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28)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28화(28/101)
#28. 노예 시장 (3)
세드릭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며 지시를 따랐다.
하나 네 번째로 마주하는 환풍구 칸 바로 앞에 정말 경비병 하나가 서 있는 걸 봤을 때부터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경악을 감추며 경비병을 때려눕혔다.
“끄억!”
기절한 경비병을 환풍구에 쑤셔 넣은 세드릭은 그가 쓴 모자와 장비로 위장했다.
훔친 유리병은 품 안에 소중히 간직한 채였다.
“어이, 신참!”
세드릭은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리바리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 따라와. 지금 갓 잡힌 노예 하나가 탈출해서 제정신이 아니라는 모양이니깐.”
“노예가?”
“그래. 괴물처럼 철창을 구부려서 나갔단다. 혹시라도 순찰 돌다 수상한 놈 발견하면 바로 신고해.”
“알겠습니다.”
그는 수긍하며 고참 경비병을 따라 이동했다.
그때였다.
=세드릭 님. 당황하지 말고 잘 들어 주세요.
갑작스레 귓가에 퍼지는 유스티나스의 목소리에, 세드릭의 신체가 부자연스럽게 멈추었다.
“신참?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닙니다.”
그는 침착하려 노력했다.
=조금 이따 경매장에 올라갈 사람을 구할 텐데, 자원해요. 그러면 아까 있던 4층으로 다시 돌아가 노예들을 인솔하게 될 거예요.
“참. 조금 이따 경매장에 올릴 노예들을 인솔해야 하는데. 신참 너도 한번 해 볼 텐가?”
“…예.”
“좋아. 그럼 지하 4층으로 내려가자. 인솔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고참은 흔쾌히 말하며 지하 4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들였다.
횃불로 밝혀진 지하는 어두컴컴했다. 세드릭이 침을 삼켰다.
이어지는 유스티나스의 지시.
=4층에 도달하면 경비를 제압하고 노예들을 탈출시켜요. 그리고….
“자, 여기가 4층이야. 이다음에는 열쇠로- 끄억!”
깡!
주먹으로 고참의 머리를 후려치자 쇳소리와 함께 쓰러진다.
=미리 준비해 드린 마법 스크롤을 발동시키면 된답니다.
세드릭은 재빨리 마법 스크롤을 꺼냈다.
유스티나스가 직접 제작한 스크롤은 복잡한 문양으로 빼곡했다. 마법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발동만 겨우 시킬 뿐인 고급 마법이었다.
‘무슨 마법이지?’
의문도 잠시.
일련의 내용으로 유스티나스를 신뢰하게 된 세드릭은 망설임 없이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퍼버버버벙!
강렬한 폭발음이 지하를 메웠다.
***
“티켓 확인했습니다. VIP석으로 모시겠습니다.”
비야 공작에게 표를 받은 이즈미는 손쉽게 손님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갈색 머리와 녹색 눈. 지극히 흔한 조합에 아무도 그가 세간에 화제가 되는 용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매가 시작되면 몰래 나가서 문을 열라고 하셨지?’
티켓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이즈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 반 이상을 가린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둑한 회장과 자리마다 놓인 샴페인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퇴폐업소를 연상시켰다.
“끙….”
이런 건 불편한데.
비록 지난 21년을 한량처럼 보냈으나, 이즈미는 타고나길 정도(定道)를 걷는 모범생이었다. 그런 선천적 기질은 전생(轉生)을 거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저런 게 좋을까?’
사람이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핑거 푸드는 어느 것으로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됐습니다. 당기지 않네요.”
다가온 웨이터를 물린 이즈미는 한쪽 턱을 괸 채 무료하게 텅 빈 무대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온통 유스티나스뿐이었다.
“누가 뭐래도 이즈미 님은 주님께 선택받은 용사예요. 저는 이즈미 님을 전적으로 믿어요.”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유스티나스는 정말 신묘하다.
언제나 온화하고 상냥한 태도.
누구나 발끈할 법한 도발을 들어도 화를 내기는커녕 상대방을 자애로 감싼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더해서 그녀의 행적을 알게 되는 순간 그저 저 사람은 태생부터 고귀하구나, 하는 마음으로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운 나머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의심마저 든다.
그도 그런 게, 온통 선의로만 뭉친 인간이 진짜로 존재하는 게 말이나 되냔 말이다. 쉬운 길과 옳은 길 중 후자를 선택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보통 눈을 감은 캐릭터들은 흑막이고…….’
