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17)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17화(17/101)
#17. 재회 (4)
세드릭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물었다.
“무엇입니까?”
“요즘 들어 옛날이 그리워요. 키에토에서 살던 때가요.”
숨이 턱 막혔다.
“십 년 전에 살던 집에서 큰불이 났거든요. 제 또래 아이 쉰두 명이랑 같이 살던 집에서요.”
“그렇, 습니까.”
“불타는 집에서 동생을 구하고 저도 나가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종종 그 순간이 떠올라요.”
평온한 어조였다.
“후회했거든요.”
“…어째서?”
“마지막에, 더 밝게 웃어 줄걸.”
세드릭은 충혈된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때 그 애를 많이 신경 썼거든요.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뭔가…….”
“…….”
“좋아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고저 없는 어조에, 세드릭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왤까요?”
그녀가 고해했다.
“세드릭 님과 함께 있으면, 자꾸 그 애가 떠올라요.”
그저 사실을 전하듯.
담담히.
“성녀님.”
세드릭은 숨을 들이켰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뛰는 심장에 귓가가 시끄러웠다.
눈앞이 어질거릴 정도로 온몸에 열이 오른다.
그는 차마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울렁이는 속을 잠재웠다.
“죄송해요. 너무 뜬금없는 고백이었나요?”
“아, 아뇨. 저는.”
“한 번쯤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었거든요.”
줄곧 앞만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감은 눈 너머로 푸른 눈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매일 다른 사람들의 고해를 듣지만, 제 고해를 들어 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미안해요.”
검은 눈에 파문이 일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명제였다.
유스티나스는 성녀다.
완전무결한.
그녀는 성녀로서 타인의 악의와 단점을 수용하며, 그들의 죄를 기꺼이 자애로 덮는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갑작스레 시력을 잃은 채, 10년 동안 성국에서 오로지 성녀로서 살아오며 힘들지 않았을까?
세드릭은 그녀를 천천히 살폈다.
웃는 낯은 여전히 고요했다.
빈틈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녀가 감내하는 일들은 한 사람이 짊어지기에 너무 과중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세드릭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듣겠습니다.”
“네?”
“그리고 그 눈.”
열기를 담은 시선이 유스티나스의 초점 없는 동공을 향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칠 겁니다. 반드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유스티나스가 이내 밝게 웃었다.
다만 그가 믿음직해서라기보단, 뭐라고 할까. “나 커서 용사가 될 거야!”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를 귀여워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저는 진심입니다.”
“물론 진심이시겠지요. 믿어요.”
…묘하게 열받는군.
한결같은 포커페이스가 이토록 얄밉게 다가올 수도 있던가. 세드릭은 불퉁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 세드릭 님.”
“예.”
“얼굴. 만져 봐도 되나요?”
“…예?”
그는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세드릭 님의 얼굴이 궁금해요.”
하나 이어진 말에 무심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탓이다.
‘…그렇구나.’
유스티나스는 맹인이다.
그렇기에 그가 옛날 그녀와 함께 살았던 ‘세드릭’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었다.
“만져 보시겠습니까?”
선선한 제안에 유스티나스가 눈을 다람쥐처럼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기쁜 낯으로 끄덕였다.
‘…뭐지?’
치명적으로 귀여웠다.
세드릭은 철렁 떨어진 심장을 숨기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맞닿은 손이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저절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 그만.’
세드릭이 눈을 꾹 감았다.
이, 이러면 무슨 닿는 것만으로 흥분하는 변태 같잖아.
심지어 상대방은 성적인 생각은 요만큼도 하지 않는 순결한 성직자다. 전신을 덮는 새하얀 예복은 그야말로 금욕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닿자마자 피가 몰린다고? 얼굴이 궁금하다는 성녀님을 상대로?
인간이면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진정하려고 애썼다.
그사이 유스티나스의 손이 그의 뺨 위로 올라갔다. 세드릭은 애써 심박을 가라앉히곤 그녀의 손을 이마 근처로 가져갔다.
“제 머리는 검은색입니다.”
“조금 기네요. 눈을 찌르는 것 같은데 불편하지 않아요?”
“…손질하겠습니다.”
머리를 어루만지던 유스티나스의 손이 이내 눈썹뼈를 지나 눈 근처로 내려갔다.
“세드릭 님, 경의 눈은 어떤 색인가요?”
“머리와 똑같은… 검은색입니다.”
그녀가 속삭였다.
“멋지겠네요.”
이어서 높은 코. 매끈한 뺨.
그리고 입술.
