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46)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46화(46/101)
#46. 마도사(魔道士) (4)
“아! 이상한 뜻은 아니에요.”
내가 한참을 가만히 있자, 이즈미는 황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성녀님은 다른 사람이 희생당하는 걸 극도로 경계하니까요. 용사 파티에 들어오라는 제안은 언제나 신중히 하실 거라고 여겼을 뿐이에요.”
뭐야. 그런 거였나.
‘너무 예민했군.’
릴리아나에게 대놓고 ‘지나친 공리주의’에 대한 정곡을 찔린 이후라, 모든 게 나에 대한 분석으로 느껴진 탓이다.
“용사님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왕녀님은 정말로 우리 파티에 필요한 인재라 어쩔 수 없었어요.”
“그렇군요!”
“…제 말이 의심스럽진 않나요?”
“그럴 리가요. 저는 성녀님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아요. 절대로요!”
이것 봐.
이즈미의 녹색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치유되는 기분이다.
시커먼 속내를 숨긴 나와 달리 언제나 선하고 강한 주인공.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그에게 내 본성을 들킬 정도라면 이미 주변인들도 죄다 안다는 뜻.
왕족으로 산 세월이 길어 감이 유독 날카로운 릴리아나와는 경우가 다르다.
“유스, 식사를 내왔어. …네놈은 아직도 여기 있었나?”
“아! 세드릭 님.”
이어지던 이야기는 세드릭의 등장으로 끊겼다. 보자마자 인상을 쓰며 시비를 거는 세드릭에게 한마디 해 주려고 했더니, 이즈미는 그에 한 술 더 떠 생글생글 웃었다.
“우리 셋이 같이 식사하죠! 오순도순 화목하게!”
“네놈만 빠지면 딱 좋겠군.”
“어? 용사 파티에서 용사인 저를 빼시려고요? 그보다는 상징성이 없는 세드릭 님을 빼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울지도…?”
“해보자는 건가?”
으르렁 컹컹.
처음에는 잘 받아 주던 이즈미도 며칠간 이어진 ‘팔불출 세드릭’에는 이골이 났는지, 요즘엔 은근히 해맑은 얼굴로 그를 공격하고 있었다.
덕분에 두 배로 시끄럽다.
‘이딴 게 용사 파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다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머리가 울리네요…….”
“유스! 어디 아파?”
“성녀님, 괜찮으세요?”
너희 때문에 아프다, 이것들아.
***
한편, 궁의 반대편.
“성녀님과 여행을?”
릴리아나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디올드는 결사반대했다.
“지금 네 몸은 정상이 아니야. 그냥 궁에서 편히 쉬다가 적당히 잘생긴 한량과 결혼해. 아버지도 나도 너를 정략결혼으로 소모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건 잘 알지. 안다만.”
릴리아나는 이마를 짚으며 뇌까렸다.
정략결혼.
본디 왕족의 의무란 게 그렇다.
주변국의 왕족과 결혼해 동맹을 맺거나, 대귀족의 자녀를 혼인으로 묶어 강하게 제약을 걸거나 하는 일은 몹시 흔했다.
하지만 릴리아나의 아버지나 세뇌에서 풀린 디올드가 그녀를 한낱 도구로 취급할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러니까 성녀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건, 고작 정략결혼 같은 의무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완전히 결정한 건 아니야. 완성된 무기를 보고 다시 한번 고려해 볼 예정이니.”
“부모님께는 말씀드렸어?”
“아직.”
“그럼 나한테만 상담한 거네?”
약간 신난 어조였다.
릴리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디올드가 세뇌에 빠져 있던 때라면 혼자 고민하고 말았겠지.’
그녀는 국왕 부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하나 그와는 별개로, 부모님께 말하기 어려운 사정은 잔뜩 있는 법이다. 어릴 때는 남매간에 그런 이야기들을 잔뜩 하곤 했다.
“릴, 좋은 왕이란 어떤 걸까?”
“성군 아니려나.”
“아버지는 백성들에겐 따뜻하시지만 귀족들의 피를 보는 건 주저가 없으시지. 이런 경우도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걸지 잘 모르겠어.”
“그거면 된 거 아냐?”
“됐다고?”
“귀족으로 태어나서 특권을 누렸으니 잘못했을 때 벌도 커야지. 영향력이 큰 사람이 저지른 죄는 파장도 크잖아?”
“릴은 참 귀족들에게 매정해.”
“왕족도 마찬가지야. 숙부들도 그러다 죽은 거 아냐.”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위험천만하고 치기 넘치는 대화였다.
그리고 디올드가 정신을 되찾은 지금, 남매는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받았다.
“무기는 언제쯤 완성된대?”
“아마 오늘쯤.”
“왕녀님! 전에 말씀하셨던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물건이 도착했다. 똑 닮은 남매가 동시에 하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무기를 먼저 집어 든 쪽은 디올드였다.
“총?”
“탈리스만을 박아 넣었지.”
릴리아나가 디올드에게서 소총을 넘겨받으며 설명했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한쪽 총신에 박힌 투명한 탈리스만을 쓸었다.
탈리스만. 마력을 담은 보석.
마도구 제작에 주로 사용되는 중요한 부품이지만, 성녀는 그 보석을 아예 총에 박아 넣었다.
총신과 총열. 총구까지.
총신의 탈리스만은 릴리아나 내부에 축적된 마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린다. 그 마력이 총열을 타고 더욱 증폭되어, 마침내 다다른 총구에서 쏘아지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작용할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전혀 들은 바가 없다.
