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33)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33화(33/101)
#33. 一場春夢 (2)
“잠시 대기 부탁드립니다.”
S 항공사의 퍼스트 클래스는 원하는 곳까지 리무진 픽업 서비스를 제공한다.
“캐리어는 따로 없으신가요?”
“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곤 삼각별이 번쩍이는 검은색 GLS에 올랐다. 결혼식에 불참한 덕분에 휴대폰은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의미 없는 일이다. 꿈속에서까지 노예로 살고 싶은 게 아니라면야.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외모임에도 픽업 기사는 필요한 것 외에 전혀 말을 걸지 않았다. 정말 VIP가 된 듯한 기분이 묘하다.
‘뭐, 엄밀히 말하면 환생 이후 계속 VIP로 살긴 했지만.’
성녀는 사실상 어느 곳을 가도 국빈 취급이니 지금보다 대접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토록 생경한 기분이 드는 것은 역시 이곳이 내가 나고 자란 현대이기 때문이리라.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수 세기 전의 국왕보다 현대 중산층이 누리는 풍요가 월등하다고. 딱 그 짝이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한들 그 세계에서 에어컨 나오는 독일제 SUV를 타고 달리는 호사는 절대 누릴 수 없다.
“도착했습니다. 따라오시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전담 직원이 나와 곧바로 일등석 라운지에 안내한다. 이번에는 확실히 주변 시선이 쏠렸다.
라운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자리에 앉아 있으니 자동으로 체크인과 입국 심사가 완료된다. 연구차 방문할 때 학교 돈으로 프레스티지 클래스는 몇 번 타 봤지만 확실히 돈이 좋긴 좋다.
그게 공짜 돈이라면 더더욱.
셰프에게 코스 요리를 주문해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고, 10여 년 만에 따뜻한 온수가 나오는 화장실에서 깔끔하게 샤워까지 하니…….
‘출국까지 30분 정도.’
이제 슬슬 일어날 차례였다.
“탑승 절차 도와드리겠습니다.”
스타 얼라이언스에 소속된 한국 승무원은 나를 탑승구로 안내하며 마지막까지 할 일을 완수했다.
양옆에 캡슐처럼 구획이 나뉜 방을 열자 침대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이륙 전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엄마] [아빠] [이도준]부모님과 버릇없는 동생 놈의 연락처다. 온 메시지는 없다.
“…….”
사실 망설여진다.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미친 사람처럼 비행을 취소하고 집에 돌아가면, 어쩌면 가족들을…….
그 순간.
[이도준: 야] [이도준: 오늘 집에 오냐?] [이도준: 엄빠가 너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 사 놨다] [이도준: 생일 축하해 줄 테니 영광으로 아셈ㅋㅋ]거짓말처럼 메시지가 왔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펄떡거렸다. 차가운 식은땀이 흐른다.
나는 오늘을 기억하고 있다.
동생과 부모님의 부탁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남의 결혼식이나 축하해 주러 대전에 갔던 그날을.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손님, 곧 이륙하니 앉아 주세요.”
“…아. 아, 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천천히 날아올랐다. 메시지에는 영원히 답장할 수 없게 되었다.
꿈에서 깨어났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거대한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읏, 하아.”
열심히 몸을 바둥거리니 대충 풀린다. 당초 목적 자체가 잠든 사람을 고정만 해 두는 것이라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대충 예상대로 됐군.’
하루의 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첫째, 죽음.
둘째, 꿈의 근원에서 아주 먼 곳으로 달아날 것.
본래 가장 정석적이고 쉬운 방법은 전자다. 후자의 경우는 꿈의 범위에 한계가 있다는 맹점을 이용한 일종의 편법이다.
하루로서는 예측하기 힘들었으리라. 동대륙에 있는 이동 수단이라곤 끽해야 마차나 배 정도인데, 이걸로 꿈의 범위를 벗어나려면 못해도 일주일은 걸릴 테니.
나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까까지 있던 널브러진 집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다. 고개를 들면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벚꽃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었다.
“왕도 한복판…….”
이것도 예상대로다.
정확히는 원작대로지만.
시야를 빠르게 돌렸다. 근처 나무뿌리에 묻혀 있는 세드릭을 찾는 건 금방이었다.
