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45)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45화(45/101)
#45. 마도사(魔道士) (3)
“허.”
그녀의 눈썹이 까딱였다.
“세상이 꼭 위험에라도 처한 것처럼 말하는군.”
“실제로 그렇답니다.”
내 즉답에 붉은 눈에 미미한 놀라움이 퍼졌다.
“이번에는 운 좋게 창천을 물리쳤지만, 그녀보다 강한 고위 마족은 앞으로 셋이나 더 있어요. 그 역경을 헤쳐 나가면 상대하기조차 두려운 마왕이 버티고 있겠지요.”
“잠, 잠깐.”
릴리아나가 입을 벌렸다.
“마왕이란 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존재 아니었던가? 그게 정말 있는 거라고?”
“있어요.”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테르 님께서 용사를 발탁하신 시점에서, 마족과 인간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요.”
“…….”
그녀는 말이 없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이 세계의 인간들은 마왕은커녕 고위 마족의 존재조차 잘 믿지 않는다.
대중에 처음 존재가 알려진 것도 ‘창천 사건’ 이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마저도 내 덕에 범위가 축소된 지금은 더 늦춰졌을 것이다.
아무튼 릴리아나는 그렇게 한참을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대 말대로 정말 세상이 위험하고, 누군가는 꼭 그 일에 나서야 한다고 가정하겠다.”
“가정이 아니라 진짜인걸요.”
“왜 하필 나지?”
그건 순수한 의문이었다.
“이 나라에는 나 따위보다 훨씬 뛰어난 인재가 많아. 마법을 쓸 때마다 그대가 대신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실패작이 아니라, 멀쩡한 대마법사를 영입하는 게 낫지 않나? 성녀의 명성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터인데.”
“아니요.”
나는 단호히 말했다.
“다른 사람은 의미가 없어요.”
“왜-”
“제가 만들 총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왕녀님뿐이니까요.”
“…굳이?”
내 입가에 단단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은 저렇게 당황한 표정이지만, 곧 이해할 테지.
그녀 이상으로 용사 파티에 어울리는 인물은 없다.
내가 보증해.
“총이 완성되면 알게 될 거예요.”
당신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
“유스, 답답하진 않아? 내가 업어 줄까? 산책 나갈래?”
“…난 괜찮아.”
릴리아나의 총을 기다리는 며칠.
정체를 까발린 세드릭은 전 컨셉은 죄다 버리고 팔불출이 되었다.
“그럼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 대륙 끝까지라도 가서 구해 올게.”
“그 정도는 필요 없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아하하…… 그럼 이만 쉬게 해 줄래? 조금 피곤하네.”
“아, 으응. 편히 쉬어.”
과한 호의를 거절하면 풀이 죽어 버린다.
‘이걸 어디에 써먹는담.’
세드릭을 제대로 통제할 생각이긴 했어도, 이토록 구차한 꼴이 되는 건 예상 밖이었다.
더불어 우리를 상당히 묘한 눈으로 보는 이즈미도.
“성녀님.”
결국 세드릭이 잠시 (아마도 화장실 때문에) 자리를 비웠을 때, 이즈미는 내 쪽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세드릭 님에게 협박을 당하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
“네?”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치만 누가 봐도 성녀님 쪽이 협박당할 것 같이 생겼고.”
그렇긴 해.
하지만 요즘 트렌드는 눈 감고 다니는 미소녀가 최종 흑막인 거라구?
고전 용사물 주인공처럼 방심하다간 훅 가 버리고 말아! 세드릭에게 찔렸던 이즈미처럼!
“안심하세요. 그저 서로가 누구인지 늦게 알았을 뿐이랍니다.”
“누구인지?”
“사실 저, 서대륙 출신이거든요.”
내가 후후 웃었다.
“세드릭과는 어린 시절을 잠시 같이 보냈어요. 어른이 된 지금은 너무 많이 달라져서……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지만요.”
어느 정도 각색된 이야기다.
“아아.”
그러나 사람을 딱히 의심하지 않는 이즈미는 곧바로 납득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소꿉친구라면 그럴 만도 해요.”
“신기한 일이지요?”
“정말로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이즈미가 문득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다.
“참, 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요.”
“뭔가요?”
“창천이 불에 약하다는 걸 알았으면 그냥 밖에서 태우는 게 훨씬 효과적이었던 거 아닌가요?”
