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18)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18화(18/101)
#18. 용사, 이즈미 (1)
꽤 치사한 부탁이었다.
어리광 한 번 부리지 않는 성녀가 이렇게 말하는데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예상대로 세드릭은 주저하면서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물론 나는 가만히 있는다.
여기서 그냥 손을 잡아 봐야 가짜 맹인이라는 티밖에 더 나겠는가.
연기 경력 어언 10년. 이 정도 함정에는 넘어가지 않는단 말씀.
한참을 가만히 있자 세드릭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모시겠습니다.”
잡은 손이 단단했다. 얼굴을 만질 때와는 또 다른 감각이다.
그의 손에 조심스럽게 이끌려 가면서, 나는 약간의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손이 차가우시네요.”
“…아, 그게. 불쾌하셨다면…….”
“손이 차가우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던데. 세드릭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가 입을 벌렸다 닫았다.
“동의는 못 하겠습니다.”
“왜인가요?”
“전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뭐 인마.
내가 좋은 어른이 되라고 유언(아님)도 남겨 줬잖아. 대체 10년 동안 뭘 한 거야.
…그래도 이걸 대놓고 말할 순 없으니, 나는 그를 잡은 손에 힘만 조금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좋은 사람이 되면 되겠네요. 그렇죠?”
“…예?”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스스로가 정하는 거랍니다.”
내가 씩 웃었다.
“좋은 사람이 돼 주세요, 세드릭.”
그의 얼굴이 멍해졌다.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하다.
“…성녀님.”
“네에.”
“사실, 제가, 사실…….”
응. 응!
금방이라도 비밀을 털어놓을 것 같은 태도에 내 눈이 반짝였다.
“사실 제가…….”
옳지. 잘한다! 그거야!
“말하지 못했던 일이-”
“성녀님!”
아이 시X.
무심코 튀어나온 욕설은 묵언으로 필터링되었다. 이제는 ‘성스러운 말투’로 진화한 ‘상냥한 말투’의 자동 필터 효과였다.
“에릭 사제님?”
“성하께서 찾으십니다. 서둘러 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짜증을 삭이던 나는 용건을 듣곤 입을 다물었다.
‘제피로스가 부른다고.’
그에게 세드릭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지가 바로 얼마 전.
당연히 원작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건이라 꽤 골이 아팠다.
‘…이번에는 맞겠지?’
시기가 시기이지 않은가.
만약 여기서 제피로스가 또 다른 화제를 꺼낸다면, 차라리 내 쪽에서 선수를 쳐야겠다.
***
방으로 들어가자 기쁨에 젖어 있는 제피로스가 보였다.
“성녀님! 제가 방금 에테르 님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리 모호한 꿈이 아닙니다.”
차분한 그가 이렇게 흥분하는 일은 몹시 드물다. 그는 진심으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영광과 감격에 취해 있었다.
‘이게 성직자?’
믿는 척만 하는 나와는 다르다. 나와는.
하지만 여기선 이렇게 말해 줘야지.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정말이십니까?”
아니. 구라야.
“에테르 님의 총애를 받으시는 분답습니다!”
…흠흠.
나는 민망한 마음을 달랬다.
“별이 내린 검이 한 사내를 찾아갈 테니, 그를 세계를 구할 용사이자 나의 대리자로 명한다. …그런 예언이었지요?”
“세상에.”
그가 입을 벌렸다.
“제가 들은 것과 정확히 똑같습니다.”
……그야 원작에서 네가 들었던 문장을 읊은 거니까. 똑같지 않으면 이상하지.
“한데 이것 참 곤란하군요. 별이 내린 검을 받은 사내라. 대륙 어디라는 말이 없었으니 찾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아, 그거라면 짚이는 구석이 있어요.”
“예? 정말인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국의 폴리 남작. 그분의 막내아들이 예언에 나오는 사내입니다.”
“성녀님은 제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전부 알고 계시는군요. …역시 지난번 꿈은 예언이 아니라 그냥 제 느낌이었을까요?”
아냐. 원작 봤어.
그 꿈은… 글쎄?
그 ‘검은 머리 사내’가 세드릭인 걸 생각하면 진짜 같긴 하다.
확실히 가짜인 나보다 진짜 성직자인 쪽이 타율이 높군.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면 다행이군요. 지국이면 이곳과 크게 멀지 않으니, 성기사들을 보내 그를 맞이해야겠습니다.”
“아니요.”
나는 흥분해 말을 쏟아 내는 제피로스를 막았다.
“그분은 제가 직접 맞이하러 갈 생각입니다.”
“예? 성녀님이 직접이요?”
“네.”
“하지만…….”
“신이 선택한 분이라면, 당연히 제가 찾아가는 게 도리에 맞겠지요.”
내 발언에 제피로스는 ‘역시 성녀님은 책임감이 대단하셔!’ 같은 표정이 되었다.
물론 내 속셈은 책임감 같은 대단한 게 아니다.
그냥 그거지. 그거.