‘세드릭부터? 아니면 이즈미?’
원작에서 가장 먼저 꿈을 빠져나온 건 세드릭이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그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고민은 찰나였다.
“크르르르.”
등 뒤에서 소름 돋는 경계음이 울렸다. 마물이다.
‘…악몽에서 태어났나?’
하루의 본체는 저 나무.
그녀는 뿌리로 인간을 옭아매 악몽에 빠진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섭취한다. 기실 모든 마족이 방법만 다를 뿐 인간의 부정적 감정을 양식으로 삼는 건 동일하다.
그리고 감정이 마력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 부산물로 무작위 마물이 탄생한다.
마력 부산물에 불과한 마물은 이성이 없기에 평범한 기사에게도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문제는 내 육체가 어지간한 성인 여성보다 약하다는 데 있었다.
“…이런. (이런 X발 진짜.)”
아무리 세드릭이 강하대도 하루의 꿈속에 있는 동안은 살아 있는 인형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지금 정신을 차리고 있는 인간은 이 왕도에서 오직 나 하나.
저놈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는 소리다. 식은땀이 흐른다.
탁탁.
발을 두드리자 늑대형 마물의 고개가 내 쪽으로 휙 돌아간다. 붉은 눈동자가 선득하게 빛났다.
“크와앙!”
꽈아악. 팡!
마물의 뒷다리 근육이 일순 압축되었다가, 이내 나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도약한다. 나는 곧바로 주저앉으며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동시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를 주워 마물에게 있는 힘껏 던졌다.
“깽!”
적중.
대번에 코를 맞은 마물이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털어 냈다. 놈은 아픈지 연신 앞발로 콧대를 긁다가, 화가 솟구쳤는지 몸을 부풀렸다.
놈의 시선은 바닥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세드릭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향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어떡하지?’
생존에 직결된 판단으로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겨우 한 번 굴렀다고 팔다리가 피투성이었다.
“크르르.”
아까 코를 맞은 덕분에 놈은 곧바로 달려드는 대신 꼬리를 빳빳이 세운 채 내 쪽을 노려볼 뿐이다. 내가 약하다는 걸 깨달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경계다.
‘쉽지 않겠는걸.’
아니, 하지만…….
입가를 매만지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다. 이유는 물을 것도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도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곤, 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놈이 움찔거린다. 하나 내 목표는 처음부터 마물이 아니었다.
“세드릭 님.”
시체처럼 누운 세드릭을 감싼 채 그 위에 걸터앉는다. 영문 모를 행동에 마물이 움찔거렸다.
그사이,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력 스크롤을 꺼냈다.
‘이걸 정말 쓰게 될 줄이야.’
이번 사건 전개를 죄다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사전에 꽤 거금을 들여 스크롤을 구매했었다.
세드릭에게 준 폭발 마법이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신호 보내기 마법. 타인의 꿈에 강제로 침입하는 마법과 더불어 아예 내가 그릴 수 있도록 빈 마력 스크롤까지.
문제는 내가 직접 마력을 불어넣을 수 없다는 사실인데.
“마력 좀 쓸게요.”
이 부분은 세드릭 덕분에 해결될 듯하다. 그의 근처에만 있어도 흘러나오는 마력에 스크롤이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어디.
“꿈속에서 만나요, 세드릭 님.”
눈이 감긴다.
직후 마물도 내게 달려들었다.
***
타는 냄새.
절규하는 자신.
“좋은 어른이 되어 줘.”
애써 웃는 유스티나스.
끔찍한 악몽이었다. 세드릭은 눈치채지 못한 채 수십, 혹은 수백 번이나 유스티나스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악몽을 자각해도 나아지는 건 없었다. 아무리 꿈이라고 속삭여도 눈앞에서 유스티나스가 불타는 집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그의 정신을 끊임없이 갉아먹었다.
“아, 아아. 아아아…….”
그는 제자리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덜덜 떨었다. 십대 초반에 불과한 소년의 몸뚱이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상태로 10년이 지났다.
“의뢰가 있습니다.”
유스티나스의 죽음을 반복한 세드릭은 텅 빈 눈동자로 자신을 찾아온 신관을 내려다보았다.
