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36)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36화(36/101)
#36. 하루(春)의 끝 (1)
“대체 뭘 하신 건가요?!”
꿈에서 깨어난 이즈미는 걸레짝이 된 내 몸을 보곤 기겁했다.
“성녀님은 얼른 쉬세요!”
“너무 걱정 마세요. 단순히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뿐이니까요.”
“더 걱정됩니다만?!”
거품을 문 이즈미는 곧이어 정신을 차리곤 내 상태를 살폈다. 세드릭이 불신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본다고 아나? 평화에 물들어 자라온 귀족 주제에.”
“오른쪽 종아리에 상처가 심상치 않아요. 다행히 출혈은 거의 멈춘 상태긴 하지만, 이건…….”
“……아는군.”
세드릭이 입을 다물었다.
“당장 수술해야 해요. 아, 아니지. 성녀님, 자가 치료 가능하신가요?”
“죄송하지만 제 능력으로 자기 자신은 치유할 수 없어요.”
“그렇… 습니까.”
이즈미가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세드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많이 심각한가?”
세드릭의 의료 지식은 전부 야매다. 반면 전생에 의사였던 이즈미는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속속들이 읊을 수 있으리라.
나는 서둘러 그의 입을 막았다.
“용사님!”
“예?”
“제 치료보다 저 녀석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에요. 이유는 아시죠?”
“저 녀석이라면,”
이즈미의 시선이 돌아간다.
내가 가리키는 건 왕도 한복판에 있는 어마어마한 벚꽃 나무였다.
“나무…? 저건 뭐죠?”
“창천의 본체예요.”
이즈미가 멀뚱거렸다.
“창천, 호천, 민천, 상천. 고위 마족 중에서도 마왕 바로 아래에 있는 사천왕의 호칭이랍니다. 봄 하늘을 뜻하는 그녀의 본체가 벚꽃 나무인 건 자연스럽지 않나요?”
“그래도 하필이면 벚꽃이라니…… 약해 보이는걸요.”
“실제로도 물리적으로는 넷 중에서 제일 약해요.”
“그 뜻은?”
“정신계 마법에 특화된 마족이란 뜻이지요. 지금도 왕도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영원한 악몽을 헤매고 있을 거예요.”
나는 스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악몽을 헤맨 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현실에서도 생기를 빨려 죽음에 이르러요. 그러니 서두르죠.”
이즈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좀 전에 있었던 악몽을 회상하는 중이리라. 여동생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좁히던 그는, 문득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성녀님, 그럼 설마 아까 전에 저를 깨웠던 게…?”
“잠시 용사님의 꿈에 접촉했어요.”
꿈에 들어가자마자 차에 치여서 응급실행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다행히 깨어난 직후 그가 잘 아는 ‘유스티나스’로 변해 죽음을 유도했다. 나는 살짝 머뭇거리다 미안한 표정(물론 머뭇거리는 부분부터 연기다)으로 덧붙였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를-”
“아뇨! 오히려 감사하죠.”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일단 창천 근처로 접근해야겠군요. 성녀님과 세드릭 님은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세드릭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이즈미는 비장한 얼굴로 왕도 중심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나는 단둘이 남은 세드릭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성녀님?”
“용사님을 쫓아가요.”
“위험합니다.”
“용사님이 혼자 있다가 잡혀 버리면 더 위험해져요.”
세드릭은 잠시 고민하다, 곧 내 말에 일리가 있다는 판단을 내린 듯했다.
“알겠습니다.”
세드릭은 이즈미보다 약간 더 느린 속도로 그를 추격했다. 군데군데 돋아난 나무뿌리와 황폐해진 거리를 살핀 그가 미간을 좁혔다.
“하늘이 어두워졌군요.”
“가지가 드리웠으니까요.”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위로는 하루의 벚꽃 가지가 무성했다. 꽃잎 비가 내리는 풍경은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웠다.
“나무를 베면 죽는 겁니까?”
“마족의 본체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죽일 수 없어요. 용사님이 가진 성유성이 해결책이겠지요.”
“…용사가 해결책을 찾아낼 만큼 똑똑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하하…… 에테르 님께서 선택한 분이신걸요. 저는 믿어요.”
암. 믿고말고.
무려 일본 최고 명문 대학교를 졸업한 의사 출신 아닌가?
막무가내긴 해도 일반적인 소년만화 주인공처럼 멍청한 타입은 아니다. 실수한다면 지능 쪽이 아니라 상식 쪽 문제겠지.
다른 나라 황제 앞에서 도게자를 한다거나 에테르 여신상 앞에서 박수를 두 번 치고 동전을 던진다거나 계란말이에 설탕을 친다거나…… 뭐 그런 거.
사실 다른 건 몰라도 계란말이에 설탕만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계란말이는 소금 간을 친 다음 김치찌개와 함께 먹어야 한다고!
‘아차차.’
쓸데없는 데 흥분했다. 심각한 상황이니 임무에 집중하도록 하자.
‘어차피 이즈미는 첫 번째 시도에서 무조건 실패한단 말이지.’
