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37)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37화(37/101)
#37. 하루(春)의 끝 (2)
나와 이즈미, 세드릭은 동그란 모양으로 된 구멍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세드릭의 표정이 이상하다.
“…성녀님, 정말 들어가시겠습니까? 불결합니다.”
“불결하다니요?”
“그게…… 그, 아무튼 더럽습니다. 성녀님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족의 배설구 아닙니까?”
“그래 봤자 식물인걸요.”
나는 평온히 설명했다.
“나무의 배설물이 뭐겠어요?”
“……뭡니까?”
“수액이나 꿀이죠!”
세드릭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즈미도 마찬가지였다.
“대변이 꿀이라고요? 이거 완전 논문감이네요. 아니, 그보다 배설물이 액체면 그건 소변 아닌가요?”
“창천은 총배설강이 있대요.”
“아하! 그거 신기하네요. 그런데 성녀님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응. 원작자 SNS에서 봤어.
“……들어가기나 해라.”
“호엑!”
줄곧 비위 상한다는 얼굴로 이즈미를 바라보던 세드릭은, 차마 내게 뭐라 말하지 못하고 이즈미를 걷어차 구멍에 빠뜨렸다.
살짝 벌어져 있는 구멍에 머리부터 들어간 이즈미가 안쪽에서 크게 외쳤다.
“정말 달콤한 냄새가 납니다!”
나를 안은 채 남겨진 세드릭은 몹시 갈등하는 얼굴로 비위 상하는 구멍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법한 저 구멍에 누구를 먼저 집어넣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다행히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즈미가 검으로 좁은 구멍을 난도질한 덕분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두세 사람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커진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자 안쪽에 거대한 관 같은 것들이 보였다. 나무를 잘라 놓은 단면도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 나무 안쪽이로군요.”
“어느 관을 타고 올라야 할까요?”
두 사람이 두리번거렸다.
“용사님, 세드릭 님. 근처에 뭔가 보이는 게 있으면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주세요.”
“보이는 거라면… 오! 여기 뭔가가 적혀 있어요.”
그가 더듬거리며 음각된 문양을 읽었다.
“1533441542. 숫자?”
“이쪽에도 숫자가 있습니다.”
세드릭이 나를 조심스레 고쳐 안으며 이야기했다.
“아마 이 숫자가 이정표인 듯합니다만, 의미를 알기 어렵군요. 관 개수도 백 개는 넘어 보입니다.”
알아. 보이거든.
‘하지만 예상외인걸.’
원작에서 입구를 통해 중앙으로 가는 건 쉬웠는데, 출구 시작은 들어가는 게 쉬운 대신 갈림길이 많은 모양이다.
나는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며 각 관에 새겨진 숫자를 유심히 살폈다.
115533441542
23114413154254
53543115329
3523313415324
43343444
35233134153223
535431153252
131533441542
433434447
35233134153289
…….
끝없이 이어진 숫자의 향연!
보통이라면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겠지만, 20년 넘게 숫자와 씨름해 온 대학원생을 얕보면 곤란하다.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
할 수…….
있…… 있…… 겠지?
‘젠장. 대체 뭐람?’
각 관에 적힌 숫자는 하나하나가 꽤 길다. 더해서 중복 숫자도 있다.
‘각 수의 개수는 대체로 짝수가 많고…… 홀수가 섞여 있군.’
어라. 잠깐만.
이거 알 것 같은데?
“성녀님?”
“뭔가 아셨나요?”
의심이 들면 시도해 보면 그만.
1분 정도 암산으로 가설을 검증한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폴리비우스 암호네요.”
“……폴리비우스 암호?”
“폴리…… 예?”
긴가민가한 눈치인 이즈미와 멀뚱한 세드릭.
나는 두 사람을 위해 설명했다.
“폴리비우스 암호는 5×5 형태의 치환 암호예요. 대부분의 문자에 적용이 가능해서 꽤 범용성이 높죠.”