‘어떻게 이 기회를 놓치겠어?’
세계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
세계를 구할 영웅.
그리고-
‘퀘스트 버스 운전기사!’
나는 눈을 빛냈다.
내 포인트 수급 발전기를 찾으러 갈 시간이다.
***
유우시 이즈미(勇士 泉).
28세.
어디에나 있는 평범하디 평범한 의사인 그는, 응급실에서 48시간 철야 이후 급성 심근 경색으로 숨졌다.
이윽고 다시 태어난 그는-
“축하드립니다, 남작님! 건강한 아드님입니다.”
“응애애애!”
이세계 말단 귀족가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우리 집에 와 주어서 고맙구나. 이즈미. 건강하게 자라 주렴.”
자상한 아버지. 현명한 어머니. 우애 깊은 두 형.
따뜻한 가정이었다. 전생(轉生) 이후 방황하던 이즈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던 것도 그들의 덕이 컸다.
그렇게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무럭무럭 자라, 환생한 지도 어느덧 21년.
스물하나가 된 이즈미는 한량처럼 나무 위에 누워 생각했다.
‘이세계 *모브 캐릭터로 21년. 뭐, 나쁘지 않은 삶이지.’
*모브: 군중(mob)에서 유래한 신조어로, 엑스트라 속성 캐릭터를 의미한다.
부모님은 상냥하고, 나이 터울이 큰 두 형은 동생을 지극히 아낀다. 가문은 맏형이 이을 테니 그는 평생 이렇게 한량으로 지내도 괜찮은 것이다.
게다가 폴리 남작령은 한없이 평화로웠다. 테라 전체가 전염병으로 들썩일 때조차 진통 하나 없이 지나갈 정도였다.
자국 내에 성녀가 나타났다느니, 왕자님이 개망나니가 되어서 여성 승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느니 하는 일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런 건 세계의 주역들이나 하는 일이다. 자신처럼 눈에 띄지 않는 모브가 나설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마음 한구석에는 줄곧 불편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유우시 이즈미였던 대학생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대에 들어갔다.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들이 너무 멋져 보였다. 그들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막연한 동경으로 가슴이 설렜다.
하나 막상 들어간 의대는 너무 힘들었다. 들어갈 때도 쉽지 않았지만 졸업하는 건 더 어려웠다.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하고, 복습하고, 시험을 보고, 그런데 졸업 이후가 진짜였다.
환자를 살리는 슈퍼 외과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현실 앞에서 무너졌다. 젊은 초짜 의사인 그가 응급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매일 사람이 죽는다.
환자가 죽으면 가족들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가장 두려운 건 아이가 실려 올 때였다.
채 피지도 못하고 지는 아이들. 찢어질 듯 오열하는 부모.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의사는 신이 아니다.
그는 용사가 아니었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도 감히 그만둘 수는 없어서 열심히 노력하다- 죽었다.
다시 태어나며 유우시(勇士, 용사)라는 성을 잃어버렸을 땐 솔직히 기뻤다. 별로 좋아하는 이름은 아니었으니까.
신경 쓰이는 건 오직 홀로 남았을 동생이었다.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아, 오빠. 오빠는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줄곧 함께 의지하며 살아왔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에 스무 살부터 취직해 묵묵히 학비까지 지원해 주었다.
“안나.”
무심코 동생을 부른 이즈미는 깊이 후회했다. 새로 태어난 지 21년이 지났음에도 사무치는 그리움이 솟구친 탓이다.
분명 이 삶은 훌륭하다.
가난했던 전과 달리 엑스트라긴 해도 부유한 귀족가. 커다란 저택. 화목한 가정. 평화로움.
유우시 이즈미보다는 이즈미 폴리가 몇만 배는 행복하다.
그런데도 이즈미는 여전히 집이 그리웠다.
돌아가고 싶었다.
‘무리겠지.’
그 몸은 죽었잖아.
체념의 빛이 완연한 낯으로, 그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지구와 달리 이곳의 하늘은 맑고 쾌청하다. 언제 어디서든 쏟아지는 은하수와 유성을 볼 수 있다.
그는 손을 쭉 뻗었다.
그렇게 하면 마치 별을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어?”
떨어지는 유성이 점점 커졌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떨어진 유성은 불덩이가 되더니 그가 있던 나무 바로 아래에 꽂혔다.
그는 화들짝 놀라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나무 바로 옆에는 환하게 빛나는 물체가 단단히 꽂혀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보니 검이었다.
“이게 무슨.”
이즈미는 아연해져 검을 손에 쥐었다. 신기하게도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전혀 뜨겁지 않았다.
오히려 찬란히 빛날 뿐.
별을 손아귀에 쥔 듯한 감각이었다. 그는 반대 손으로 날을 훑었다.
Holy Comet
“성유성(聖流星)?”
검신에 선명히 적힌 글자를 입에 담은 순간이었다.
[메인 퀘스트]세상을 구하시오.
진행도: 0%
보상: 귀환
녹빛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