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47)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47화(47/101)
#47. 죽은 자들의 호수 (1)
릴리아나가 파티에 합류한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이 정도라면 대환영이죠!”
뒤이어 릴리아나의 재능을 엿본 이즈미는 화들짝 놀라면서도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고.
“……쓸 만은 하겠군.”
세드릭 역시 어느 정도는 그녀를 동료로 인정한 듯했다.
그리고 마지막 난관은.
“네 뜻이 그렇다면 보내 주어야겠지. 부디 몸조심하거라.”
“테라는 언제든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아.”
국왕 부부가 의외로 쉽게 허가를 내주며 해결되었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성녀님과 함께하는 여정이라면 국가의 영광이지요. 국왕이라는 신분만 아니었어도 직접 따라갔을 겁니다. 하하!”
여기에는 나에 대한 신뢰도 한몫했던 것 같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우리는 지국의 융숭한 대접과 함께 왕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릴!”
“디올드?”
마지막 날, 디올드는 왕궁 바로 앞까지 달려 나와 릴리아나를 배웅했다.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꼭.”
“……싱겁긴. 왜 나왔어?”
“네가 가는 데 배웅해야지.”
릴리아나는 땀에 젖은 디올드를 보며 혀를 찼다.
“걱정하지 마. 불안해서라도 네놈이 왕이 되는 건 두 눈으로 직접 봐야겠으니까.”
“…응!”
그러나 뒤돌아선 그녀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어서, 나는 괜스레 시큰한 감정을 느꼈다.
“엄마 아빠가 누나 공부시키느라 엄청 고생한 거 알지? 억울해서라도 내가 누나 박사 학위 따는 건 꼭 보고 만다.”
‘그렇구나.’
고작해야 캐릭터에 불과한 인물.
주인공과 달리 두고 가도 스토리 진행 자체는 가능한 스페어.
그럼에도 내 근처에서 벗어나면 픽픽 쓰러질 게 뻔한 릴리아나를 굳이 챙기고 싶었던 이유는, 효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생각이 났던 거야.’
저 금발 남매를 보고 있으면 재수 없는 동생 자식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잘되었으면 했다.
…뭐, 그래 봤자 릴리아나가 정말 쓸모없었다면 버렸겠지만.
‘다행이지. 생각보다 시범 사격 위력이 훨씬 좋아서.’
내가 옆에 붙어 있다면 고정 대포 역할 정돈 톡톡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광역기에 한해선 주인공이나 중간 보스 역인 세드릭을 가볍게 압도할 위력 아닌가.
“왕녀님도 타셨으니 이만 출발할까요?”
“좋아요!”
이즈미가 신난 얼굴로 마부석에 앉았다.
사실 마부를 고용해도 별 상관없었을 텐데, 그는 직접 마차를 모는 것도 용사 파티의 모험 같다며 직접 자처했다.
“…….”
덕분에 교대해 주게 생긴 세드릭은 약간 기분이 나빠 보였지만.
‘마부를 데리고 다니는 건 현실적으로 힘드니까. 셋이 번갈아 가면서 몰아 주긴 해야지.’
앞으로 떠날 수국은 험준한 산맥과 거대한 사막을 건너야만 한다.
우리 외에 다른 마부를 고용해 가기엔 지나치게 먼 길이다. 이즈미의 ‘직접 마차를 몬다’라는 건 빠르든 늦든 실행될 일인 셈.
이러면 나만 혼자 노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환자한테 마차 몰게 시키는 게 더 쓰레기잖아? 그치?
“저, 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릴리아나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쓸데없이 눈치 보지 말고 빨리 입이나 여시지.”
“네놈에게 말하려던 게 아니다, 평민.”
“아. 고매하신 왕족 나리께선 평민과 말도 섞지 않으시겠다? 그럴 거면 파티에서 나가지 그래?”
“뭐라고?”
앗. 아아.
또다시 싸움이 붙고 말았다.
직감적으로 두통을 감지한 나는 재빨리 세드릭을 달랬다.
“세드릭,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더군다나 왕녀님은 이제 우리 동료인걸.”
“하지만.”
“내 부탁을 거절할 셈이야? 조금 슬픈걸.”
“……아냐. 내가 잘못했어.”
곧바로 꼬리를 내린 세드릭.
그 풍경을 본 릴리아나의 입이 작게 벌어진다. 좀 놀란 모양이다.
“그리고 왕녀님도 세드릭을 무시하지 말아 주세요. 신분으로 따지면 저도 뒷골목 고아 출신인걸요.”
“그…… 그래.”
릴리아나 역시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뭔가 부러운 듯이 나와 세드릭을 번갈아 힐끔거리는 게,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그, 그게.”
릴리아나는 한참이나 우물쭈물했다.
‘빨리 좀 말하지.’
답답해 죽겠네.
아니, 정정한다. 사실 죽을 만큼 답답하진 않다. 대학원생과 성녀 생활을 하다 보면 기다리는 것쯤은 익숙해지는 법이니까.
