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19)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19화(19/101)
#19. 용사, 이즈미 (2)
“따르겠습니다.”
지국으로 떠나겠다는 말에 세드릭은 곧장 답해 왔다.
“잘 부탁드려요.”
굳이 빼지는 않았다.
어차피 세드릭은 내 호위로 의뢰를 받은 입장인데다, 가만히 있어도 세계를 구하는 주인공과 달리 이쪽은 가만히 있으면 핵폭탄을 터뜨리는 악당이 되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눈을 뗄 순 없지.
‘생각보다 만남이 이르긴 했지만.’
원래 세드릭은 용사 파티에 들어오라는 신전의 의뢰를 받고 등장한다. 날짜는 이즈미가 신전에 정착하고 한 달 뒤쯤?
그런 그의 등장이 이토록 빨라진 건 원작에 없는 “성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세드릭을 힐끔 보았다.
그는 등에 뭔가 아주 많이 짊어지고 있었다.
“저… 세드릭 님?”
“예.”
등에 그거 다 뭔데.
에베레스트 하이킹 가냐?
-라고 말할 순 없다.
지금 난 맹인.
저걸 볼 수가 없거든.
나는 대신 발을 헛디딘 척 한쪽 손을 뻗었다. 세드릭의 짐을 만져 눈치챈 척하기 위해서다.
내 공격을 받아라!
“조심하십시오.”
는 장렬히 실패했다.
세드릭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내 몸을 잡아챘다.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감사해요.”
“아닙니다.”
왜 이렇게 빡치지.
어릴 적에는 동글동글 귀여웠는데 다 큰 세드릭은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기까지.
‘그래도 잘됐어.’
용사를 데리러 가는 인원은 나와 세드릭. 마르스와 에이미를 포함한 몇 명이 전부다.
그사이 세드릭과 같은 마차를 타서 열심히 자극해 주겠어.
확신이 필요하다.
그가 주인공을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가 죽어도 나를 위해 세상을 구할 것이라는 확신.
내가 죽은 뒤는 왜 걱정하냐고?
‘혹시 모르잖아.’
유스티나스가 죽어도 내 퀘스트가 계속될지.
세드릭은 내가 ‘구한 사람’이기에 그가 세상을 구한다면 퀘스트 완료 조건을 달성하기 충분했다.
아니면 (딱히 본의는 아니었지만) 지난 10년간 했던 짓처럼 다시 죽은 척을 해 볼 수도 있다.
어쨌든 모든 상황을 대비하는 게 대학원생의 미학인 법. 교수님 발닦개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필수다.
“언니! 얼른 이쪽으로 와요.”
그러나 내 장대한 계획은 에이미에 의해 틀어질 위기에 처했다.
“…응?”
“설마 저런 시커먼 남자분과 같은 마차에 탈 생각이었어요?”
내 팔을 잡은 에이미가 세드릭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응시했다.
대놓고 받는 적의에도 세드릭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가 눈을 끔뻑거리며 말했다.
“나는 성녀님의 호위다. 당연히 같은 마차를 타야지.”
“윽.”
“아니면 네가 성녀님을 직접 호위할 생각인가?”
그 팔로?
가소롭다는 덧붙임에 에이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라고?”
“흥.”
“와, 언니! 저 남자 좀 보세요! 진짜 완전 재수 없다니까요?”
“성녀님, 가시지요.”
세드릭은 길길이 날뛰는 에이미를 두고 내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에이미가 폭발했다.
“야!”
세드릭은 답하지 않았다.
귀마개라도 낀 듯한 무대응에 껄끄러워지는 건 나뿐이었다. 다행히 성기사 대열에 합류해 있던 마르스가 그런 딸을 말렸다.
“진정하거라, 에이미.”
“하지만 아버지.”
“저자의 말이 옳다. 가뜩이나 마차도 좁지 않으냐.”
에이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나, 아버지의 반듯한 만류에 조금 화를 삭였다. 나는 그런 에이미를 돌아보며 웃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세드릭 님은 좋은 분이신걸.”
“그건 언니가 세상을 너무 좋게 봐서 그래요.”
꿍얼거린 에이미가 곧 내 뒤를 따르는 마차로 들어갔다. 옆에 남아 있던 마르스가 세드릭에게 말했다.
“그럼 성녀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지.”
세드릭은 고개를 까딱였다.
…흠. 확실히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하는 태도를 보면 재수 없긴 하다. 저러다 나중에 내가 또 없어지면 “세상을 날려 버리겠어.”라며 폭탄 개발에 착수할지도 모른다.
나는 세드릭의 소매를 약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가 곧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성녀님?”
무뚝뚝하나 다정한 시선이다.
“세드릭 님, 다른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해 주세요.”
“…그게…….”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세드릭 님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그렇죠?”
갑작스런 물음의 대상이 된 마르스는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봐요.”
내 말을 들은 세드릭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안 먹히나?
곤란하네.
이렇게 조금 조금씩 세드릭의 행동을 교정할 참이었는데.
“제가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는 게, 성녀님께 도움이 되겠습니까?”
“네?”
“그렇다면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눈(특: 안 보임)을 깜빡일 차례였다.
‘이게 맞나?’
