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31)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31화(31/101)
#31. 창천(蒼天), 하루(春) (2)
‘어느 틈에?’
유스티나스와 세드릭은 둘 다 낡은 후드를 머리까지 푹 눌러쓴 상태다.
게다가 세드릭은 혹시 누구라도 그녀를 추적할 수 없도록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호위하는 중이었다.
저런 평범해 보이는 여자의 기척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을 터인데.
“물러나.”
유스티나스 앞에 선 세드릭이 서늘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베겠다.”
곧바로 베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유스티나스를 위한 배려였다.
설령 앞을 볼 수 없다고 해도, 사람을 죽일 때 나는 피비린내는 감출 수 없기에.
“세드릭 님, 무슨 상황인가요?”
“수상한 여자입니다. 뒤를 밟은 것을 보아 반대 세력에서 보낸 암살자일 가능성도…….”
“아니에요!”
그의 말은 허무하게 끊어졌다.
“성녀님이 왕도에 방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줄곧 거리를 헤맸어요. 동생이 위독한데 의사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저와 동생은 허락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없어요.”
외치는 목소리가 절박했다.
옷자락을 쥔 가는 손마디가 애처롭게 떨렸다. 더러워진 차림임에도 한 떨기 꽃송이 같은 분홍 머리의 미모는 심금을 울릴 만큼 아름다워, 만약 이 자리에 있는 게 여자를 돌 보듯 하는 세드릭이 아니었다면 무심코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다.
“성녀님께 은을 입고 싶다면 정식으로 왕궁 방문을 청해라. 이런 식의 의뢰는 받지 않아.”
“하지만…!”
“잠시만요, 세드릭 님.”
세드릭이 움찔거렸다.
탁, 탁.
줄곧 뒤에만 있었던 유스티나스가 지팡이를 움직여 걸음을 옮겼다.
그 여린 몸에 손을 댈 수 없었던 세드릭의 표정에 당혹감이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안 됩니다.”
“에테르 님의 사도인 제가, 이렇게까지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어찌 무시할 수 있을까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그 순간 세드릭은 체념했다. 어떤 말로도 유스티나스를 설득할 수 없으리란 깨달음을 얻어서였다.
그녀를 억지로 안전한 장소로 끌고 가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지만,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유스티나스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10년이 지났음에도 어릴 적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뒤흔들던 웃음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성녀님!”
“동생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이쪽이에요!”
분홍 머리 여자가 유스티나스의 손을 잡아채곤 이끌었다. 세드릭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
‘참자, 참는 거다.’
저 여자의 손목이라도 쳐 냈다간 유스티나스에게 어떤 꾸지람을 들을지 대충 예상이 갔다.
여자와 함께 나아가는 유스티나스의 뒷모습에서 어릴 적 소녀가 겹쳤다.
“친구한테 거칠게 굴면 안 돼. 다들 싫어하잖아.”
유스티나스는 사나운 개라도 길들이는 주인처럼 굴었었다.
우스운 일은 그녀가 한결같이 웃고 있었음에도 마치 엄한 훈육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게… 영 싫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저렇게 굴면 죽여 버렸을 텐데.’
그림자 낙원은 온갖 심부름을 맡아 한다고 알려졌으나, 그의 첫 임무는 대량 학살이었다.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라는 논리다. 화국 번화가에서 일어난 폭발은 대중에게 키에토 출신의 암흑 조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림자 조직은 그만큼 악명 높은 암살 전문 기관이었다. 어째서 교황이 미친개로 불리는 그에게 의뢰를 맡겼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정말 감사해요, 성녀님. 조금만 더 걸으면 돼요.”
“서두르죠.”
“네!”
세드릭은 여전히 경계를 놓지 않은 채 두 사람 뒤를 바짝 따라갔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바짝 긴장한 채 허리춤의 검집에서 손도 떼지 않았다.
‘끝까지 눈을 뗄 순 없다.’
유스티나스는 연약하다.
비록 마음만큼은 누구라도 존경할 만큼 커다란 사람이지만, 그것과 신체적 능력은 다르지 않은가.
일반적인 여자여도 걱정될진대 유스티나스는 앞도 보지 못한다.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세드릭으로서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이에요!”
