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32)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32화(32/101)
#32. 一場春夢 (1)
째깍. 째깍.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 외에는 완벽한 정적이 이어졌다.
‘눈치챘다고?’
확실히 속여 넘겼다고 생각했다.
혹시 몰라 머리와 눈 색까지 전부 바꾸었지만, 애초에 성녀는 앞도 못 보는 여자가 아닌가.
아무런 단서도 흘린 적 없다. 마족 혼혈 호위조차 무언가 의심하는 기색은 있어도 설마 그녀가 마족, 그것도 사천 중 하나일 것이라곤 감히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그게… 무슨 말이죠?”
“시치미를 뗄 생각이군요.”
성녀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그렇다면 좋아요. 하루, 당신의 ‘아픈 동생’을 먼저 보도록 하지요.”
이번에는 이름까지 맞추었다.
‘…어떻게?’
그 이름은 같은 마족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데 일개 인간 따위가 어찌?
하루는 잠시 얼어붙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면 성녀가 그녀의 정체와 이름을 아는 것 따위는 본래 계획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음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당당한 태도에 사고회로가 굳은 탓이다.
툭.
그사이 성녀의 손에서 지팡이가 떨어졌다.
저벅, 저벅, 저벅.
온통 백색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여자는 섬뜩하리만치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몇 발자국 걸어 하루를 지나쳤다.
끼이익.
방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당연하지만 방 안에 침대 따위는 없다. 가구 하나 없이 깔끔한 바닥에는 하루가 미리 그린, 척 보기에도 불길한 기운으로 일렁거리는 마법진이 있을 뿐이었다.
눈먼 성녀가 말했다.
“하기야 볼 수 없겠죠? 그래 봤자 다 거짓말이었을 테니.”
하루가 제정신을 차린 건 그때쯤이었다. 주도권을 빼앗긴 건 기껏해야 10여 초 남짓이었으나, 그만큼 강렬하고 불쾌한 경험이었다.
“인간 주제에, 감히.”
맑고 깨끗하던 목소리가 탁해진다. 분홍색이었던 눈과 머리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그 앞에 선 성녀가 목에 건 로사리오를 두 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
하루가 손을 뻗었다.
시계(視界)가 뒤집혔다.
***
검은 화면.
나는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알 수 있었다.
“유나 누나, 교수님이 논문 피어 리뷰랑 이번 시험 범위 채점 좀 부탁한다고 이거 전해 주셨어요.”
“…이번 애들 시험 범위에 맥스웰 방정식도 들어가던가?”
“원래 2학기에 전자기학 배우잖아요. 아, torque 단원 다음이라 진짜 죽을 맛이었는데.”
“그래? 양자역학 전까지는 할 만하지 않아? 1학년은 고등학교에서 웬만큼 배우고 들어오잖아.”
“그건 누나나 그렇죠…….”
눈앞에 보이는 건 같은 랩실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내 후배 녀석과, 교수님이 떠넘긴 말도 안 되는 분량의 논문 리뷰… 그리고 기말고사 시험지였다.
‘이건 현실이 아니구나.’
창천, 하루.
그녀는 꿈의 지배자다.
따뜻한 봄, 살랑이는 꽃가루에 춘곤증에 시달리는 자들처럼 창천 주변의 이들은 그녀가 지배하는 백일몽에 빠져든다.
하루가 마왕군 사천 중 가장 약한 동시에 가장 까다로운 적인 이유였다. 그녀의 실체를 모르는 이상 영원히 악몽 속에서 헤매게 되니.
물론 내게는 통하지 않는 일이다.
[정신 면역] [모든 종류의 정신 공격을 완벽히 방어합니다.]딱히 내가 특출난 인간이라서는 아니고, 이 스킬 덕분에.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하루의 행동거지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나를 악몽 속에서 납치할 속셈이었던 게 틀림없다.
그 대신 내가 이 익숙한 연구실 안에 있는 건 전부 이 스킬 덕택이다. 꿈에서 깨어나는 방법도 확실히 알겠고 말이다.
‘그보다 말이지…….’
꿈인 걸 알아도 짜증 나네.
논문은 그렇다 치고 시험지는 첫 장을 집어 들자마자 한숨이 튀어나왔다. 편견일진 모르지만 물리학과 학생은 대부분 남자였고, 그만큼 글씨도 몹시 개판이었다.
“현수야. 이거 대체 뭐라고 쓴 거 같냐. L? I?”
“대충 오답 처리해요.”
“지난번에 그랬다가 성적 정정 요청 때문에 교수님한테 대판 깨졌어.”
“우리 교수님이 좀 그렇긴 하죠. 지난번에 민호 형한테 딸 오는 거 공항으로 마중 나가라고 했잖아요.”
“야, 진짜 미치겠어. 진짜 내가 미쳤다고 석박사 통합으로 들어와서 X같은 교수님을-”
“유나 군, 현수 군, 여기 있나?”
깜짝이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X같다는 말 못 들었겠지?
신나게 뒷담화를 하던 도중 들어온 교수님에 나와 현수는 곧바로 일어났다. 그러자 교수님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허허, 뭘 또 일어서나. 그냥 둘 다 앉아 있어.”
뭐라고?
지난번에 그냥 앉아 있었다가 하루 종일 못마땅한 표정으로 쓸데없는 트집을 잡혔던 나로서는 참기 어려운 말이었다.