접촉한 체온이 유독 뜨거웠다. 유려한 손가락은 섬세한 손길로 윗입술을 더듬더니, 이내 엄지로 입술 전체를 쓸어내렸다.
세드릭은 붉어지는 낯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소 집요한 손길이 그의 입가를 훑었다.
꿀꺽.
그가 무심코 침을 삼켰을 때.
“생각보다 말랑하네요.”
“…예?”
“만지게 해 주셔서 고마워요.”
유스티나스의 손이 떨어졌다.
그는 기묘한 아쉬움에 잠겨 탄식했으나, 그 이상의 접촉은 없었다.
유스티나스는 다시 성실한 성녀로 돌아갔다. 세드릭은 아까와 같은 자리에서 기도를 시작한 그녀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내 달아오른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젠장.’
쿵, 쿵, 쿵, 쿵…….
도무지 진정되질 않는 심박에 숨이 차올랐다. 그는 한참이나 마른세수를 하며 조용히 흥분을 삭였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
나는 뒤돌아 앉아 눈을 감았다.
얼굴을 만져 보고 싶다는 수를 둔 건 심박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얼굴로는 거짓말을 해도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까지 숨기기는 힘든 법이니.
결과는?
‘당연히 성공이지.’
평시보다 맥이 3배 이상 빠르다.
특히 나와 접촉했을 때 반응을 살피면, 세드릭은 유스티나스를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만 문제는 역시…….
‘이게 나랑 닿아서인지, 아니면 여자랑 닿아서인지 조금 헷갈린단 말이야.’
속된 말로 여자 못 만나 본 20대 남자는 손만 잡아도 손주까지 상상한다지 않나. 솔직히 유스 같은 미녀라면 같은 여자라도 설렐걸.
흠.
‘상태창이 뜨면 좋을 텐데.’
왜 있잖아. 미연시 게임에 나오는 [세드릭의 호감도가 5 증가합니다.] 같은 문구 말이야.
안타깝게도 내가 가진 상태창은 퀘스트와 선행 포인트를 제공할 뿐 호감도 확인은 불가능했다. 당연히 남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다.
[독심술: 1,000,000p] [너의 마음이 들려.]생각하기 무섭게 상태창이 스킬 구매를 제안했다. 가격을 확인한 내 눈이 세모나게 변했다.
‘장난하냐.’
백만 포인트?
부활이나 투시 아이템보다 비싸다는 건 그냥 사지 말라는 거다.
애초에 상태창이 파는 스킬 가격은 꽤 기이한 면이 있었다.
십만 포인트인 엑스트라 라이프보다 무통각증이 두 배나 비싸다거나. 처음에는 이유를 잘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는 대충 짐작이 간다.
스킬 가격은 즉 효용.
상태창은 포인트와 가격을 임의로 설정해, 각 퀘스트의 난이도를 조정하고 있다.
나는 기도하던 손을 들어 조용히 내 눈가를 덮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앞을 볼 수 있다. 앞뿐만이 아니다.
내 등을 바라보고 있는 세드릭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통로를 지나다니는 사제들이 어떤 손짓을 하고 있는지도 보인다. 거금을 들인 투시 스킬 덕분이었다.
‘부끄러워… 하는 건가?’
빨갛게 변한 세드릭을 보는 건 꽤 묘했다. 상대가 저렇게 구니 별생각 없이 했던 행동들이 괜히 의식되는 탓이다.
입맛이 썼다.
‘나쁜 짓을 하는 거겠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건 옳지 못하다. 성녀로서는 당연하고 인간으로서도 못된 일.
그래도 어쩌겠어.
세드릭을 믿을 수는 없다.
“네가 마음에 든다, 이즈미.”
원작 속 세드릭은 태연한 표정으로 모두를 속였다.
더욱 무서운 사실은 그가 보여 주었던 호의가 진짜였다는 점이다. 그는 진심으로 주인공 이즈미와 동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고… 또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도 배신했다.
‘물론 내가 살아 있으니 배신할 가능성이 낮아지긴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를 사랑에 빠뜨리는 것이다.
원작 속 세드릭은 주인공을 배신했어도 자신이 만든 그림자 낙원은 사랑했다.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와중에도 그들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사랑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니 목표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것.
기준은, 흠. 그래.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나를 위해 세계를 구해 줄 정도면 되겠다.
상념 속에서 기도를 마쳤다. 줄곧 대기하던 세드릭은 다시 평소처럼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온 채였다.
“이만 가시지요.”
“세드릭 님.”
내 부름에 발걸음이 멈춘다.
“제가 오늘 상태가 좋지 않아서요. …손, 잡아 주실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