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38)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38화(38/101)
#38. 하루(春)의 끝 (3)
“디올드!”
릴리아나는 순식간에 큰 부상을 입은 디올드를 향해 외쳤다. 속이나 썩이는 혈육이지만 어디 가서 다치고 돌아온 적은 없었다.
“크윽.”
땅에 떨어진 디올드가 잘게 신음했다. 릴리아나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이어진 외침에 몸이 굳어 버렸다.
“릴, 피해!”
“무슨-”
고개를 든다.
그러자 눈앞에 있는 마물.
거대한 소 형태를 한 놈은 시뻘건 눈을 빛내며 릴리아나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맞으면 즉사다.
공포에 휩싸인 그녀가 눈도 채 감지 못하고 미노타우르스를 바라만 볼 때, 땅에서 거대한 토벽이 솟아올랐다.
퍼억!
일말의 차이가 그녀를 살렸다. 토벽이 무너지며 생긴 충격에 흙더미를 뒤집어쓴 릴리아나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디올드가 마법을 쓴 거야.’
마물은 본능적으로 마력을 감지한다. 그 말인즉 방금 마법으로 놈의 이목이 디올드에게로 쏠렸다는 의미다.
릴리아나는 소리치지 않았다. 뿌연 흙먼지 너머 미노타우르스와 대치하는 디올드가 보였다.
“이쪽이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미노타우르스를 맞이했다. 하나 오랜 세뇌로 수련을 게을리한 그가 어지간한 기사단도 상대하기 어려워하는 중급 마물을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크윽…!”
곧이어 미노타우르스에게 들이받힌 디올드가 이를 악문 신음을 냈다. 방어력이 강한 지계마도의 소유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전신의 뼈가 부서져 절명했을 일격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마물과 대치하는 디올드를 보며, 릴리아나는 짙은 무력감을 느꼈다.
디올드와 자신.
크게 다를 것도 없다고 여겼다.
저런 녀석 따위 왕재로 인정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면 어떨까 상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자신은 명백한 짐이다.
약한 마력으로도 아득바득 버티는, 투지 가득한 디올드의 붉은 눈을 보는 순간 힘이 풀려 버린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젠장…….’
뭐가 왕족의 의무이자 권리인지.
온 나라의 국민이 위험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뻗어 허공에 마력 술식을 그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머릿속에 선명히 기억하는 방정식을 도저히 그릴 수 없었다.
온몸의 마력 회로가 요동친다.
더 이상은 네 영역이 아니라는 듯, 재능도 없는 주제에 마력을 펼친 징벌이라는 듯 다가오는 끔찍한 고통에 몸이 바르르 떨렸다.
까득.
혀가 깨물려 피가 흐른다. 하나 그런 상처에 반응하기엔 몸을 지배하는 격통이 지나치게 괴로웠다.
또 그보다 괴로운 것은 모든 것을 디올드에게 떠맡긴 채 숨어 있는 자신이다.
결국 그녀는 소리를 내었다.
“디올드, 몸을 피해!”
“릴?”
“싸우지 말고 도망쳐, 멍청아!”
그게 무슨 소리냐는 디올드의 말에, 릴리아나는 이를 악문 채 외쳤다.
“넌 세자야! 네가 죽으면 이 나라의 미래가 사라진다고!”
그러자 그의 눈이 흔들렸다.
보위를 이을 왕세자의 가치는 일개 왕녀와 비교할 수 없다.
그가 죽는다면 나라는 얼마나 혼란해질 것인가. 7촌이 넘는 방계를 왕세자로 봉해 허수아비로 삼으려는 탐욕스런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터였다. 그 과정에서 내전이라도 일어나면 무고한 국민의 피가 흐른다.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디올드가 아니라 자신이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혈육.
방금 떠올린 사실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오랜 세뇌로 뇌세포가 괴멸하기라도 한 건지 아직도 얼쩡거리고 있다. 혹은 다리뼈가 죄다 부서져 도망칠 수도 없는 것이거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녀는 마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채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마력이 거칠게 몸부림친다.
“왕녀님의 마력 회로는 폐쇄적입니다. 마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배출구가 없으니 마법을 쓸 수 없는 것이지요.”
“뚫을 수는 없나?”
“마력 회로는 혈관과 같습니다. 다만 한 번 상처가 나면 아물지 않죠. 왕녀님의 경우에는 마력 회로를 억지로 뚫으려고 한다면…… 아마 죽을 겁니다.”
빌어먹게 저주받은 체질.
왕궁 마법사의 선언을 들은 릴리아나는 마법을 포기했다.
억지로 마력 회로를 뚫어 봤자 기껏해야 한두 발. 그 정도를 쏟아부은 뒤엔 죽은 목숨.
그렇다면 포기하는 쪽이 현명하잖아.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래.
적어도 이번만큼은.