할 수 있을 법한 생각이다.
나 역시 원작 설정을 제대로 파 보지 않았다면 정말 밖에서 불꽃놀이나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틀렸다.
“창천을 무너뜨린 건 용사님의 성검이에요. 고위 마족의 약점이 아무 망치로나 부서질 리가 없죠.”
“그럼 불은 왜 붙였나요?”
“확인 사살이랍니다. 어쨌든 바깥을 태운다고 해도 크게 의미는 없었을 거예요.”
<이세계의 엑스트라로 환생한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왕을 물리친다>는 여러모로 클리셰 파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근본은 정통 용사물이다.
그런 정통 용사물에서 ‘사실은 용사 없이도 이런 꼼수가 가능했답니다’ 같은 전개가 허용되었다간 순식간에 재미가 없어져 버린다.
만약 위 내용이 허용되는 세계라면, 그건 오히려 ‘빙의용으로 대충 만들어진 원작’인 게 아닐까?
‘보통 빙의자들은 꼼수로 주인공을 대체해 버리곤 하니까.’
아니면 아예 원작 주인공이 쓰레기라 처단한다거나. (이쪽은 주로 빙의자와 주인공의 성별이 같다.) 혹은 아예 히로인으로 만들어 버린다거나. (반대로 이쪽은 빙의자와 주인공의 성별이 다르다. 특정 장르를 제외하곤.) 어쨌든.
원작의 숨겨진 이스터에그란 결국 미래 지식을 이용해 앞을 선점하는 ‘진짜 주인공’을 위한 가식적인 장치에 불과하다. 그런 형편 좋은 이야기가 매번 등장할 리가 없다.
내가 주인공도 아니고.
……아닌가?
‘어?’
혹시 나 주인공?
사실 원작 속 개화하지 못했던 릴리아나의 재능을 펼치게 만든 것도 하나의 이스터에그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어지간히 학문에 미친놈이 아니면 풀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이스터에그.
‘게다가 상태창도 보이지.’
주인공은 보통 재미없는 힐러가 아니라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무시했던 가설인데, 생각해 보면 여자주인공인 경우엔 성녀 주인공도 간간이 있었던 것 같기도.
“…….”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정말 내가 주인공이라면, 이 사고의 흐름도 누군가의 유희 거리로 소비되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인간의 오락을 위해 만들어지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흠…….
저기, 독자님?
듣고 계세요?
글자가 빨개지면 무섭나요?
아니면 제가 알아채서 무섭나요?
아, 화면 속이라 안 무서우려나?
“성녀님?”
“네?”
“갑자기 말이 없으셔서 불렀어요. 혹시 아직 다리가 불편하신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요.”
“별거 아니랍니다.”
나는 씩 미소 지었다.
“그냥 잠깐 장난을 쳐 봤어요.”
“무슨 장난이요?”
“속으로 하는 장난.”
내가 검지를 입으로 가져다 대며 쉿, 하는 표시를 하자 이즈미가 잘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성녀님은 가끔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요.”
“미안해요. 어렵나요?”
“아뇨. 그런 점도 좋아요.”
간단히 넘긴 그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할 생각인 듯했다.
“그보다 성녀님, 저희는 언제쯤 떠나게 되나요? 슬슬 다음 행선지가 궁금해서요.”
“곧 떠날 거예요. 왕녀님의 무기만 완성된다면.”
그 이야기에 이즈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왕녀님을 파티에 들일 생각이세요?”
나는 약간 걱정이 되어 물었다.
“싫으신가요?”
내가 사실상 리더 자리를 쥐고 있지만, 그래도 명색이 ‘용사 파티’인데 이즈미의 의견은 반드시 존중하고 싶다.
릴리아나의 효율성은 두 번째 문제다. 대체 불가한 주인공의 멘탈 케어가 훨씬 중요한걸.
“아뇨, 싫은 건 아니에요! 저는 동료가 는다면 환영인걸요.”
다행히 대인 이즈미 선생은 릴리아나를 싫어하지는 않는 듯했다.
“다만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왕녀님은 지금 마력 회로가 파괴된 상태인데.”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성녀님의 성격상, 그런 불안정한 동료를 파티에 넣지는 않을 거라고…… 멋대로 판단했네요.”
그 모습을 본 나는 잠시 눈만 깜빡인 채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내 이미지, 왠지 계획보다 훨씬 차갑게 잡혀 있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