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6)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6화(6/101)
#6. 흑사병 (1)
이 거지 같은 배에 남겨진 지도 벌써 한 달째다.
처음에는 애벌레처럼 묶여 있던 몸도 어느새 풀어졌다.
“앞도 못 보는 애새끼가 탈출이나 하겠어? 밥 떠먹여 주는 것도 슬슬 귀찮으니까 그냥 풀어 줘.”
덕분에 남은 구속은 손목 하나.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그보다 문제는 전염병인데.’
놈들의 말을 듣자 확실히 생각나는 사건이 있었다.
“내 어머니는 10년 전 호천의 전염병에 희생되셨다. 그 빌어먹을 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끝장내겠어.”
만화 속 주인공 파티의 일원이자 지국의 왕녀인 릴리아나.
그녀는 호천 토벌 이벤트에서 이런 대사를 하며 그가 얼마나 잔학무도하고 위험한 적인지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시기도 맞아.’
원작의 세드릭이 주인공과 만나는 건 그가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다.
지금 그가 딱 열네 살이니, 릴리아나가 말한 시점에서 딱 10년 전인 셈이었다.
“결정했다.”
전염병 이벤트를 해결해야지.
완벽하게는 못 하더라도 릴리아나의 어머니만큼은 살려야겠다.
‘메인 캐릭터의 인생을 바꾸면 포인트가 대량으로 들어와.’
심지어 전염병을 해결하면 단번에 ‘구한 사람’의 수를 확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른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다소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아니, 반드시 해야 한다.
‘그전에 탈출부터 하고.’
멍청한 남자들이 내가 시각장애인이라고 오해해 준 덕분에 신체의 자유가 생겼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마침 상자 밖으로 날붙이가 튀어나온 게 보인다.
“좋아, 일단 저걸로…….”
몇 번 낑낑대자 밧줄이 썩둑 잘렸다.
후, 드디어 풀려났네.
그다음은 매복이다.
‘오기만 해 봐라.’
상자 사이에 몸을 숨긴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작은 배는 항구에 정착한 듯 부드럽게 출렁였다.
“어이, 그 여자애 꺼내 와.”
곧이어 거친 목소리가 들린다.
“재수 없는 새끼. 꼭 상관처럼 군다니까.”
그는 투덜거리며 천장의 문을 열곤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엥? 뭐야, 애 어디 갔어?”
“여기요!”
“뭣- 커헉!”
그의 시선을 끈 나는 상자 안에 있던 벽돌을 전력으로 집어 던졌다.
과연 성인 남자라도 돌멩이를 맞고 무사할 순 없었는지, 남자는 눈알을 까뒤집고 기절한다.
머리에 피가 좀 나는데… 죽지는 않았겠지?
“무슨 일이야?!”
곧이어 남자의 멍청한 동료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다. 나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이 멍청한 놈! 혼자 굴렀냐?”
겠냐?
“억!”
두 번째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
나는 남자들이 기절한 틈을 타 미리 상자에서 챙겨 둔 돈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곤 재빨리 사다리 위로 올라갔다.
조그만 배 위에 다른 선원은 없었다. 나는 다람쥐처럼 갑판 위를 쪼르르 달렸다.
건너편 배의 선원이 내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꼬마야. 아빠랑 같이 배 타고 온 거냐?”
“네!”
방싯 웃으며 답하자 선원이 껄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즐거운 여행 되려무나! 테라는 참 살기 좋은 나라야!”
아무렴요.
왕권은 흔들리고 암암리에 불법 노예가 거래되고, 곧 전염병까지 돌겠지만 좋은 나라죠.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배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입은 옷은 이거면 됐고. 오늘은 근처에 방이라도 구해야겠네.’
거기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
“방 하나 주세요. 저녁도요.”
“어머, 수줍음이 많은 꼬마 손님이구나. 혼자 왔니?”
항구 근처 여관.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또박또박 말하자, 낯을 가린다고 생각하는지 여주인이 후후 웃었다.
그거 아닌데.
초점 안 맞는 걸 숨기고 싶었을 뿐이다. 남자들의 반응을 보아 가까이서 보면 티가 나는 모양이니까.
“원래 저녁까지 하면 3천 페소인데, 2천 페소만 받을게. 어린이 손님한테 특별 서비스야.”
“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서비스는 언제나 옳다.
나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돈을 내밀었다.
“이건 열쇠.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고,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니까 바로 1층으로 내려오렴.”
“네에.”
열쇠를 받은 나는 그녀의 말대로 방에 짐만 던져 놓았다.
다시 나가려던 때, 방 한구석에 있던 거울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 꼬맹이, 눈에 초점이 없어.”
문득 선원들의 말이 떠오른다.
‘대체 눈이 어떻길래?’
불똥에 의해 실명되었다면, 눈 안에 큰 화상이라도 입은 걸까. 그렇다면 온통 충혈되었거나 동공이 보기 싫게 탁해졌을 수도 있겠다.