“서둘러 가지.”
“예? 내용은 듣지 않으십니까?”
“필요 없어.”
이것은 꿈인가? 현실인가?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현실이라기엔 지독했고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하다.
하나 세드릭은 희망을 품었다. 바다 너머 신전에 유스티나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제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이즈미 폴리라고 합니다! 교황 성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무예가 훌륭하신 분이라지요.”
“……이게 뭐지?”
“네?”
그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을 맞이하는 용사의 멱살을 잡았다.
“허튼수작 말고. 성녀님이 어디 계신지 말해.”
“서, 성녀요?”
용사는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옆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재수 없는 금발 왕녀가 끼어들었다.
“이봐! 무례한 짓은 그만두게.”
“무례? 하.”
세드릭이 코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당장 성녀님을…….”
“그러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여전히 세드릭에게 잡혀 있던 용사가 손을 털어 내며 외쳤다.
“성녀라니, 그런 분은 없어요.”
“……뭐?”
검은 눈이 흔들렸다.
“거짓말하지 마. 성녀님은 분명 아이기스에 계시지 않았던가.”
“용사님의 말씀이 맞답니다.”
그의 뒤에서 교황 제피로스가 나타났다. 언제나처럼 가느다란 눈으로 싱긋 웃은 제피로스가 다소 곤란한 어조로 설명했다.
“어째서인지 이번 대의 성인은 평소와 다르게 용사라는 이름으로 임명되었거든요. 그만큼 마족이 기승을 부릴 예정이겠지만…….”
“그게, 무슨.”
세드릭의 입이 벌어졌다. 믿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니까, 만약에.
만약에…… 유스티나스가 존재했던 그간의 기억이 전부 그의 꿈이고, 사실 이게 현실이라면.
머리가 아팠다.
“…잠시 혼자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쪽이 현실인가.
악몽이라면 서둘러 깨고 싶었다. 하나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유스티나스가 없는 이곳은 그대로였다.
평화롭다. 여전하다.
그녀가 없는 채로.
그 상태로 오랜 시간이 지나자,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유스티나스가 없는 세계다.
그런 세계 따위는, 차라리.
차라리…….
두 손으로 감싼 얼굴에 점점 회색빛이 돌았다. 둥글었던 동공은 점차 날카로워지고, 가지런히 덮여 있던 앞머리가 넘실거리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세드릭.”
눈이 번쩍 뜨였다.
어깨를 덮는 가녀린 손에 세드릭은 떨리는 숨을 뱉었다. 이 순간이 그저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유, 스…….”
“응. 세드릭.”
그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나 여기 있어.”
“유스, 유, 스. 유스…….”
연신 그녀의 애칭을 입안에 굴리던 세드릭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천사처럼 미소 짓는 유스티나스가 그 자리에 있었다.
두 눈이 마주친다.
“세드릭.”
“유스, 너 눈이-”
맹인이었던 기억 속 그녀와 달리, 눈앞에 있는 유스티나스는 정확한 초점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생기가 가득 담긴 푸른 눈은 박제된 것보다 배는 아름다웠다.
“세드릭. 날 믿어?”
“응.”
“그렇다면 스스로 심장을 찔러.”
“내 심장을…?”
“할 수 있지?”
“너를 위해서라면.”
고개를 끄덕인 세드릭은 허리춤의 단검을 풀어 역수로 쥐었다.
그러곤 찔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고마워.”
신음은 내지 않았다. 따뜻한 피가 빠져나가며 몸이 차갑게 식는다.
그럼에도 기뻤다.
“넌 내 소중한 친구야.”
“친구, 인가…….”
“음.”
그 말을 들은 유스티나스가 눈을 곱게 접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사실 친구가 아냐.”
“그럼…?”
“좋아해. 세드릭.”
직후 심장이 멎었다.
시계가 뒤집힌다. 세드릭은 찌를 듯한 혈향에 눈을 떴다.
그리고.
“커윽, 헉…….”
“……유스?”
“아, 하아.”
온통 피투성이가 된 유스티나스가, 그의 위에 올라탄 채 희미하게 웃었다.
“평안히 주무셨나요, 세드릭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