정확히는 그리스 역사가인 폴리비우스가 만든 치환 암호로, 그리스어에서 시작한 암호를 현대에서 알파벳으로 대체해 사용 중인 암호다.
판타지 세계에 왜 이런 게 있냐고 묻는다면…… 원작 작가는 일본인이잖아! 지구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게 너무 당연하다.
“아래위로 1부터 5까지 숫자를 나열한 다음 문자를 순서대로 배열해서, 해당 문자가 나올 때 세로 수와 가로 수를 번갈아 가며 읽으면 해독할 수 있어요. 어린애들이 쓸 만한 간단한 암호…… 음.”
세드릭의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림을 그려 주는 게 나을 듯하다.
“용사님, 단검 좀 빌려주시겠어요?”
“네!”
이즈미의 단검을 손에 넣은 내가 나무 벽에 표를 그렸다.
“이렇게 생긴 표랍니다.”
“아! 기억났어요!”
“…과연, 이해했습니다.”
“이 표를 토대로 아까 말씀해 주신 숫자를 해석해 보면 이렇지요.”
나는 수와 단어를 쭉 나열했다.
1533441542는 ENTER
23114413154254는 HATCHERY
5354311532는 XYLEM
352331341532는 PHLOEM
43343444는 ROOT
…….
“XYLEM(물관)과 PHLOEM(체관), ROOT(뿌리) 뒤에 적힌 숫자들은 아마 번호일 거예요. 폴리비우스 암호에 없는 6 이상의 수나 홀수 암호가 있는 이유기도 하고요.”
폴리비우스 암호는 해독법에 의거해 원칙적으로 반드시 5 이하의 수로 이루어지며, 한 단어를 이루는 숫자의 수가 짝수여야 한다.
뒤에 붙은 저 번호만 없었어도 좀 더 빨리 알아챘을 텐데.
“그럼 저희가 가야 할 곳은…….”
“네.”
131533441542.
CENTER.
“중앙으로 출발하죠.”
내 자신 있는 발언과 함께, 우리 셋은 관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
눈을 뜬 릴리아나가 맞이한 것은 꿈만큼 가혹한 현실이었다.
아니, 꿈‘만큼’은 아닐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세계에 어머니와 성녀가 살아 있는 건 확실했으니.
‘…하지만 이건 곤란하군.’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사건을 해결하는 디올드의 곁을 지키는 중이었다. 한데 지금은?
“거대한 나무…….”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가지. 아직 해가 떠 있을 시간임에도 밤처럼 시커먼 배경 아래로 소중한 왕국민들이 쓰러져 있었다.
“릴리아나!”
“디올드?”
뒤를 돌자 이마에 식은땀을 닦고 있는 디올드가 보였다.
“한 시간 전부터 계속 이 상태야. 아니,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너도 꿈을 꾼 건가.”
“그래. 한 시간 전에 깨어났어.”
릴리아나는 과연 디올드가 어떤 꿈을 꾸었을지 궁금해졌다. 하나 지금은 그런 하찮은 호기심보다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용사는 어디 있지?”
“내가 아까 용사가 있을 곳에 가 봤는데 아무도 없었어. 아무래도 먼저 깨어나 돌아다니고 있는 모양이야.”
“…과연. 그저 운으로 성검을 받은 게 아니라는 건가.”
멋모르는 귀족들은 그의 한미한 가문을 보며 수군거렸지만, 주신이 선택한 자가 범인일 리 없다.
“우선 저 거대한 나무 근처로 가 보는 게 좋겠어. 릴리아나, 너는 여기서 기다려도 된다.”
“무슨 소리지?”
릴리아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도 이 나라의 왕족이다. 국민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가만히 있는 건 도리에 맞지 않아.”
“……그래.”
디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아나는 마법에 지독할 정도로 재능이 없다. 하나 그간 단련해 온 호신술이 있으니 제 몸 하나는 지키겠지 싶었다.
“그럼 가 볼,”
까.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음머어어어!”
“끄악!”
지나가던 미노타우르스에 치인 디올드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디올드 수난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