너무 참기 어려운 나머지.
“이게 다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죠. 저도 모르게 일어서 버렸네요.”
나는 손을 싹싹 비비며 아부했다.
“뭐어? 하하하!”
그러자 껄껄 웃는 교수.
꼴 보기 싫으니까 그만 웃어라.
셋 셀 동안 웃음 그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고 더 아부한다.
‘응? 잠깐만.’
이거 꿈이잖아?
그런데 왜 내가 이러고 있지?
…습관이란 게 무섭군.
“아참, 그렇지. 오늘 내 지인 결혼식 일정이 잡혔는데 내가 당장 가기가 힘들어서…… 미안하지만 둘 중 하나가 대신 참여해 주지 않겠나? 축의금 봉투는 줄 테니까 적당히 인사만 드리고 오면 되고.”
“…예?”
내가 눈을 깜빡였다.
“교수님, 그… 결혼식이 어디서 열립니까?”
옆에 있던 현수가 물었다.
“아, 대전이야. 가깝지?”
“…….”
“…….”
우리 두 사람은 말을 잃었다.
‘임현수, 네가 가라.’
‘누나가 다녀오면 안 돼요? 저 그제부터 퇴근을 못 했어요!’
찰나의 순간 다크서클이 진하게 배인 두 대학원생의 눈치 싸움이 열렸다. 어떻게든 후배에게 미뤄 보려던 나는, 결국 3일 동안 집에 못 간 불쌍한 놈을 구해 주기로 결심했다.
꿈이긴 해도. 어쨌든.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럼 결혼식 다녀와서 내일까지 기말 채점까지 좀 부탁하고. 기차 안에서 채점할 수 있지?”
“채점은 좀 힘들 것 같…….”
“응?”
교수님의 눈에 ‘네가 감히?’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일까지 끝내겠습니다.”
***
괴롭다.
졸리다.
울고 싶다.
나는 대전으로 가는 기차(특: 표는 내 사비로 삼) 안에서 간이 책상을 펴 놓고 넋을 놓았다.
‘뭔가 잘못됐어.’
분명 꿈인데 왜 죽을 것 같지?
물론 대학원생이 집에 못 들어가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괜히 내 악몽이 이 시절인 게 아니다.
꿈속인데도 교수님에게 반항 한 번 못 하는 불쌍한 처지를 보아라.
애초에 내가 왜 대전으로 가는 기차표 따위를 샀는지 모르겠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게 아닌데.
정신 면역에도 불구하고 뼛속 깊이 새겨진 대학원 시절 PTSD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건 졸업 유예이며, 둘째로 무서워하는 건 교수님이다.
어느 쪽이든 박사 학위가 걸려 있다는 게 포인트군. 제기랄!
“신이 그대와 함께하길.”
두 손을 모아 읊조린 짧은 기도.
새하얀 순백의 옷과 10여 년간 질리게 보았던 익숙한 손이 시야에 들어온다. 창문을 내다보자 어느새 피곤에 절은 대학원생은 사라지고, 은발벽안의 미소녀가 울상을 짓고 있다.
‘이 표정은 오랜만이네…….’
언제나 웃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이 표정으로 괜찮겠지. 주위에 아무도 없고.
나는 착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안 돼. 무너질 것 같아.
12년. 무려 12년을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내도 그런 세계에 익숙해질 수는 없다. 거긴 내가 태어난 장소가 아니다.
내가 속한 곳은 지구다.
나는… 한국인이다.
‘돌아오고 싶어.’
설령 대학원 시절이 악몽에 나온다고 한들, 지식을 탐구하는 나날은 틀림없이 즐거웠다. 전공의 최전선에서 숟가락 하나 들고 암벽을 파헤치는 건 의미 있는 일 아닌가?
그리고 여기엔 가족이 있다.
사랑하는 부모님. 날 닮아서 똑똑하고 다소 되바라졌지만, 그래도 결국 나를 위해 주는 동생까지.
…….
좋아. 인정해야겠다.
정신 면역은 어디까지나 시스템적인 보조일 뿐, 내 사고까지 사이코패스로 만들어 주는 스킬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이 따뜻한 악몽에 빠져 죽고 싶다는 비이성적 충동에 시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진 않는다.
지난 12년간 그래 왔듯 이유나로서의 나를 내려놓는다.
‘지금쯤 하루는 어떻게든 나를 지배하에 놓으려다 실패했겠지.’
처음에는 부정과 분노를 거치다, 이내 나 외에 다른 희생양을 찾거나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마력장을 펼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쯤 바깥쪽… 최소 수도 전역, 최악의 경우 테라 국민 전체가 악몽에 잠겨 있을 터였다.
“야야, 저 여자 봤어?”
“쩐다. KTX값으로 뮤지컬을 보여 주네. 1호선인 줄.”
“미친놈아. 듣겠다. 근데 아까는 저런 사람 없지 않았나…?”
뒤에서 깨어 있는 남학생 두 놈이 낄낄대는 소리를 들으며 깜깜한 창문 너머 내 얼굴을 본다.
어쨌거나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차례다. 정신 면역 덕분에 원작보단 조금 더 빠른 속도려나.
그럼 이제…….
나는 휴대폰을 조작해 항공사 어플로 들어갔다.
[ICN→ROM First Class 편도]이왕 꿈속인 거, 마지막으로 호사 한 번 누려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