……보기 무섭군.
그래도 안 볼 수는 없다.
나는 홀린 듯이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멈춰 섰다.
“…아.”
거울 속 소녀는 꾀죄죄했다.
머리는 잿빛. 얼굴에는 잔상처가 나 있었고 화재 현장에서 뒹굴었던 옷은 온통 재투성이다.
그래도 예뻤다.
더러움이 미모를 가리기보다는, 되려 씻기기만 하면 얼마나 더 귀엽게 보일까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게다가 가장 걱정했던 눈은.
‘……유리알 같아.’
일반적인 전맹 시각장애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초점을 맞추지 못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기는커녕 정면을 보는 상태로 정확히 고정돼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완전 무동(無動) 상태.
굳이 따지자면 예쁜 유리구슬.
혹은 정교한 인형의 눈.
그런 느낌이려나.
아무리 노력해도 눈동자를 움직일 수 없었다. 단순히 시신경이 손상된 건 아닌 듯했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너무 멀쩡해.’
그간 나는 내 실명 원인이 눈에 튄 불똥 탓이라고 추측했었다.
하나 그랬다면 눈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시력을 잃었을 뿐 눈 자체는 멀쩡했다. 선천적 맹인처럼 말이다.
실로 기이하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일단 내려가자.’
언제까지 여기 멍하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재가 묻은 옷을 탁탁 털고 1층으로 내려갔다. 꽤 인기 있는 여관인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자, 수프!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먹어도 된단다.”
“감사합니다아.”
“아이고! 귀여워 죽겠네. 얘, 이것도 좀 먹어. 너무 말라서 보는 내가 안쓰럽다니까.”
그녀는 내게 복숭아 절임까지 서비스로 주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인심 무엇?
‘완전 맛있잖아!’
심지어 수프도 맛있다!
허겁지겁 먹는데, 옆 테이블에서 거나하게 취한 용병 하나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뭐?! 딸이 병으로 쓰러져?! 그거 엄청 큰일 아니야! 의사는?”
“하아, 의사가 말하길 완전히 처음 보는 병이라더군. 지금 두 손이 완전히 까맣게 변했어.”
그 이야기를 들은 내 숟가락질이 멈췄다. 나는 그쪽 테이블로 총총 걸어가 물었다.
“그 이야기,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나요?”
“아서라. 이런 건 어린애가 들으면 안 되는 거야.”
…묻자마자 거절당했다.
손까지 휘휘 저어 가며 저리 가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게 단호박이 따로 없다.
이러면 곤란한데?
무릇 용병의 덕목이란 술 얻어먹고 술술 정보를 부는 것 아니던가.
아무래도 딸이 있어서인지 어린애에게 친절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지.’
귀찮지만 변명하는 수밖에.
“저는 수습 의사예요. 스승님께 배우던 중 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를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진짜? 네가 수습 의사라고?”
아니.
하지만 무슨 병인진 잘 알지.
“처음에는 열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가, 하루가 지난 뒤엔 갑자기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지거나 피를 토하지 않던가요? 그다음은 신체 말단부부터 점점 검게 변해서 피부가 죽기 시작하고요.”
“헉!”
내 말을 들은 용병이 벌떡 일어났다.
“고, 고치는 방법도 알고 있는 거냐? 고칠 수 있는 거지?!”
“네. 고칠 수 있어요. 하지만 서둘러야 할 거예요.”
나는 담담히 말했다.
“그 병은 죽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아주 짧거든요. 심한 경우에는 6시간 만에 죽을 수도 있어요.”
남자의 눈이 흔들렸다.
솔직히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애의 말이라면 무시할 법도 한데, 뿌리치지 못하는 걸 보면 그만큼 절박하기도 한 듯했다.
하기야. 이 시대의 의료 수준은 실로 처참한 수준이었으니.
“딸이 낫기만 한다면 뭐든, 뭐든 내어주마. 내일… 아니, 오늘이라도 괜찮다면 우리 집에 와 줘.”
“어이, 마르스. 저런 어린애 말을 믿는 거야? 차라리 정식 의원에 가 보는 게 낫지 않겠나?”
“의사들은 전부 머저리뿐이야! 그 녀석들은 폐를 지혈한답시고 에이미한테 끓는 쇳물을 먹이려고 했다고!”
우와. 그건 좀 심했다.
상대 용병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마르스란 남자의 말을 듣고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르스는 주먹을 꽉 쥔 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료하는 데 필요한 거라도 있나? 약재는 발품을 팔아서라도 구해 올 수 있어. 딸이 걸린 병을 아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약은 필요 없… 앗!”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르던 중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꼬마, 괜찮아?”
마르스는 다급한 와중에도 내 걱정을 해 주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를 보며 웃었다.
“괜찮아요.”
“뭐야, 너 눈이…….”
뭐야. 왜 저런 표정이지?
‘아, 맞다.’
대화에 너무 집중했더니 지금 내 눈 상태를 까먹었네.
나도 참 덜렁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