한없이 선해 보이는 교황이나 성녀가 흑막이라는 공식은 이제 와선 클리셰가 되어 버렸다. 이즈미는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쳤다.
‘사실 앞도 볼 수 있는 거 아냐?’
알고 보니 연약한 성녀님이 모든 걸 조종하는 계략 캐릭터라든가.
“뭐, 그럴 리가 없지.”
유스티나스가 성녀가 된 지 10년이라고 한다.
사람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맹인인 척 연기하고 살겠는가. 대학원생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는 머리를 감싸며 의자에 털썩 기댔다. 솜털 같은 갈색 머리가 정전기로 삐죽삐죽 일어났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첫 경매가 잠시 뒤 이어질 테니 주목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더니 사회자가 등장했다. 이즈미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폭발음, 폭발음, 폭발음…….’
온 신경을 청각에 쏟는다.
잔 부딪히는 소음. 부스럭거리는 움직임.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떠드는 이야기. 나지막한 소리로 나누는 추잡한 대화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운 소음들 한가운데서, 지하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폭발음이 들렸다.
이즈미는 눈을 번쩍 떴다.
“뭐지?”
“약한 지진인 듯하네.”
“별다른 일은 없겠죠?”
테라는 지진이 잦은 나라다.
땅이 약하게 떨렸음에도 사회자는 물론 손님들도 잠시 멈출 뿐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즈미는 떨림이 전부 멎은 뒤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그에게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카나페 좀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웨이터가 문에서 떨어진다.
뒷모습을 확인한 이즈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VIP석은 다른 객석과 분리된 박스 안에 있어 남들 눈에 띄지 않았다.
살금살금 걸어 나간 그가 화장실에 가는 척 단단히 잠긴 옆문의 걸쇠를 열었다.
‘임무 완료.’
이 정도면 완전 범죄였다.
깔끔하게 손을 턴 이즈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곧 돌아온 웨이터가 그에게 카나페를 가져다준 뒤 문 옆에 가서 섰다.
어두운 탓인지 웨이터는 잠금장치가 풀린 줄도 모르는 듯했다.
이즈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공작 각하, 오늘 수급도 성공적입니다. 근래 중 고위층들의 참석률이 가장 높습니다.”
경매장 가장 높은 곳.
홀로 떨어진 VVIP석에 앉은 리카르도는 수하의 보고를 들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 테지. 무려 용사까지 이 경매장에 관심을 가지니까.”
그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왕세자의 횡포로 성녀의 발을 묶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탁된 용사마저 그 꼴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는 갈색 머리통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걸로 주신도 끝이야.’
저런 무능한 인물을 사도로 선택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는 큭큭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나저나 요즘 창천께서 잠잠하시군. 물밑에서 활동하시는 건가.’
마왕군 사천.
그중 가장 최근에 활동한 건 역병의 군주인 호천이다.
…제대로 활동하기도 전에 빌어먹을 성녀가 망쳐 놓았지만.
“쯧.”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리카르도가 혀를 찼다. 고개를 털자 매끄럽게 뻗친 검은 머리가 흩어졌다.
“왕세자 저하께서는 오늘 경매에 참석하지 않으시나?”
“그것이…….”
그의 보좌를 맡은 인간이 차마 말하기 어렵다는 듯 더듬었다.
“여전히 성녀님과 한방에 머무르시는 모양입니다.”
“그래? 그대로 두거라.”
“예? 하오나.”
남자가 당황하여 말했다.
“아무리 왕세자 저하라지만 성녀님을 건드린 걸 알면 전하께서 가만있지 않으실 겁니다. 말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하께서 어디 말려서 들을 분이시던가? 신경 쓰지 말게.”
“그건 그렇습니다만…….”
리카르도는 고개를 돌린 채 속으로 만족했다.
어쩐지 왕세자가 가만히 있나 싶었더니, 세뇌가 풀린 게 아니라 더 잘되어서 성녀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이대로 나라를 집어삼키면-’
지국은 마족의 영토가 된다.
그가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콰과과광!
강렬한 폭발음에 화들짝 놀란 리카르도가 벌떡 일어났다. 아래를 보자 열린 문 하나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왕국군이잖아!’
병사의 제복을 확인한 그가 입을 벌렸다.
그때 우렁찬 외침이 들렸다.
“자리에 앉은 객들 모두 사로잡아라!”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단정한 제복을 차려입은 금발의 사내가 보였다.
“단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대들의 용맹을 증명하라!”
10여 년간의 세뇌가 무색하리만치 총명한 붉은 눈이 빛났다.
리카르도의 눈이 커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