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25)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25화(25/101)
#25. 왕자의 머리를 열면 (6)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오해가 풀린 건 간신히 일어난 내가 간단한 해명을 마친 뒤였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간 오라버니가 마족에게 세뇌되어 있었다는 건가?”
“맞아요.”
내 대답을 들은 디올드는 멀거니 눈을 깜빡였다.
“세뇌? 내가?”
“이상하지 않으셨나요?”
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야만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거예요. 그 순간에는 그게 옳다고 믿지만, 사실은 아닌.”
“……그러고 보니.”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상해. 내가 왜 그런 천박한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어. 아….”
디올드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회상하는 듯했다. 말을 잇던 그가 돌연 벌게진 얼굴을 파묻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부모님과 백성들을 볼 면목이 없어. 왕국의 기둥이 되어야 할 국본이 나약하게 사술 따위에 현혹되다니.”
“…디올드.”
릴리아나가 그런 디올드를 혼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할 만도 했다.
릴리아나는 오라비를 경멸했다.
왕세자로 태어나 백성을 함부로 겁탈하고 살해하는 행동을 참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디올드가 피해자였다니?
‘나 같아도 혼란스럽지.’
한편 세드릭은.
“…….”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디올드가 나를 해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자 그는 순식간에 디올드에게서 관심을 꺼 버렸다. 놀랄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대신 그는 커다란 셰퍼드처럼 내 옆에 앉아 묵묵히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그러다 간혹 집중하고 있다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나를 맹인으로 알고 있을 텐데도.
“하면 성녀님. 그 마족을 서둘러 축출해야 하겠군요.”
“그렇죠.”
“분부만 내려 주십시오. 언제든 성녀님의 검으로서 쓰레기 같은 마족을 척결하겠습니다.”
라고 마족인 세드릭(특: 본인은 모름)이 말했다.
“음, 맞아요. 하지만 마족을 베기 이전에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는데…….”
내 시선이 디올드에게로 향했다.
그는 여전히 심신미약 상태였다. 세뇌가 풀린 뒤 루비처럼 맑아진 붉은 눈이 수치심과 죄책감을 담고 사정없이 떨렸다.
“디올드 님.”
“예, 예?”
그가 튀어 오르듯 답한다.
“무슨 일이시죠?”
순식간에 순해진 모습이다.
존대로 바뀐 호칭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혹 걸리는 점은 없으실까요.”
“걸리는 점…… 아!”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외쳤다.
“개인적으로 불법 노예 상단을 후원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 여자, 아인종을 붙잡아 들여 노예로 파는…… 부끄럽기 그지없군요.”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스승이 되어 준 비야 공작마저 끌어들였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청렴했던 그를 제가 더럽힌 셈이 되겠군요.”
“아. 걱정하실 필요 없답니다.”
내가 빙긋 웃었다.
“저하를 세뇌시킨 마족이 사실 비야 공작 각하시거든요.”
“…네?”
그는 잠시 멈췄다.
깜빡. 깜빡.
막 전원을 켠 컴퓨터가 데이터를 찾듯, 현재 상황을 파악해 보려 애쓰는 모습이다. 하나 총명한 본래 디올드는 곧 내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 그럼 큰일입니다! 만약 제가 세뇌에서 벗어났다는 걸 그가 알아챈다면 증거를 인멸하려고 노예들을 한 번에 몰살할지도…!”
“진정해라, 디올드.”
여전히 혼란에 잠겨 있던 릴리아나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오랜만의 접촉이다. 두 사람은 서로 움찔거리며 눈을 마주쳤다.
“왕세자인 너를 세뇌시켰다는 건 분명 특정한 목적이 있을 테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과연 그자가 약간의 의심만으로 10년간 이뤄 놓은 권력을 포기할까?”
“아…….”
그가 탄식했다.
“네 말이 맞아.”
릴리아나에게 동의한 그는, 잠깐의 침묵 후 머리를 쓸어내렸다.
“못 본 사이에 네 생각도 많이 성숙해졌구나. 릴리아나.”
“매일 봤는데 무슨 소리지.”
“본다고 해서 생각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안 그런가?”
뼈 있는 말에 릴리아나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 디올드는 고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네가 후계자인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 유약한 나보단.”
“……여자는 왕이 될 수 없어.”
“그렇지. 의미 없는 가정이야.”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저하, 비야 공작입니다. 안이 소란스러운 듯한데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씁쓸함과 회한에 잠겨 있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디올드였다. 그는 독 안에 든 생쥐처럼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저하. 저하?”
문 너머에서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뇌가 풀린 디올드의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나는 몇 번 허공을 더듬은 뒤 그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곤 속삭인다.
“저하.”
움찔.
“성녀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세요.”
“그건 너무 불경한…….”
“어서요.”
내 재촉을 들은 디올드가 몇 번 헛기침했다.
“바, 방해하지 마라! 지금 한창, 헉, 즐기고, 헉, 있으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지요, 왕세자 저하.”
긴장해서 헐떡인 숨 덕분에 연기가 리얼해졌다. 소리만 들으면 정말 해피 타임 같은 느낌이었다.