분홍 머리 여인은 꽤 오랜 시간 골목을 돌더니 곧 허름한 집 하나를 가리켰다. 세드릭은 자연스럽게 유스티나스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두 분 다 어서 들어오세요!”
여자를 따라 문 바로 앞에 선 유스티나스가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진.
“잠시만요, 세드릭 님.”
“예.”
그는 어쩐지 불안감을 느꼈다.
“세드릭 님은 밖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무슨…….”
예상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요구에 세드릭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답변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정말 잠깐이면 돼요. 세드릭 님까지 오면 아픈 아이가 놀랄 수도 있고, 그러면 치료에 방해가 될 테니까요.”
“성녀님.”
“부탁, 들어주실 수 있죠?”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세드릭의 입매가 굳었다. 펄떡거리는 심장에 더운 숨이 빠져나왔다.
“안 됩…….”
“고마워요.”
싱긋.
코앞에서 나타난 미소에 머리가 멍해졌다. 이번에도 세드릭은 유스티나스를 이길 수 없었다.
“문 바로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바로 들어갈 겁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요.”
***
“부디 조심하십시오.”
하루는 유스티나스의 말에 순순히 물러나는 사내를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일이 이 정도로 쉽게 풀릴 줄이야.’
원래부터 성녀와 어떻게든 단둘이 남을 셈이었다. 그래서 문안으로 들어가기 전 동생이 놀랄 수 있으니 남자 쪽은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할 참이었는데, 마침 성녀 쪽에서 먼저 제안한 것이다.
분홍 눈이 덩치 큰 사내를 훑었다.
‘설마 마족 혼혈아가 성녀의 호위를 자처할 줄은 몰라서 당황했지만.’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인간에게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은 마족의 상징이다.
다만 이러한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첫째로 검은색은 격세유전되어 먼 조상에 마족이 하나 섞였을 뿐인- 사실상 인간에 가까운 자조차 종종 저런 색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마족’이란 지성과 이성을 상실한 마물과 동일시되기 때문이었다.
마(魔)의 계급은 크게 여섯 가지.
첫째, 마왕.
둘째, 사천을 이루는 고위 마족.
셋째, 상급 마족.
넷째, 중급 마족.
다섯째, 하급 마족.
여섯째, 마물.
하위 계급은 철저히 상위 계급에 종속되며 이는 절대적이다.
물리적 육신에 소속되는 현인류와 달리 마족은 ‘마력’이라는 비-물리법칙에 소속된 존재. 그들은 마력으로 지성과 자아를 유지하기에 자신의 마력을 언제든 회수할 수 있는 모체(상위 존재)에 필연적 두려움을 지닌다. 마족에게 마력이란 영혼이자 자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중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외양으로 자신을 꾸밀 수 있는 것은 중급 이상의 마족인데, 평화에 젖은 인간들은 이들을 전설 속 존재로 취급했다. 지성이 희미한 하급 마족조차 정예 기사단이 나서야 할 정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중급 이상의 마족은 압도적인 존재다. 사천 중 하나인 하루 본신의 힘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성녀님. 동생이 잘 있는지 제가 먼저 확인해 보고 올게요.”
“네.”
저 멍청한 여자 하나 누르는 건 일도 아닐 만큼.
‘아직 애송이로군.’
물론 신에게 선택받은 성인(聖人)인 만큼 마냥 얕볼 수는 없다.
하나 몇백 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스물을 겨우 넘긴 성녀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로 보이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현재의 성녀는 전설 속 성인들과 달리 전쟁 한 번 겪어 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
‘그러니 이토록 쉽게 모르는 사람을 따라온 것이겠지.’
어떤 속셈을 가진 줄도 모르고.
하루는 빈집에 이미 준비해 둔 마법진 술식을 확인했다. 성녀를 이 안에 집어넣기만 하면 순식간에 그녀의 영혼을 제 본신이 위치한 정신계로 납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성인과 빌어먹을 주신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캐 볼 수만 있다면…….
“저기.”
하루의 상념은 성녀의 발언으로 잠시 멈추었다.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몹시 친절하게 “편히 말씀하세요.”라고 이야기할 셈이었다.
“그래서 뭘 할 건가요, 창천?”
…성녀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