“잠깐! 같이 가지! 동료!”
“…….”
그리고 이즈미는.
“이게, 무슨…….”
망연히 모든 광경을 담았다.
처음에는 멍하던 녹안이 어느새 점차 절망으로 일그러진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달렸다.
그러나 인간의 다리로는 마족의 날개를 따라갈 수 없다. 더군다나 막 전투를 끝내 지친 몸으로는.
결국 이즈미는 얼마 가지 못해 바닥을 굴렀다. 치료해 줄 이 없는 상처가 쓰라렸다.
“허억, 헉.”
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헐떡였다. 세드릭과 유스티나스는 어느새 저 먼 곳으로 사라져, 작은 점처럼만 보였다.
질척한 감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빌어먹을!”
쾅!
이즈미가 사나운 어조로 땅을 내리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내려치는 주먹에서 피가 흐르고 살점이 짓무를 때까지.
“빌어먹을! 빌어먹을!”
계속. 계속.
***
“이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이냐? 어디로 가려는 거지?”
“…….”
“안고 있는 건 또 무언가?”
세드릭은 옆에서 종알거리는 사내를 무시했다.
유스티나스가 그토록 증오하던 마왕군 사천 중 하나다. 평소라면 당장에라도 검을 뽑았을 테지만.
…그래. 평소라면.
유스티나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자 심장에 구멍이 뚫린 듯 공허했다. 쓰린 슬픔으로 피 섞인 눈물이 흘렀다.
“……세드릭. 내가 밉지?”
“왜냐하면, 나는 줄곧 네 마음을 이용했으니까…….”
“응. 미안해. 알고 있었어.”
그녀가 마지막에 남긴 말들이 가슴을 후벼 판다.
밉냐고?
그녀가 그를 이용한다는 것도, 완벽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전부 알고 있었다.
야속하다곤 생각했다.
또 질투했다.
함께 자랐던 자신은 믿어 주지 않으면서, 고작 만난 지 세 달이 된 용사에게 굳건한 신뢰를 주는 그녀를.
그러나 결코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스티나스는.
유스는.
“전에 말했던 거, 기억, 해?”
“……뭘?”
“난 세상을, 구하고 싶거든.”
바보 같을 정도로 신실하고, 올곧고, 선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세드릭. 너는 날, 지지해, 줘야 해.”
“있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내 사명을…… 대신……. 완수해 줘. ……부탁해도 되겠니?”
죽음을 앞두고도 그 천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 전한 잔인한 부탁마저도 눈물이 날 만큼 다정했다.
단지 비극은, 그녀의 다정이 오직 인간만을 위한다는 점일 테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데?”
“그게…… 옳은 일이잖아?”
“…하.”
세드릭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걱정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으니.
두 장의 날개를 펴며 자연스럽게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애초에 날 때부터 인간이었던 적이 없었다.
쓰레기장 키에토에 고인 진득한 악의와 좌절. 깊고 깊은 흑마(黑魔)가 그의 원천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던 것도 당연했다.
그의 본질은 마족.
유스티나스가 그를 믿지 못했던 건,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나?
……아니.
뭐든 좋았다.
유스티나스는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잃고 빈민가를 떠돌았다. 그러다 화재로 눈을 잃곤 동대륙에서 대체 어떤 고난을 겪었을지.
성녀로 추대되었다고 하나, 그녀의 기적에는 대가가 따랐다. 그녀는 십수 년을 신실하게 살아가며 셀 수 없이 많은 이를 치료했다.
아픔을 대신 가져오는 방식으로.
그 뒤는 어땠지?
세드릭 자신을 만난 이후로도, 유스티나스는 늘 부상을 달고 살았다.
언제나. 언제나…….
그녀는 목숨을 걸고 사람과 세상을 지키다 죽었다.
그냥도 아니다.
아프게. 고통스럽게. 괴롭게.
선업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고 초라한 죽음이었다.
그런데 신이라는 작자는.
유스티나스에게 제 살을 깎아 만드는 반쪽짜리 기적을 주며 편애한다고 말하곤, 정작 그녀가 죽을 때 대체 무얼 하고 있었나?