그런데도 어쩐지 총을 쥐자마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릴리아나는 상기된 표정을 애써 감추곤 서늘한 총신을 쓸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신기하게 생겼군.”
“지국의 마법은 수준급이니까. 굳이 화약으로 된 총을 수입할 이유는 없지.”
물론 지국이 총을 수입하지 않은 건 효용성보다도, 지형적 특성 탓이 컸다.
동대륙과 서대륙을 가르는 대양.
거기에 동대륙 중앙을 가로지르는 하늘을 찌를 듯 높고 험준한 산맥, 또 그 너머 위치한 커다란 모래사막은 훌륭한 요새인 동시에 외부 세계를 단절하는 장애물이었다.
그렇기에 바로 위쪽에 있는 성국이나 근처 조그만 왕국 몇 개를 제외하면 지국은 아무런 외교 관계도 맺지 않은 폐쇄적인 국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신기한 모양의 총기를 관찰하던 때였다.
“드디어 완성되었나 보네요.”
탁…… 탁. 탁…… 탁.
불규칙한 걸음이 들린다.
본래 규칙적이었던 지팡이 소리는 사건 이후 성녀가 한쪽 다리의 기능을 상실하며 상당히 질질 끌리는 듯한 박자가 되었다.
그 뒤를 커다란 사내가 안절부절못하며 따른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작고 가녀린 성녀가 혹시 발이라도 헛디딜까 조마조마하단 얼굴로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전보다 훨씬 심해졌군. 알 만하다만.’
성녀는 절대 선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소수를 철저히 희생시킬 수 있는 비정한 면모를 지닌 책략가…… 라는 결론을 내린 릴리아나조차, 저절로 동정과 경외감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그러니 처음부터 성녀를 싸고돌았던 재수 없는 서대륙 사내가 저런 식으로 나오는 건 충분히 이해 가능한 범주였다. 릴리아나는 앞을 볼 수 없는 성녀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말했다.
“총이 도착하자마자 왔군.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나?”
“그럴 리가요.”
성녀는 생긋 웃지만, 왠지 전부 통제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통증이 사라졌어.’
동시에 미약하게 그녀를 괴롭히던 아픔이 깔끔히 사라졌다.
깨진 마력 회로에서 오는 고통을 전부 성녀가 가져가 준 탓이리라.
“자, 그럼. 왕녀님.”
희고 가는 손이 허공을 더듬다가 그녀의 팔로 안착한다. 그 일련의 과정이 릴리아나의 심장을 거세게 움직였다.
죄책감? 불편? 동경?
“한 번 시험해 볼까요?”
혹은…… 설렘.
릴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를 옮길 필요는 없었다.
남매가 있던 장소는 처음부터 궁전의 훈련장이었으니까.
“쏘는 법은-”
“됐어. 설명은 충분히 들었다.”
총의 설계도면을 보며 이것저것 질문할 때 이미 들어 두었다.
게다가 사실, 완성본을 본 순간 굳이 설명이 필요 없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으니까.
철컥, 탁.
기분 좋은 장전음.
그리고.
시이이이이익.
매캐한 탄내와 함께 투명한 탈리스만이 붉게, 또 붉게 물든다.
“이건-”
화계마도잖아.
디올드의 중얼거림은 거대한 파동에 산산이 흩어졌다.
공기가 흔들린다. 그는 오른손으로 금빛 앞머리를 내리눌렀다. 시선은 동생에게로 고정된 채였다.
그녀의 눈이 평소보다 훨씬 짙은 붉은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순간.
탕!
붉은 마력이 공기를 찢었다.
약 50cm가량의 지름을 가진 원통형 마력은 대기 중의 공기를 소멸시키며 나아간다.
그 끝에는 마치 괴물이 살라 먹은 듯 밑동밖에 남지 않은 과녁과 ‘사라져 버려’ 황폐해진 초원만이 김을 뱉고 있었다.
“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릴리아나의 팔이 아래로 떨어진다.
반동 탓에 휘청거리는 그녀를 디올드가 재빨리 붙잡았다. 그러나 릴리아나는 넘어질 뻔한 상황에도 그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태연한 얼굴인 성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거였나? 네가 봤던 재능이?”
꽤 오만한 발언이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평소 그녀를 고깝게 보는 세드릭조차 조금이나마 놀란 듯 검은 눈을 크게 뜨고 있었으니까.
릴리아나가 방금 보인 일격은 그만큼 엄청났다. 일국의 대마법사라도 공기조차 완벽히 소멸시키는 공격은 어려우리라.
마력의 흔적만이 남아 조용한 훈련장에서, 릴리아나의 시선을 받고 있던 성녀가 입을 열었다.
“마도사(魔道士).”
“마도사?”
“꽤 어울리는 호칭 아닌가요?”
마도사(魔道士).
마의 길을 걷는 자.
복잡한 주문식을 만들어 마법학(魔法學)을 탐구하는 기존의 마법사와는 다르다. 릴리아나의 ‘마’는 아무런 계산 없이 순수한 마력만으로 이루어지기에.
동시에 인간의 몸인 이상 마족이 될 수는 없으니, 확실히 적절한 호칭이란 생각이 들었다.
릴리아나는 생경한 기분으로 달아오른 총신을 쥐었다.
“……마도사라. 그렇군.”
“그럼 다시 한번 제안할게요.”
붉은 시선이 성녀에게로 향한다.
햇살이 비쳤다.
“저와 함께 모험하시겠어요?”
황폐해진 초원을 뒤로하고 내밀어진 연약한 손을…….
“-그래.”
릴리아나는 기꺼이 맞잡았다.
무재(無才)에서 천재(天災)로.
그녀의 인생이 격변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