하루는 사천 중에서 유일하게 정신계 공격이 약점인 녀석이다.
다른 마족들과는 칼 들고 이얍이얍 싸우면 그만이지만, 저렇게 커다란 나무랑 무슨 수로 싸우겠는가?
정답은 ‘침투’에 있다.
“어마어마한 크기로군요.”
다행히 도착 자체는 세드릭의 발걸음을 빌려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즈미는 뭔가를 해 보려는 듯 저만치에서 몇 번 칼질을 하다가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시도는 아니다. 무식한 힘으로 때려 박으면 꼭대기에서 나무 안쪽으로 침투가 가능하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죠.”
원래는 여기서 릴리아나가 이즈미의 사이드킥으로 본격 합류한다.
덕분에 둘 사이에 신뢰도 생기고, 러브러브한 분위기도 생기고. 꿩 먹고 알 먹고.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번 이벤트에서 나는 릴리아나를 배제하고 움직일 예정이다. 그녀를 굳이 깨우지 않고 버려둔 이유였다.
‘릴리아나는 이즈미의 도움 없이는 못 일어날 테니까. 대충 하루가 죽고 나서 깨어나겠군.’
릴리아나에게 배정될 역할은 더 이상 파티의 브레인이 아니다.
태양이 두 개 떠 있으면 곤란하잖아? 파티가 분열되는걸. 후후.
속으로 비열하게 웃은 나는 나무 아래에서 잠시 대기했다.
잠시 뒤.
퉤.
거대한 벚꽃 나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구역질하듯 무언가를 뱉어 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당연한 수순으로 대포알처럼 쏘아져 나오는 이즈미. 사실 대포알보다는 나무가 뱉은 침에 가까웠다.
“헉, 헉. 죽는 줄 알았네.”
그는 우리 근처에 떨어져 열다섯 바퀴를 데굴데굴 구른 뒤 일어섰다.
1km는 넘어 보이는 나무에서 떨어졌는데 상처 하나 없는 내구성은 참 부럽네. 성녀 컨셉인 지금으로선 영 못 써먹을 상태긴 하다만.
“무슨 얼빠진 기행이지?”
“나무 꼭대기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었어요.”
끈적끈적한 점액을 뒤집어쓴 이즈미가 얼굴을 닦아 내며 말했다.
“그 안에 들어갔더니 저 자식이 대뜸 구역질을…….”
“더럽기 짝이 없군.”
세드릭이 질색했다.
“용사님, 잠시 이쪽으로.”
“네.”
치유와 정화를 걸어 주자 이즈미가 순식간에 깔끔해졌다. 그는 자신의 몸을 확인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와! 고맙습니다!”
“위쪽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실래요?”
물론 나는 위쪽 상황은 물론 하루의 공략법까지 전부 꿰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전부 까발릴 순 없는 노릇이다. 예언가 노릇도 하루 이틀이지, 괜히 설쳤다 나중에 알고 있던 원작이 틀어져 예측이 어긋났다간 컨셉이 무너진다.
컨셉 절대 사수!
“말 그대로였어요. 저 벚꽃 나무, 안쪽에 소화기관이라도 있는 느낌이에요.”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계속 입구 쪽으로 들어가는 시도는 해 봐야겠죠? 이번엔 방심해서 뱉어졌지만, 칼을 내부에 박아 넣어 버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음…….”
나는 고심하는 척을 했다.
척인 이유는 당연히, 원작 공략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즈미의 말대로 저 녀석의 뱃속에 들어가려면 강경 돌파밖에 없다. 문제는 그 방법으론 내가 안쪽에 들어갈 수 없으며, 마족의 본체 속을 투시할 수도 없다는 것.
이러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공략을 미리 알려 주면 돼.’
지난번에 세드릭에게 했던 것과 같은 원리다. 솔직히 약빨이 너무 오를까 봐 걱정되긴 하는데, 이게 아니면 번거롭게 릴리아나를 깨우고 몇 번씩 저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버려야 한단 말이지.
그런 짓을 했다간 악몽에 빨아 먹혀 죽는 사람이 늘어난다. 그만큼 내 포인트도 줄어든단 소리다.
“확실히 용사님의 말이 맞-”
다고 하려는 순간.
머릿속의 전구가 번뜩였다.
“성녀님? 뭔가 생각나셨나요?”
이즈미의 녹색 눈이 기대를 담고 나를 향했다.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것 같다.
…3/4 정도의 확률로. 아마?
“입구가 있다면 출구도 있지 않나요?”
“네?”
“출구라면 굳이 계속 꼭대기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을 거고요.”
“…? …!”
의아해하던 이즈미는 곧 내 의미를 깨달은 듯 입을 벌렸다.
“성녀님, 설마? …아니.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찾아볼게요.”
말을 마친 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름 약 200m인 벚꽃 나무를 한 바퀴 둘러볼 셈인 듯했다.
약 5분 뒤.
우리에게 돌아온 이즈미가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있어요, 성녀님!”
마족의 그곳을 찾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