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49)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49화(49/101)
#49. 죽은 자들의 호수 (3)
‘노숙을 할 수 없다’라는 이유의 칠 할 이상은 내 몫일 터였다.
나머지 삼 할은?
“출발하지.”
당연히 릴리아나다.
아무리 각오를 했다지만 평생을 궁전에서 귀하게 살아온 몸.
성녀로서 종종 오지 파견을 나간 나보다도 모험 경험치가 떨어진다. 그 예로 현재 릴리아나는 체력이 모자란 듯 마차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릴리아나, 졸린가요?”
“말 시키지 마.”
“네.”
릴리아나에게 단칼에 차인 이즈미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유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마을에 여관도 있는 것 같았어.”
“난 괜찮아.”
“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한편 마부석에 앉은 세드릭은 연신 나를 신경 쓰듯 말을 걸었다.
음. 이건 진짜 좋긴 한데 말이야.
‘약간 싸해.’
현재의 세드릭은 지나치게 유스티나스 의존적이다.
만약 내가 죽기라도 하면 회까닥 돌아서 세계 멸망 시나리오를 펼쳐도 이상하지 않단 소리다. 애초에 원작에서 그가 폭주한 이유도 유스티나스 때문으로 추정되니 단순한 기우는 아니다.
‘이걸 고쳐야 해.’
세드릭의 목줄을 쥐고 있되 어느 정도 독립성은 보장해야 한다.
동료들과 유대감이 생기면 지나치게 편향적인 성격이 희석될 듯한데, 어찌한담.
“저, 세드릭.”
“응. 듣고 있어.”
“피곤해서…… 잠깐만 눈을 붙여도 될까? 미안해.”
“미안할 게 뭐 있어. 편하게 자.”
일단 잠든 척이라도 해 보자.
나와 릴리아나가 뻗으면 자연스럽게 이즈미와 세드릭 둘이 남게 된다.
원작에서도 세드릭은 맑고 순수한 사람을 선호했다. 그러니 나만 없다면 자연스럽게 이즈미와 말을 트겠지.
“힘들면 말해요, 세드릭. 언제든 교대해 드릴 테니까!”
“닥쳐. 유스가 자잖아.”
“넵.”
…아닌가?
‘머리 아파.’
유독 세드릭만 섞이지 못하는 파티 분위기를 어찌하면 좋을지.
열심히 고민하다 보니 점점 졸린 것 같기도…… 하고…….
‘핫! 자면 안 돼!’
성녀의 체면이 떨어져!
후, 하. 후, 하.
좋아. 됐다. 이제 쌩쌩해.
쌩쌩…… 해.
……음냐.
***
“저기, 세드릭.”
“…….”
“세드릭?”
“…….”
“세드릭 세드릭 세드릭 세드릭 세드릭 세드릭 세드릭 세드릭~”
“닥쳐. 유스가 깨잖아.”
“네가 대답을 안 하니까 그렇지.”
이즈미가 마부석 쪽으로 나 있는 구멍을 향해 얼굴을 쏙 뺐다.
그러자 찬 숲 공기가 고스란히 닿았다. 부드럽게 흩날리는 갈색 머리 사이로 신록을 닮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딱히 대화할 생각 없어.”
“왜?”
세드릭은 말문이 막혔다.
이즈미 폴리.
그는 세드릭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간 유형이었다.
한없이 순수한 사람.
시골에서 갓 상경한 청년답게 순박한 눈은 때때로 장난기를 가득 담아 휘어진다.
또 말을 걸 때마다 무시해도 끈질기게 다시 다가와선, 강한 거북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정말이지-
‘……아니, 처음은 아니군.’
“나는 유스티나스야!”
돌이켜 보면 유스티나스와의 첫 만남도 비슷했다. 그래서 더 불쾌한 걸지도 모른다.
이즈미 폴리와 유스티나스는 성별을 제외하면 참 닮아선, 아무리 어둠 속에 숨어들어도 특유의 빛으로 주변을 밝혀 버리고 만다.
누군가는 고작 만난 지 몇 주 된 사내에게 과분한 평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스티나스를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온 세드릭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둘은 동류다. 미묘하게 다른.
“유스랑은 어떻게 친해졌어?”
“…알 거 없잖아.”
“왜? 궁금할 수도 있지.”
이즈미가 마차 구멍으로 상체를 쭉 뺀 채 턱을 괴었다.
“꿀이라도 발라 놨나?”
“기분 나쁜 말투로군.”
“아, 너 방금 릴리아나 같았어.”
“지금 누가 누구랑 닮았다고-”
…허.
