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30)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30화(30/101)
#30. 창천(蒼天), 하루(春) (1)
봄의 창천(蒼天).
여름 호천(昊天).
가을 민천(旻天).
겨울 상천(上天).
사계의 하늘을 의미하는 사천(四天)은 마왕 바로 아래 네 명의 고위 마족을 의미하는 위계였다.
하나 현재로서는 마왕과 겨울 하늘을 담당하는 상천이 부재중. 게다가 민천은 바다 건너 서대륙에 있으니 남는 마족은 둘뿐이었다.
그마저도 창천과 호천 둘 다 썩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애초부터 마족이란 그런 족속이었으니.
“네 부하도 별 볼 일 없는 놈이군. 10년 안에 테라를 차지한다더니 이게 무슨 꼴이지?”
“어머.”
호천 레이븐의 시비에 창천 하루가 눈을 곱게 접고 웃었다.
“10년 전 성녀에게 탈탈 털려 수국으로 도망친 게 누구였더라?”
“…그때는 딱히 진심이 아니었을 뿐. 나중에라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작전상 후퇴한 것뿐이다.”
“아무렴요.”
하루의 본체를 앞에 둔 까마귀가 부르르 떨었다. 그 새는 정신체를 잘라 만든 호천의 일부였다.
“성녀를 만만히 볼 생각은 하지 마. 설마하니 내가 퍼뜨린 역병을 두 달 안에 말소시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당신의 역량이 고작 거기까지였던 건 아니고요?”
“흥,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까마귀가 코웃음 쳤다.
“내 본신의 힘을 드러내면 그깟 계집애 하나 못 죽일 이유는 없어.”
“흠…….”
하루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목 근처에 걸쳐 놓았던 끈이 스르르 풀어지며 아찔한 몸매가 드러난다. 남성이라면 무심코 시선을 보낼 만큼 매혹적인 신체였다.
레이븐은 아니었지만.
“뭐, 그렇기야 하겠죠. 어차피 지금 당장 성녀를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 그 녀석의 눈에는…….”
“호천, 잠시만요.”
하루의 눈가가 좁아졌다.
고개를 돌리자 붉게 변한 통신구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 님, 노예 시장을 총괄하던 리카르도가 긴급 구조 신호를 보내 왔습니다. 아무래도 성녀에게 정체를 들킨 모양입니다.
“…하!”
그녀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여튼, 뒤늦게 수하로 들인 놈들은 쓸모가 없네요.”
“그냥 네가 거기까지인 건 아니고?”
“닥치세요.”
하루의 주먹이 까마귀를 뭉갰다.
형체 없이 바스러진 까마귀는 곧 푸른 마력으로 변했다. 호천의 본체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다.
“…….”
하루는 잠시 책상을 내려친 그대로 정지했다.
=하루 님?
“굳이 그런 덜떨어진 마족을 챙겨 줄 이유는 없겠지요.”
=그게 무슨…….
“그대로 대기하세요.”
그녀의 신체가 변했다.
검은 머리와 눈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홀릴 듯 매력적인 분홍빛으로.
아슬아슬하게 천만 걸친 복장은 지국 평민 소녀들이 흔히 입을 법한 갈색 원피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웃었다.
“성녀가 오랜만에 지국에 방문했는데, 어디 한번 얼굴을 봐야 하지 않겠나요?”
목표는 당연히도 성녀였다.
***
[세드릭이 당신에게 감탄합니다.] [선행 포인트 +20] [이즈미가 당신에게 감탄합니다.] [선행 포인트 +25] [디올드가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선행 포인트 +15]…….
쭉 이어지는 벌이를 내려다본다.
내 앞에는 사로잡힌 비야 공작과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돌아온 디올드 앞에 무릎 꿇었다.
“와, 왕세자 저하! 부디 한 번만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
“시끄럽다. 너희들 모두 지국의 법도에 따라 엄중히 처벌받을 것이니, 그리 알거라.”
제정신을 차린 디올드는 놀랄 만큼 빠르게 병사들을 통솔했다.
그 과정에는 왕자로서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은 사죄가 있었다.
“그간 너희들에게 피해 입힌 모든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 다만 이번 한 번만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지 않겠나?”
병사들은 천한 자신들에게 고개 숙이는 왕세자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그 결과는 지금 보이는 대로.
‘머리 좋은 녀석이야.’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지 아는 인물이다.
디올드는 릴리아나만큼 영민하지 않지만, 둘 중 더 왕재에 적합한 사람은 누가 봐도 그였다.
‘만약 내가 그의 세뇌를 조금 더 일찍 풀어 주었다면…….’
디올드는 지금쯤 국민 모두에게 지지받는 훌륭한 후계자가 되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성녀님.”
귀족들을 사로잡는 디올드를 배경으로, 차림을 갈무리한 세드릭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세드릭 님.”
물론 아까부터 그의 접근은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짐짓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고된 일을 부탁드려 죄송해요.”
“…전혀 고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다.