일단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한데, 내게 도움이 되면 타인에게 친절히 대하겠다는 선언에는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나 빼고 모두한테 싸가지 없이 하는 것보단… 낫나?’
나은 거 맞겠지?
***
이즈미는 고민에 빠졌다.
“세계를 구하라고?”
원인은 다름 아닌 퀘스트 때문이다.
허공에서 떨어진 검을 손에 쥔 순간부터 나타난 푸른 창은 원할 때마다 깜빡이며 눈앞에 나타났다.
전생에 봤던 애니메이션의 기억에 의존해 커다란 목소리로 “스테이터스!”나 “상점 창!” 따위를 외쳐 보았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건 오로지 저 단순한 퀘스트창 하나뿐이었다.
“이걸로 대체 뭘 하라는 거야!”
다짜고짜 세계를 구하라니. 그것도 아무런 이정표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성유성 하나뿐.
그는 신성한 흰빛을 띠는 검을 매만졌다. 그럴 때마다 그가 전생에 가졌던 이름이 계속 떠올랐다.
유우시(勇士). 용사.
‘이런 판타지 세계에서 세상을 구하는 건 결국 마왕을 물리친다는 전개인데.’
용사가 되어 마왕을 무찌른다.
워낙 고전 클리셰라 요즘에는 잘 쓰이지 않지만, 그래도 전통 게임에서는 자주 나오는 설정이었다.
주로 시골에서 농사나 짓던 평범한 소년이 갑자기 신의 선택을 받아서 모험을 떠나거나 하지. 옆자리는 은발 성녀, 엘프 궁수, 까칠한 암살자, 냉미녀 마법사, 덩치 큰 의리파 형님 같은 동료들로 채우고.
…잠깐. 성녀?
“성녀라면 있잖아.”
아무리 한량으로 지내도 귀족으로 살다 보면 들리는 소문이 있다.
그는 요전에 아버지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국왕 전하께서 아이기스로 귀화하겠다는 국민들을 전부 보내 주라고 하셨다더군.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야. 아쿠아와 힘을 합쳐 인구 유출을 막는 게 국익인 것을.”
“왜 이민을 원하는 건가요?”
“성녀 때문이지. 직접 그 기적을 목도한 이들은 결코 불신론자가 될 수 없다던가.”
“성녀!”
그가 벌떡 일어났다.
‘성녀가 있으면 용사도 있어.’
당연한 거다.
용사와 성녀.
수많은 RPG 게임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한 세트로 등장하는 조합.
용사만 있는 게임은 있어도 성녀만 있는 게임은 없다. 성녀가 있다는 건 즉 용사 역시 언젠간 나타난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는 전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이런 퀘스트를 받은 데다 대놓고 성검 같은 검까지 손에 넣었는데 흥분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속으로 조급함을 삼켰다.
[메인 퀘스트]세상을 구하시오.
진행도: 0%
보상: 귀환
그는 지금 그가 나고 자란 폴리 남작 저택에 있다.
그렇다면 저 귀환은 필시 지구로의 귀환을 의미한다.
과연 죽은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설령 유우시 이즈미가 될 수 없어도 상관없었다.
이 몸으로라도 좋아.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면.
“…결심했다.”
그는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기스에 가야겠어.”
클리셰대로라면 분명 성국에 예언 비슷한 게 내려왔을 것이다. 그럼 그는 교황과 성녀에게 자신이 바로 그 예언의 용사임을 증명하면 되었다.
증명 수단은 간단하다.
Holy Comet
그가 손에 쥐는 순간 은은하게 빛나는 이 검.
‘누가 봐도 성검이야.’
평소 신앙심이 깊은 편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로 방대한 신성력은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말씀드리자.’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환생 이후 평생을 무료하게 살아왔던 이즈미의 심장이 처음으로 두근대기 시작했다. 삶의 목적을 찾았다는 기쁨과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이었다.
그는 방을 뛰쳐나가 부모님이 계신 홀로 뛰어갔다.
“아버지, 어머니!”
소자 용사가 되러 출가합니다!
-라고 외치려던 이즈미는, 저택 앞에 서 있는 사제들을 보며 멀뚱해졌다. 그들을 마주하던 아버지가 이즈미를 보더니 서둘러 말했다.
“저 아이가 내 아들이오!”
“아부지?”
이게 무슨 상황이죠?
뇌에 과부하가 온 이즈미가 멍청히 서 있던 무렵, 그를 등지고 있던 여성이 뒤돌았다.
“저분이시군요.”
“…!”
그녀를 마주한 이즈미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눈부신 은발.
목에 건 로사리오.
전신을 가린 금욕적인 예복.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만면에 띤 자애로운 미소와 충격적인 미모였다.
그는 보자마자 깨달았다.
“성녀…?”
“네, 제가 성녀랍니다.”
생긋 웃는 모습조차 성스럽다.
이즈미의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환했던 낯은 어느새 황홀경에 젖어 멍해졌다.
성녀는 그런 그에게 다가왔다.
“이즈미 폴리 님.”
내밀어지는 손.
손등까지 덮고 있는 하얀 천마저 고귀하다.
그의 귀에 신의 자비와 같은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디 저와 함께 떠나 주세요.”
고민은 필요 없었다.
이즈미는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용사가 태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