세드릭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어디까지 받아 줘야 할지 모르겠는 자식이다. 어느 순간부터 짧아진 말도 그렇고.
그 점을 지적하기엔 평민인 세드릭이 처음부터 말을 놓고 있는지라 가만히 있으나…… ‘이것 봐라?’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솔직히, 난 네가 좀 부러워.”
그리고 이것도 의외.
“어느 면이?”
“유스랑 소꿉친구라니. 나도 어릴 때 성녀님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달라졌을까?”
세드릭이 고요히 동요했다.
“난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었거든. 공부도 출세도 연애도 아무래도 좋다는 식이라, 무기력하게 시간을 낭비했어.”
“……한심한 녀석이군.”
“그래. 한심했지.”
이즈미는 순순히 인정했다.
세드릭은 묵묵히 말을 몰았다.
“그런데 이젠 달라져 보려고.”
바람과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탓에 흐려진 발언이었다. 하나 귀가 좋은 세드릭에겐 똑똑히 들렸다.
“…….”
새삼스레 놀랄 일은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사연이 있는 법.
저렇게 태평해 보이는 사내새끼도 저 나름의 고민이 있을 터다.
그러나 세드릭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래 봤자지.’
그는 어릴 적부터 아무런 기억도 없이 뒷골목을 굴렀다. 선명한 첫 기억은 너무나 춥고 배고팠던 날 천사처럼 나타났던 유스티나스다.
한데 그런 유스티나스조차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인물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도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재산을 길거리 고아들에게 나누어 준다니.
어린 유스티나스는 작은 빵 한 조각조차 타인에게 양보했다. 그 비정상적인 희생정신은 끝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살아 있긴 했다.
여전히 남들을 위해 희생하며, 그날의 화재로 눈을 잃은 채.
그리고 이제는 다리도 잃었다.
“세드릭. 나는 정상이 아니야.”
“불꽃에 멀어 버린 눈도, 이번에 다친 다리도 아마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을 거야.”
“물론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내 한 몸을 바치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아. 다만…….”
어릴 때는 잘 몰랐다.
세드릭은 유스티나스를 마냥 강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자신도 힘들 텐데. 부족한 상황에서 더 부족한 자에게 상냥히 손을 내미는 모습은 경외마저 일으켰다.
사실 유스티나스는 비록 대륙의 쓰레기장 키에토, 그중에서도 빈민가에 살던 고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적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 아이를 감히 ‘불쌍한 고아’ 따위로 판단할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세드릭에게 유스티나스는 언제나 고귀한 우상이고, 절벽 위에 금방이라도 꺾일 것처럼 흔들리는 작은 풀잎과 같았다.
그런 감상은 그녀의 실종과 재회 이후에도 이어졌다.
……지금은 다르다.
“성녀라는 직함이 사라지는 순간 몸이 불편한 난 그저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겠지. 어쩌면 그게 네가 나를 피한 이유일 테고.”
“조금 슬펐어.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일이면 괜찮아질 테니까.”
유스티나스도 사람이다.
그녀도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남모른 곳에서 홀로 눈물을 흘린다.
그럼에도 견딘다.
그것이 대의를 위한 길이기에.
성녀로 지내는 동안- 아니,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줄곧 인내만 하고 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세드릭은 더 이상 그녀를 보며 마냥 감탄만 할 수 없었다.
시계 보는 법을 배운 사람이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이제 유스티나스를.
유스티나스를…….
세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사실 세상을 구하는 것 따윈 어떻게 되도 좋으니까, 그녀가 더 이상 괴롭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럴 순 없겠지.
고통받는 타인을 외면하며 누리는 ‘행복’ 따위는 거짓.
유스티나스는 결코 그의 바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절망스러웠다.
“아, 보인다!”
무거운 상념은 이즈미의 외침에 흩어졌다. 그가 가리킨 손가락 방향에는 청명한 호수와 우거진 숲, 그를 둘러싼 작은 마을이 있었다.
[라쿠스 을에 오신 것 환영 니]“…엄.”
마을 입구에 세워진 간판은 군데군데 글씨가 다 떨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세드릭, 이거 맞아?”
“선택지가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이즈미가 영 찝찝하단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용사물에서 보면 이런 마을에선 갑자기 마족 같은 게 나오던데.”
“용사물? 그게 뭐지?”
“어,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되게 수생한 냄새가 난단 소리지.”
“영문을 모르겠군.”
세드릭은 이즈미를 무시한 채 마차를 천천히 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손님이 왔군요.”
젊은 여자가 나타났다.
“라쿠스 마을에선 마차 금지랍니다. 부디 다들 내려 주세요.”
두 남자가 움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