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57)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57화(57/101)
#57. 교양 미궁 (2)
“지하로 갈 거예요.”
생뚱맞은 질문엔 생뚱맞은 대답이라는 걸까.
답을 들었음에도 당최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이즈미는 한참이나 멀뚱히 그녀를 응시했다.
농담은 아닐 텐데.
그간의 언행을 보면 성녀는 결코 헛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영 터무니없는 듯했던 작전조차 결국 죄다 맞아떨어지지 않던가.
라쿠스 마을의 추리도 그렇고.
하지만 이번엔…… 진짜 모르겠는데.
“자연 파괴는 나빠요.”
“네?”
툭, 던진 말에 유스티나스가 의아한 듯 반응한다.
이즈미는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릴리아나의 화력으로 산맥을 평지로 만들려는 생각 아니셨어요?”
“…네?”
“잠깐, 그건 무슨 발상이지.”
당황하는 성녀와 자기 이야기에 놀라 끼어드는 릴리아나.
이걸 보면 역시 기우였던 모양이다. 이즈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릴리아나 쪽은 그렇지 못했지만.
“네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으면 이미 인간이 아니잖아.”
“…역시 그렇겠죠?”
동의하는 이즈미.
“어라? 아뇨, 되긴 할 거예요.”
그러나 이어진 유스티나스의 반응에 두 사람이 입을 딱 벌렸다.
“된다고? 그게?”
“진짜요?”
“릴리아나의 화력이라면 되고도 남죠. 그렇게 되면 혹시라도 산에 거주하는 화전민들이 피해를 입으니 말릴 거지만요.”
“뭣…….”
터무니없는 발언에 릴리아나 더듬거렸다.
지목된 당사자임에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마차 창 너머 웅장히 펼쳐진 산맥을 보면 더더욱 그랬다.
…저걸 평지로 만들 수 있다니. 정말?
“그, 평지 얘기는 제쳐 두고. 지하로 간다는 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아, 릴리아나는 아직 모르시려나요.”
유스티나스는 몹시 평온한 어조로 폭탄선언을 던졌다.
“카리프 산맥에는 테라 왕족만 잡아먹는 미로가 있답니다.”
“…뭐?”
발화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릴리아나가,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
“여기까지 일하느라 수고하셨어요. 이반, 그대에게 언제나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저야말로 영광이었습니다.”
카리프 산맥 초입.
더 이상 마차가 진입할 수 없는 길에 다다르자, 우리들은 마부와 마차를 돌려보냈다.
“으아아. 사흘 동안 마차 안에 있느라 죽는 줄 알았네요.”
“품위 없게 소리 내긴.”
“그러는 왕녀는 품위가 넘쳐서 침까지 흘리며 졸았나?”
“뭐라고?”
세 사람의 꼬리잡기가 다시금 시작됐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열심히 중재해 봤지만,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 탓이다.
‘어? 사실 이게 얘네의 거친 애정 표현인 게 아닐까?’라는.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싸우는 게 부부라는 통계도 있지 않나. 본래 애정이 없으면 싸움도 없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 명은 그간의 마차 여행으로 제법 사랑을 나누었다-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잠시, 실례.”
어느새 말다툼을 끝낸 세드릭(특: 이김)이 나를 공주님처럼 안았다.
지금부터는 열심히 산을 타게 될 테니 합당한 처사였다. 다리를 저는 거야 그러려니 해도 앞을 못 보면 산을 탈 수가 없으니.
“드디어 본격적인 모험이군요!”
이즈미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두 뺨이 상기된 게 기대되긴 하는 모양이다.
아니면 지긋지긋한 마차를 벗어났다는 해방감이든지. 사실 후자 쪽도 은근 신빙성이 있다.
“어… 그런데.”
아무튼 그렇게, 힘차게 열 발자국 정도 산을 오르던 이즈미는.
“그런데 저희 어디로 가요?”
당연한 질문을 하며 멈춰 섰다.
하지만 내 쪽을 봐도 말이지.
난 맹인(아님)이라고?
“릴리아나.”
“…나?”
내 부름에, 어색한 듯 총기를 만지작거리던 릴리아나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삐죽 들었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나요?”
“느껴지는 거라면…?”
“이끌림 같은 거요.”
사실 ‘입구’는 지금의 나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굳이 릴리아나에게 떠넘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장 가능성이 궁금해.’
마도사 릴리아나.
그녀는 원작에서도, 이 세계의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특성을 가진 인물이다.
산맥조차 평지로 만들 수 있다는 평가도 어디까지나 내 가설일 뿐.
즉, 현재의 릴리아나는 학자로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지난 10년간 한 연구의 결집체이자 완성본이란 뜻이다.
츄릅. 못 참겠다, 논문아!
“주변에 집중해 보세요.”
‘품위 유지’ 스킬로 추잡한 군침이 선한 어조로 번역된다.
“주변?”
“왕궁에서 직접 마도를 써 봤을 때처럼요. 투명한 아지랑이 같은 게 보이지 않나요?”
아, 침. 침 닦아야지.
‘청결 유지’ 덕에 뽀송뽀송한 입가를 문지르고 있을 때쯤, 긴가민가한 얼굴로 갸웃대던 릴리아나의 가운데 머리털이 빳빳해졌다.
“!”
“…고양이 새끼가 따로 없, 아니, 유스. 나 욕한 거 아니야.”
“바, 방금 뭔가 보였다.”
그녀는 평소라면 발끈했을 세드릭의 도발조차 흘려 넘겼다.
대신 고양이가 수염을 까딱이는 것처럼, 사뿐사뿐한 발걸음으로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내가 보고 있던 곳이다.
[‘마력을 보는 눈’ 스킬이 사용됩니다.]푸른 눈에 반짝이던 십자 문양이 사라졌다.