그녀가 지키려던 세상은?
그녀가 구해 주었던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됐다.
유스티나스의 결말이 고작 이따위인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아주 착한 애였는데.
빌어 처먹을 세상을 위해 희생하기엔, 그래. 너무 고결한 애였다.
유스티나스는. 그 애는.
“…그 애가 없는 세상 따위는.”
그 애를 죽게 만든 세상 따위는.
“전부 없애 버리겠어.”
그녀에게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하곤 나 몰라라 한 신도, 일방적으로 희생을 떠넘긴 세상도, 사람들도. 그와 같은 마족조차도.
전부 갈기갈기 찢어서 도륙 내리라.
그렇게 다짐하던 세드릭의 머릿속에, 문득 과거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도 나는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세드릭.”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쓴웃음을 짓던 유스티나스.
“응! 나라면 응원할래!”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뜻을 존중해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아까 네가 말한 것처럼 말이야.”
또 경쾌하게 외치던 이즈미 폴리.
“만약 그 사람이 세드릭 네게 이해를 바란다고 했다면, 아마 널 소중히 생각해서 그런 걸 거야.”
세드릭은 마른세수했다.
“…틀렸어.”
이즈미 폴리는 틀렸다.
유스티나스는 그를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이즈-”
정말 숨이 끊어지고 있던 마지막 순간, 보고 있던 녹안의 용사.
그녀를 빼닮은 다정한 사내.
세드릭은 공허와 애정을 담아 유스티나스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해, 유스.”
너는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겠구나.
네가 좋아하는 사내와는 한참이나 떨어져 버렸으니.
그리고 네가 지키려던 사명도, 네가 그토록 경계하던 소꿉친구가 전부 부수어 버릴 테니까.
“…흐음.”
그 옆에서 세드릭의 변화를 지켜보던 레프는, 여전히 허공답보(虛空踏步)를 반복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군! 네가 안고 있는 이는, 네게 소중했던 자로구나.”
“…….”
“전하께도 있다고 들었다! 소중한 이가 죽었던 적이! 그래서 되돌렸다는군!”
이번에는 세드릭의 고개가 돌아갔다. 싸늘한 시체를 조심스럽게 품은 채였다.
“전하께서는, 궁금하다면 찾아오라고 하셨지!”
“그놈은 어디 있지?”
“서대륙이다!”
레프가 호탕하게 외쳤다.
“서대륙으로 가 그분의 밑에 들어가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
유스티나스의 사망 후, 세드릭의 눈에 처음으로 동요가 일었다.
레프는 그 사실을 눈치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검붉은 곱슬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어때. 나를 따라오겠는가?”
세드릭은 망설였다.
그가 망가뜨리고자 하는 대상에서 마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첫 순위라고 봐도 좋으리라.
그러나…….
척.
레프가 재촉하듯 손을 내밀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세드릭은 유스를 단단히 받치고는 한쪽 손을 뻗었다.
탁!
두 사람의 손이 잡힌 순간.
“…!”
그의 품에 안긴 유스티나스가 허공으로 화했다. 마족이 죽을 때처럼, 인간의 형체가 새하얀 성력이 되어 스러진다.
세드릭은 두 날개를 펼쳐 유스티나스의 잔해를 허겁지겁 쫓았다.
하나 그는 이미 마족. 상반되는 성력은 그에게 아픈 타격을 입힌 채 멀리 도망갈 뿐이었다.
“유스, 아, 제발…!”
두 번째 상실은 첫 번째 상실만큼이나 아팠다. 세드릭은 조여드는 목구멍으로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성력은 그의 애원을 무시하고 끝도 없이 올라간다. 하늘로, 저 멀리 빛나는 태양을 향해서.
그 모습이 마치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아이 같았다.
신에 반하는 검은 날개를 펼치고, 타락한 악마는 한참이나 신의 딸을 열망하다 아래로 추락했다.
지독한 절망이 그를 잠식했다.
***
그로부터 3일 후.
동대륙의 어느 숲에서, 신에게 사랑받는 소녀가 눈을 떴다.
“-어?”
앞이 보이지 않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