세드릭이 보기에 방금 전 나는 신이나 다름없었을 터다. 보이지 않는 그녀가 마치 앞을 내다보는 것처럼 모든 걸 훤히 꿰고 있으니.
그 역시 내 의도다.
나는 그를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제자리에 멈춘 푸른 눈이 살포시 감춰지며 바람이 분다. 세드릭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떨린다.
“봄인데도 아직 바람이 차네요.”
“…….”
“손, 잡아 주실래요?”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난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로봇 같은 무표정이지만 나는 안다.
그는 확실히 흔들리는 중이다.
“…그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내 손을 붙잡은 그는 여자를 처음 에스코트해 보는 시골 소년처럼 뻣뻣했다. 잡은 손끝 모세혈관에서 울리는 맥이 빠르다.
세드릭의 신체 반응을 확인한 나는, 이즈미를 비롯한 일행이 남은 귀족 소탕에 정신이 팔린 사이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속삭인다.
“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귓가에 맞닿는 숨결.
세드릭은 일말의 미동도 없이 멈췄다. 싸늘한 얼굴 안쪽에 생소한 감정에 힘겨워하는 소년이 보인다.
“같이 가 주시겠어요?”
“그럼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지금 가고 싶은데.”
세드릭의 말이 멎었다.
나는 잔뜩 치켜올렸던 발을 내려놓곤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아니에요. 역시 제가 이 자리를 벗어나면 안 되겠죠.”
여기서는 고소(苦笑)가 포인트.
잡고 있는 컨셉은 ‘10년 전 헤어진 첫사랑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사님 앞에서 어리광을 부릴 뻔했지만, 성녀로서 책임감을 느껴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고 있는’ 유스티나스였다.
잠시간 컨셉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 뒤에는 곧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꼭 잡는다.
“세드릭 님도 어서 다른 분들을 마저 도와주셔야-”
“가고 싶은 곳이 어디십니까?”
음. 걸렸다.
“그게, 아니에요. 그만두려고요.”
여기서는 일단 한 발 뒤로 빼고.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뒤는 지국인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겠지요.”
“하지만…….”
“아주 잠깐만 다녀오면 됩니다.”
“…그럴까요?”
나는 표정을 살짝 펴곤 웃었다.
계획 성공이다.
***
세드릭은 눈을 깜빡였다.
“오고 싶으시다는 곳이…… 여기였습니까?”
“맞아요!”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시각.
유스티나스를 데리고 빠져나온 세드릭은 왕도 광장에서 열리는 야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자, 싸요! 싸!”
“과일 주스가 단돈 500페소!”
양옆 천막들에서는 시끄러운 호객 행위를 하고, 안쪽 길목엔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돌아다니고 있다.
누가 봐도 즐거운 축제다.
하나 기감이 예민한 세드릭으로서는 오히려 괴로웠다. 언제든 공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타인과 거리를 지키는 암살자 직업병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많습니다. 저를 꼭 잡고 계십시오.”
“네에.”
주변 사람들을 피해 평소보다 더욱 꼭 붙어 있는 첫사랑까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는 살결이 보드랍다. 거친 후드를 쓰고 있음에도 그 너머 언뜻 비치는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세드릭은 쿵쿵 뛰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진정, 진정하자.’
그가 맡은 일은 어디까지나 호위.
거동이 어려운 유스티나스를 보좌해 무사히 시장 구경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좌해야만 했다. 다른 사심 따위가 거기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이미 실패한 것 같지만.
“세드릭 님, 출출하지 않으신가요?”
귓가에 훅 파고드는 숨결에 주저앉을 뻔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저녁 먹고 들어가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는 건 곤란하니까요.”
이제는 어둠이 익숙한 걸까.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유스티나스는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그의 팔을 더 힘주어 잡은 채 즐거운 기색으로 자그맣게 속삭일 뿐이었다.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혹 선호하는 음식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유스티나스가 그에게 다시 속삭였다.
고막을 파고드는 목소리. 팔과 어깨를 짚는 작은 손. 축제의 열기로 후끈해진 분위기.
머리가 어지러웠다. 유스티나스와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그랬다.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편 세드릭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게, 이 순간만큼은 감사했다.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어서.
“알겠습니다.”
세드릭은 유스티나스를 부축하며 천천히 인파 속에서 빠져나왔다. 혹여라도 그녀가 털끝 하나 다칠까 몹시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그녀가 언질한 음식점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골목길이군.’
조금 낙후되어 있긴 하지만 사람으로 바글바글하던 야시장보다는 훨씬 나았다.
덕분에 두 사람의 거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떨어지는 온기에 세드릭은 아쉬움인지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제발 도와주세요!”
등 뒤에서 여자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솜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언제?’
상당한 실력자인 그조차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기척을 알아채지 못했다. 세드릭은 반사적으로 유스티나스를 제 뒤로 숨겼다.
그런 그의 앞에서, 분홍 머리를 한 여자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 제 동생이 많이 아픕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세드릭이 눈을 홉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