길은 좀 전에 다 확인해 두었으니, 이젠 릴리아나가 정답을 찾아가는지 관찰만 하면 된다.
“이쪽 방향이군.”
“믿어도 되는 건가?”
“릴리아나는 몰라도 유스 말이라면 신빙성이 있죠! 가 봐요.”
“…….”
방심만 하면 찔러 들어오는 공격에 릴리아나는 ‘병X들에게 먹이 주지 마시오’ 전략을 택했다.
세드릭은 한숨을 내쉬다가도 나를 한 번 보더니,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녀를 따라갔다.
“음음음음음♪”
반면 이즈미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경쾌한 걸음으로 뒤따른다.
…그보다 멜로디가 익숙한데.
이거 <이세계에 엑스트라……> 애니메이션 오프닝 아닌가?
‘여기서 이스터에그가?’
덕분에 나 역시 상당히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런 연구과제라. 타이틀은 대충 정해졌고 Abstract 항목에 어떤 식으로 적는 게 좋을까…….
아, 안심하길.
릴리아나에 대한 관찰 역시 세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저 총 하나 들려 주겠다고 10년을 쓰지도 못할 마도 연구에 매진했는데 소홀할 순 없지.
그것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마도사는 마력을 관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각성했을 때 마족들만 가지고 있는 ‘정신체’를 가질 수 있을까?
가설 1. 가진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레이븐 척살 과정. 기회가 되면 정신체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창천 때는, 설마 릴리아나가 마력을 볼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머릿속에 논문 초고를 적어 둔 나는 세드릭에게 얌전히 매달렸다.
“멀미 나면 말해.”
“난 괜찮은걸. 무겁지 않아?”
“…네가 내 검보다 가벼워.”
거짓말을 잘도 하는군.
어쨌든 릴리아나는 별 탈 없이 내가 바라던 장소로 도착했다.
그러니까, 미로 입구 말이다.
“허. 신기하군.”
“우와!”
릴리아나와 이즈미가 감탄을 터뜨렸다. 세드릭 역시 말만 안 했지 제법 놀란 기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런 첩첩산중 가운데서 유적지 같은 석상을 발견할 거라고는 보통 생각 못 하니까.
“대리석으로 된 건축물. ……서대륙에서도 쉽게 볼 수 없을 만큼 정교해. 언제 만들어진 거지?”
가까이 다가간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사람 세 명 정도가 들어갈 법한 동굴 입구에는, 실제 크기라고 해도 믿을 만큼 커다란 드래곤 석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확실히 박력 있긴 하다.
딱 그 정도지만.
“릴리아나. 그 석상에 손을 한 번 대 보세요.”
“…손?”
내 말에, 지금까지 줄곧 돌 드래곤을 바라보던 릴리아나가 흠칫했다.
“잡아먹히는 건 아니겠지?”
앗. 귀여워라.
사흘 전 ‘왕족을 잡아먹는다’라고 했던 이야기를 계속 신경 써 왔던 모양이다.
“비유적인 의미였어요.”
“…믿는다.”
믿는 거 맞지?
릴리아나는 어딘가 찝찝한 얼굴로 몇 번을 망설이다가,
“릴리아나, 겁먹었어요?”
“누가 겁먹었다고.”
이즈미의 도발에 넘어가 확 손을 얹어 버렸다.
역시 남녀노소 “쫄?”의 위력은 강력한 법이다. 여기다 추임새로 “긁?”까지 넣어 주면 완벽한데…….
성녀 이미지로 넣어 봤자 필터링 될 테니 관뒀다.
[왕가의 피가 흐르는 후계자여, 시험의 미궁에 온 것을 환영한다.]이어지는 중후한 목소리 탓도 있고.
“우왓, 깜짝이야!”
“석상이…… 말을?”
“……놀랍군.”
[미궁에 들어가기 전, 그대는 한 가지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한 번만 말해 주니 잘 듣거라.]대뜸 던져진 질문 탓도 있었다.
‘사실 원작에서 이걸 발견한 건 각성한 세드릭이었지만.’
왕족 전용 미궁.
이라고 쓰고, 카리프 산맥 숏컷(지름길)이라고 읽는 이 통로를 이용하려면, 총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마력을 볼 수 있을 것.
둘째, 테라리오 왕족일 것.
각성 세드릭은 첫 번째 조건만 충족한 채 무력으로 드래곤을 부수고 들어갔다. 그러곤 아예 안쪽을 차지하고 마개조해서 생체 실험실로 삼아 버렸지.
하지만 파티에 릴리아나가 있을 경우 평화 입성이 가능하다.
지금도 보아라.
[입체 이성질체 중 서로 거울상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은 무엇이지?]왕족을 위해 몹시 쉬운 질문을 던져 주지 않는가.
“다이아스테레오이성체네요.”
“다이아스테레오이성체죠!”
“다이아스테레오이성체군.”
쉬운 문제답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답이 튀어나온다.
[정답이다. 들어가도 좋다.]드르륵, 하고 열리는 문.
자연스럽게 입성하려는데- 어쩐지 세드릭이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드릭? 왜 그래?”
“뭔가 문제라도 있나, 평민?”
“아, 아니. 그.”
그가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딴 걸 어떻게 알…지?”
“응? 무슨 소리예요?”
이즈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용사 파티가 되려면 미궁 함정을 대비해 이성질체의 종류 정도는 전부 숙지하는 게 교양 아닌가요?”
“무슨.”
“아, 참!”
아연한 세드릭을 보던 이즈미는, 돌연 해맑은 얼굴로 비수를 꽂았다.
“세드릭은 원래 교양을 안 챙기는 편이죠. 잊고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