두 손이 가지런히 모인다.
‘신이시여, 바라건대.’
평생 포기하고 살았잖아.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큼은.
빌어먹을 오빠를 구할 힘을 줘.
해일처럼 쏟아지는 마력이 회로를 갉아먹는다.
뼈가 부서지는 격통 속에서, 마침내 약해진 한 부분이 부서졌다.
뚫린 구멍에서 마력이 쏟아진다.
지계마도 제1장 7절.
『지탄(地彈)』
무한하게 존재하는 지계마도. 그중에서도 하품이 나올 정도로 간단한 1장의 마법.
마법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가 쓰는, 밀짚 더미를 꿰뚫는 정도로 아주 약하고 시시한 마법이.
25년 동안 갇혀 있던 방대한 마력을 품고 거대해진다.
투콰아아아아!
찍어 누르는 형태의 폭력적인 발현. 뛰어난 마법사가 본다면 혀를 찰 정도로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헉, 허억…….”
릴리아나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쏜 마법의 여파를 보았다.
미노타우르스를 일격에 절멸시킨 탄환은 그 뒤를 이어 거대한 홈을 만들었다. 뿌연 흙먼지가 대지를 뒤덮는다.
“제기랄.”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가 주저앉았다. 깨진 마력 회로로 계속해 생명력과 같은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팔로 눈을 덮은 릴리아나가 중얼거렸다.
“나도 할 수 있었어…….”
할 수 있었다고.
***
“뭐지?”
나무를 울릴 정도의 진동에 나를 안고 관을 오르던 세드릭이 멈칫했다. 앞장서던 이즈미 역시 고개를 갸웃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진일까요?”
“이 상황에 지진이라면 마족 녀석의 소행이겠군. 서둘러야겠어.”
세드릭의 판단이 옳다. 애초에 지국은 지진이 잦은 나라도 아니고.
‘원작에서 지진은 없었는데.’
벌써부터 뭔가가 뒤틀린 거라면 난감하다. 적어도 창천까지는 정보의 우위를 확실히 누려야 하거늘.
마음이 초조해졌다.
“조금 서두르죠.”
“예.”
짐에 가까운 내 재촉에도 두 사람은 불평하지 않고 따랐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작에서 봤던 ‘중앙’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사이버펑크?”
“이건…… 공국에서나 있을 법한 모습이군. 설마 나무 안에 이런 공간이 있을 줄은.”
“저, 어떤 모습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아.”
내 말을 들은 세드릭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복잡한 기계장치가, 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나는 횡설수설하는 세드릭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어차피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는 투시로 볼 수 있다. 설명을 요청한 건 단지 컨셉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질적인 공간이야.’
창천의 나머지 부분이 판타지 속 거목과 같았다면, 이곳만큼은 다르다.
가로세로 20m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의 방을 거무죽죽한 철제 가벽이 둘러싼 형태.
그 벽 주변으로 커다란 컴퓨터가 죽 늘어져 있다. 회로 소자가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 바뀌며 만들어졌던 2세대 컴퓨터 정도다.
당연하지만 성능은 그리 좋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비포장도로에서 마차나 굴리는 동대륙 남부에선 감히 상상도 못 할 신기술이겠지만.
“저걸 건드려서 문을 열어야 하는 방식인 것 같은데…… 전 이런 거 못 해요.”
이즈미는 빠르게 포기했다.
21세기 지구를 살다 온 그에게 눈앞의 컴퓨터는 작동 원리를 전혀 모르는 골동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비켜라. 내가 한번 만져 보지.”
나를 조심히 내려놓은 세드릭이 자신 있게 메인 보드에 다가갔다.
“어려운 구조는 아니군.”
그는 의외로 컴퓨터를 잘 만졌다.
‘원작에선 비밀번호 해제에 실패한 이즈미가 이것저것 만지다 우연히 심부로 향하는 문을 열었지.’
문제는 그 ‘이것저것 만지다 우연히 열림’이 이번에도 따라 줄지 모르겠다는 거다. 애니메이션에선 그냥 자포자기한 채 막 눌러 대다 얻어걸린 묘사였으니…….
여기서는 느려도 확실한 쪽에 맡기는 편이 낫다. 서대륙 토착민인 세드릭은 이 시대의 과학 기술에 익숙한 듯했으니.
‘다행이네.’
솔직히 저건 나도 못 다룬다.
2.5세대 컴퓨터라니 알 게 뭐람?
내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 아니라 물리학이다. 차라리 핵융합에 써먹을 토카막 만들기가 더 쉽겠다.
“…음.”
차근차근 문제를 해결하던 세드릭은 곧 신음했다. 뭔가에 막힌 모양이다.
“무슨 일인가요?”
“…그게, 마력 회로를 이용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풀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들려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윽고 문제를 확인한 내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완전 내 전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