그래도 웬만하면 그냥 털어놓고 끝내는 쪽이 깔끔한데.
“그게.”
“네에.”
“왜 저놈은 세드릭이고 나는 왕녀님이지?”
“……네?”
음.
놀란 듯 이야기했다만, 저 말을 들은 순간 릴리아나가 왜 계속 고민했는지는 이해했다.
그러니까…… 저건 나랑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단 뜻이지? 릴리아나가?
“원하신다면 릴리아나 님으로 불러 드릴게요!”
“릴리아나보다…… 음, 아니다. 아까보다 훨씬 낫군.”
어라.
‘애칭까지 부르길 바라나?’
사실 원하는 대로 불러 주는 거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애칭은 아직 세드릭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영역.
이 정도 친밀감에선 이름까지가 적당하다. 갑자기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하면 개연성이 어긋나잖아.
‘그러고 보니 이즈미와도 슬슬 말을 틀 때가 된 것 같기도.’
원작에선 이맘때쯤 용사 파티 멤버들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함께 고생하면서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는 것도 이상하니까.
“아! 릴리아나 님도 저를 이름으로 부르셔도 괜찮아요.”
이즈미와의 호칭 정리를 생각하며 릴리아나에게 말하자,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유스티나스.”
“네에.”
나쁘지 않아.
내가 릴리아나에게 해 준 걸 생각하면 이 정도 호의를 드러내는 건 예상 범위 내 일이다.
세드릭은 *요비스테(원작이 일본 소설이니까 이쪽이 맞겠지?)를 나누는 우리를 영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좀 전에 어르고 달랬던 게 효과가 있는 듯했다.
*요비스테: 呼ぶ(부르다)와 捨てる(버리다)가 합쳐진 말. 직역하면 호칭 버리기. 일본 문화권에서는 ‘님’과 같은 호칭을 떼고 부르거나, 성으로 부르다 이름으로 변경할 때 상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해당 과정을 요비스테라고 부른다. 창작물에서 인물 간의 친밀도를 드러내는 지표 중 하나로 애용된다.
“어라? 분위기가 왜 이래요?”
“아하하…….”
목적지에 반절 정도 왔을 때쯤 이즈미와 세드릭은 자리를 교대했다. 아무래도 릴리아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세드릭이 빠지자 마차 안은 훨씬 숨통이 트였다.
“릴리아나 님, 몸이 불편하면 바로 말해 주세요. 치료해 드릴게요.”
“너나 잘- ……알았다.”
“어? 릴리아나? 너?”
가만히 있던 이즈미는 나와 릴리아나의 호칭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채곤 소리쳤다.
“성녀님! 왕녀님! 저랑도 서로 이름 불러요!”
“그럴까요?”
“내가 왜?”
릴리아나의 말을 들은 이즈미가 ‘엣!’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뭐. 뭐. 뭐.”
“정말 안 돼요?”
반짝반짝. 반짝반짝.
커다란 녹색 눈망울이 빛난다.
순박한 미소년의 눈빛 공격이란 대단한 타격이었으니. 도도한 길냥이 같던 릴리아나조차 윽, 하는 신음과 함께 슥 물러나게 만들었다.
“아니, 그게.”
“전 릴리아나 님과도 친해지고 싶은데!”
“아니, 이미 놨잖나.”
“그래서 싫으세요?”
그녀는 그쯤에서 항복했다.
“마, 마음대로 하든지.”
“야호! 릴리아나도 앞으론 저를 이름으로 부르면 돼요!”
“허. 이젠 존칭까지 빼시겠다? 하나뿐인 직계 왕녀에게?”
“동료끼린 평등하니까요.”
헛웃음을 터뜨리는 릴리아나와 달리 이즈미는 평온했다.
“유스도 그렇게 생각하죠?”
“음, 네.”
나한테도 말이 짧아졌군.
‘확실히 주인공 타입이야.’
본래 소년만화든 용사물이든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묘하게 예의가 없지 않던가. 그러니 이즈미의 태도는 마땅한 주인공의 덕목인 셈이다.
또 그걸 제해도, 나는 한국인.
일본인인 이즈미나 J-판타지의 영향을 받은 이곳 사람들과 달리 초면에 이름으로 불리는 게 당연해서 타격도 없다. 그냥 세계의 상식에 적당히 맞출 뿐이지.
“다들 친해지니까 좋네요! 이따 밤에 같이 캠프파이어도 해요.”
“캠프파이어? 무슨 그딴…….”
“로망이잖아요! 용사 파티라면!”
“어이가 없군.”
릴리아나와 이즈미가 티격태격하는 소리를 배경으로, 마차는 열심히 성국을 향해 달렸다.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중간 거점인 성국에 도착-
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 유스.”
“응?”
“길을 잃었다.”
“…뭐?”
세드릭이 사고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