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39)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39화(39/101)
#39. 하루(春)의 끝 (4)
옛 시대의 컴퓨터란 크기는 무식하게 큰 데다 조금만 써도 금세 발열되곤 했다. 현대에 이르러선 초고밀도 집적회로와 인공지능, 병렬 처리 기술은 물론 각종 냉각 장치의 발달로 소형화가 가능해진 것.
세드릭이 처한 문제는 이중 ‘발열’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즉 소재를 활용해 CPU 온도를 조절해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인데, 이를 위해선 수계마도나 공계마도를 써야 한다……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 부분은 의외로 지계마도로 해결이 가능하다. 열전도율이 높은 소재를 연성해 컴퓨터의 열을 옮겨 오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마력을 못 쓰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발동자가 발동하려는 마법의 술식을 전부 이해해, 처음부터 진을 구축하는 방법.
둘째, 마법 술식에 해박한 타인이 제조한 1회용 ‘마력 스크롤’에 마력만 불어넣어 발동하는 방법.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은 2번뿐이다. 정확히는 2번에 해당하는 술식을 그려 주는 사람 역할이랄까.
미리 구비해 두었던 빈 마력 스크롤을 폈다. 어떤 마법 술식을 구축할지는 금방 판단할 수 있었다.
지계마도 15장 4절
『소재연성 – CNT』
비촉매 유기화학기상증착법(catalyst-free MOCVD)은 증기 형태의 전구체를 고온, 저압 상태에서 증착 성장시키는 방법이다. 일반적인 CVD 대신 MOCVD를 이용하는 이유는 그편이 훨씬 간편하고 박막 형성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연성되는 금속 유기 원료가 대부분 독성을 품고 있어서 술자에게 다소 위험이 따르지만, 그 정도는 제어력을 높이면 해결 가능.
굳이 효율을 따진다면 액상 공정법이 더 안전하고 쉬울지도 모르겠으나, 안타깝게도 내 전문은 수계가 아니라 지계마도 쪽이다. 세드릭에게도 이쪽이 더 편할 테고.
스크롤에 빼곡히 적힌 연성 회로를 바라보고 있는 세드릭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그는 마법 술식에는 영 문외한인 모양이다.
뭐, 그럴 수밖에.
그는 순도 100% 마력으로 탄생한 마족이다. 굳이 어려운 술식을 배워 효율적으로 뽑아낼 필요 없이, 간단한 술식을 구축해 무한에 가까운 마력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 아니겠는가. 아니면 검으로 베든가.
이래서 천재는 너무하다. 나 같은 범재는 훨씬 오래 노력해도 마법 발동 하나 못 하는데 말이다.
“자, 세드릭 님. 이 스크롤을 바탕으로 해결해 보세요.”
“…아, 예.”
그는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날 물끄러미 보다, 이내 더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결심했는지 스크롤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
드르륵.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서 있던 바닥 일부가 열리며 아래로 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좋아. 이제 거의 다 왔다.
“어서 안으로 들어…….”
가자.
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라?
“성녀님?!”
“유스!”
시야에 털썩 쓰러지는 ‘유스티나스’가 보인다. 세드릭이 재빨리 안아 들었건만 왠지 몸이 춥다.
“체온이 심각하게 낮습니다.”
황급히 내 곁으로 다가온 이즈미가 맥을 짚으며 진단했다.
“더 이상 움직이면 위험하겠어요. …세드릭 님, 계단 아래는 저 혼자 갈 테니 여기서 성녀님을 지켜 주십시오.”
“알겠다.”
“잠, 잠깐만요.”
순조롭게 퇴장 조치를 당할 것 같은 위기감에 손을 뻗었다.
“더 이상은 안 돼요. 정말로 목숨을 버릴 생각은 아니시겠죠?”
솔직히 버려도 상관은 없는데. 하반신 마비도 되살릴 겸 해서…….
하지만 여기서 그런 속내를 있는 그대로 까발릴 수야 없다.
“용사님, 잠시 귀를 좀.”
비장한 표정의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속삭였다.
“…… …….”
내 이야기를 들은 그가 대답했다.
“무슨 뜻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시도할- ……가 있…… 님? ……. 녀님!”
이런. 의식이 점차 흐려진다.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역시 이 몸으론 무리였나?
마지막으로 외치는 세드릭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앞이 완전히 깜깜해졌다.
***
유스티나스가 기절한 이후, 이즈미는 떠밀리듯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두 손에 성스러운 힘이 담긴 성유성을 꼭 쥔 채였다.
“설마 여기까지 올 줄이야.”
“네 녀석이 창천인가?”
“정답♥”
아래에는 그녀의 말대로 숨 막히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다.
특징이라면 그녀의 몸에 노출이 과하게 많다는 것 정도일까. 제대로 된 옷이 아니라 나무줄기로 대충 중요 부위만 가려져 있었는데, 마족보다는 드라이어드에 가까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이즈미가 동요하는 일은 없었다. 의사로 살다 보면 타인의 나신을 보는 건 꽤 흔한 일이었으니.
“그럼, 어디 그놈의 주신이 선택한 용사가 얼마나 강한지 볼까?”
하나 이어지는 공격에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창천의 손이 머리카락 끝을 잘라 내며 지나갔다.
조금만 피하는 게 늦었어도 목이 달아날 만큼 예리한 공격이었다. 살수에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첫 번째 공격은 경고였어.”
그녀의 입가가 느른히 풀렸다.
“네 실력으론 절대 나를 이길 수 없을 텐데…… 어때, 내 제안 하나 들어 보지 않겠어?”