릴리아나의 얼굴이 식었다.
“…작전인 건 알지만, 네가 헐떡이는 소리는 솔직히 더럽군.”
“…미안하다.”
***
리카르도 비야.
테라의 재상이자 왕세자의 스승인 그는, 사실 마왕군 창천(蒼天) 휘하의 상급 마족이었다.
‘세뇌가 잘 진행되는 모양이군.’
왕세자의 헐떡이는 목소리를 확인한 리카르도는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성녀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뭐, 세뇌된 왕자의 취향이 어디 조금 마니악하던가. 재갈이라도 물려 둔 모양이라고 생각한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성녀의 등장이라. 지금은 왕세자로 어찌 눌러 두긴 했지만 상당히 귀찮을 수 있겠어.’
지금까지 이어진 역사만 보아도 성인의 등장은 언제나 성가셨다.
나락까지 처박아도 아득바득 기어 들어오는 종자들. 종차별주의 사상으로 만연한 성인들은 마족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는 당장 오백 년 전에 나타났던 성녀를 떠올렸다.
리카르도가 막 태어났을 시절.
그때는 지금과 반대였다. 마족이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이 그 사이에 애써 숨어 살던 시절.
어린 리카르도는 귀족 가문의 사랑받는 막내로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성녀가 모두 망쳤다.
“저들은 악입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방법은 오직 주님의 곁으로 돌려보내는 것뿐.”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성녀는 노예 취급을 받던 인간들을 하나로 모아 땅을 점령했다.
“리카르도, 걱정 마라. 이 형님이 반드시 성녀를 쓰러뜨리고 영지의 평화를 되찾으마.”
그렇게 말하고 출전한 형은 하루 만에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화했다.
어쩔 수 없었다.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제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눈앞의 마를 가장 고통스럽게 절멸하소서.”
그녀의 기도 한 번. 숨결 한 번에 구인류는 무력히 쓰러졌다.
아니, 구인류조차 아니었다.
성녀는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마족을 모조리 멸하세요. 주님께서 이를 원하십니다.”
그때부터였다.
고인 원소 속에서 탄생하며, 원소의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그들은 마족(魔族)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루던 원소의 힘은 사특한 마력(魔力)이 되었고 인간의 부정적 감정으로 이루어진 식사는 그들만의 사특한 특성으로 전락했다.
세계가 뒤집혔다.
많은 동족이 죽었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몇몇뿐.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리카르도는 스스로 마왕군 사천(四天) 중 창천의 수하를 자처했다.
그의 목표는 하나.
사악한 신인류를 말살하고 이전의 낙원으로 되돌리는 것.
‘그러기 위해선 각국의 수뇌부를 마족으로 가득 채우는 게 먼저다.’
특히 중앙 집권 체제에 군주제인 동대륙은 서대륙에 비해 지배하기 수월했다.
왕세자 하나를 세뇌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들였던가. 오래전부터 얼굴을 바꿔 가며 공을 세워 공작의 위치까지 올라와 드디어 왕세자의 스승이 되었다.
그는 씩 웃었다.
‘얼마 안 남았어.’
왕세자가 보위에 오르는 순간 측근을 전부 마족으로 갈아 치울 것이다. 그렇게 이 나라는 서서히 이전의 낙원으로 돌아간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아, 공작 각하! 여기서 뭘 하고 계셨나요?”
“…폴리 군?”
상념은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 의해 끊어졌다.
뒤를 돌자 접시에 디저트를 채운 이즈미 폴리가 순박하게 웃고 있었다. 몹시 멍청해 보이는 인상이다.
“잠시 왕세자 저하의 방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잘됐네요!”
그가 해맑게 웃었다.
“저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거든요.”
“예? 아니, 왜요?”
“성녀님이 거기에 계신 것 같아서요.”
말문이 턱 막혔다.
“왕세자 저하께선 혼자 계십니다. 아니, 그보다 왕세자궁에는 함부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녀님이 그쪽으로 가시지 않았나요? 냄새가 나는데…….”
“…냄새?”
무슨 냄새?
“아! 성녀님한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나거든요. 5km 안팎이라면 충분히 찾을 수 있어요.”
“…예?”
뭐야 이 변태 새끼는.
리카르도의 표정이 썩었다.
‘미친놈 아냐?’
왕세자는 그가 세뇌라도 시켜서 그 지경이 된 거지, 이놈은 그냥 본래 인격이 저런 것 아닌가.
냄새로 여자를 쫓아간다는 돌아 있는 발언에 리카르도가 속으로 ‘아 이건 좀’을 외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이즈미가 따라왔다.
“그런데 공작 각하.”
“예, 예?”
덥썩.
팔이 순식간에 붙잡힌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새 가까워진 거리에 리카르도가 침을 꿀꺽 삼켰다.
공작으로 알려진 자신을 함부로 공격할 리는 없지만, 만약 이 녀석이 진심으로 그를 죽이려 든다면 절대 저항하지 못한다.
“무슨 일로…….”
“왜 거짓말하세요?”
투명한 녹안이 그를 직시했다.
어쩐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