“나는 마족과 타협하지 않아.”
“저런.”
직후 바닥에서 나무 덩굴이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이즈미는 화들짝 놀라 천장으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위쪽에서도 촉수 같은 가지들이 뻗어 왔다.
숨 돌릴 틈 없는 공격이었다. 공간 자체가 창천의 영역이니 발버둥 쳐도 점차 포위망만 좁혀 올 뿐, 벗어날 방법은 요원하다.
결국 사지가 묶인 그는 창천과 아주 가까워졌다.
“성녀를 죽이고 우리 편이 되는 건 어떠니? 인간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단다.”
“종족이 다를 텐데.”
“그건 간단해! 마족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자식은 마족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녀가 활짝 웃었다.
“용사의 아이라면 충분히 가질 가치가 있지.”
이즈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린 창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그녀는 아름답다. 색기로만 따지면 지금껏 보아 왔던 여자들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하.”
“…왜 그렇게 웃는 거니?”
“아니. 그냥, 성녀님이 이야기한 그대로라 우스워서.”
성녀라는 단어에 창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즈미는 힘을 주어 사지를 속박한 나뭇가지를 끊었다.
[성검 형태변환 – 망치]그의 손에 들린 성검이 순식간에 둔탁해졌다. 거대한 망치로 변한 성검을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 바닥을 향해 내려친다.
콰아앙!
“아아악!”
동시에 하루가 비명을 내질렀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널 죽이는 중인데?”
다시 한번 내려친다. 그러자 하루가 또다시 몸을 비틀었다.
공간이 요동친다.
‘성녀님의 말이 맞았어.’
그는 다시 한번 망치로 바닥을 내려치며 생각했다.
“이 나무가 생기고 제 눈앞에 있던 창천이 사라졌어요. 아마 심부인 저 안쪽에 있겠지요.”
“어쩌면 제게 그랬듯 당신을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회유하려 들지 몰라요. 거절하는 즉시 자존심이 상해서 용사님을 공격할 거고요.”
“그때, 눈앞에 보이는 형체에 집중하는 대신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마족은 단지 몸을 벤다고 죽는 종족이 아니니까…….”
하루가 에로 게임에 나오는 악역 히로인 같은 (왠지 CG 회수를 하면 배드 엔딩이 나올 둣한) 모습으로 나타나 19금 회유 제안을 한 것부터 어이가 없었다.
이후의 전투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그녀의 조언이 없었다면 이어지는 공격에 대비하지 못하고 큰 부상을 입었으리라.
“그거 아세요? 주신께선 사도의 바람을 꼭 이루어 주신답니다.”
그리고 마지막 힌트.
그 힌트에 힘입어 염원한 순간, 소드(Sword) 형태였던 성검은 빛을 내며 커다란 망치로 바뀌었다.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검을 망치로 바꾸다니! 에너지 보존 법칙에 어긋나잖아!
이럼 양자역학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이게 진짜 이세계…?’
정신에만 존재하는 마력이 실체화되는 원리에 의문을 가지는 것도 잠시.
“꺄아아아악! 그만! 그만해!”
“역시 그랬구나.”
망치로 공간을 열심히 부수던 이즈미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가설을 입증해 냈다는 쾌감이었다. 조언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처음부터 내 앞에 있는 너는 허상이었지? 살초처럼 보이는 공격도 전부 나뭇가지가 한 거였어.”
“아파! 아파! 죽어!”
고위 마족은 아파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고통에 취약하다.
유스티나스가 해 준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즈미는 허리춤에 꽂아 둔 마력 스크롤을 펼쳤다.
“이만 끝내자.”
화계마도 1장 1절
『불꽃』
화르르륵.
불이 붙자 하루의 형상은 한층 더 괴로워하더니, 이내 흐릿해지다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공간이 흔들리는 건 여전했다. 이제는 형상이 아니라 나무 전체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서둘러야겠어.’
한시라도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즈미는 눈 깜짝할 사이에 계단을 뛰어올라 기다리고 있던 세드릭에게 외쳤다.
“어서 탈출해요! 불났으니까!”
“…불?”
의문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혼절한 유스티나스를 안은 세드릭을(어째서인지 평소보다 식은땀이 가득했다. 생긴 것답지 않게 불을 무서워하는 걸까?) 먼저 출구 쪽으로 내려보낸 이즈미는 혹시 몰라 망치로 중앙 컴퓨터실을 죄다 부순 뒤 따라갔다.
나무는 여전히 비명을 내지른다.
온몸을 비틀던 나무가 거무죽죽하게 물들다 완전히 죽어 버린 건 그들이 아슬아슬하게 밖으로 탈출한 직후였다.
이즈미는 허공으로 흩날리는 나무를 보며 심장이 철렁했다.
‘중심부는 대략 상공 500m. 만약 그런 곳에서 떨어졌다면…?’
성검의 가호를 받는 자신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만, 세드릭과 유스티나스를 안전하게 지킬 순 없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선득했다.
‘응? 잠깐만.’
가슴을 쓸어내리던 이즈미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럴 거면 그냥 밖에서 불붙이면 됐던 거 아닌가?”
그럼 더 편했을 것 같은데?
괜한 고생을 한 듯한 느낌에 그는 조금 억울해졌다.
*참고논문
바텀업 기반의 반도체 나노와이어 합성방법 및 응용소자 연구 – 저자 이원우, 양동원, 박원일
Metalorganic vapor-phase epitacial growth of vertically well-aligned ZnO nanorods – 저자 박원일
탄소나노튜브 합성 개발 동향 – 저자 류승철, 석중현, 한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