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64)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64화(64/101)
#64. 머리 검은 이들의 나라 (6)
세드릭의 눈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음. 좀 심했나.’
긴장 풀어 주려고 같은 침대에서 자기 전에 물어본 건데.
사실 이 문제는 한 번 정도 짚고 넘어가야 했다.
어차피 세드릭은 내 앞에서 늘상 검도 뽑았고, 암살자인 걸 특별히 숨긴 적도 없지 않나.
그래서 정보 조직 정도로 순화해서 말한 건데.
“그, 그, 그, 그게.”
상태가 심각하다.
예상치 못한 일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는 게 처량할 지경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서도.
‘좀 착하게 살지 그랬니…….’
솔직히 삐딱한 생각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새하얗게 질린 꼬라지를 보면 원작처럼 고문, 대량학살, 사기, 기타 등등을 전부 저지른 모양인데.
아니, 내가 유언까지 해 줬잖아.
양심이 있으면 착하게 살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 그냥 약소한 정보상이나 운영하고 그랬어. 왜, 원래 중요한 사람들은 식당 종업원이나 구두닦이 소년 같은 건 투명 인간 취급하잖아. 그런 식으로 정보를 모았지.”
“그렇구나.”
“암흑가라는 건- 어, 음. 유스 너도 알잖아. 화국이나 공국 사람들은 키에토 주민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거. 키에토에 거점이 있어서 그런 식으로 불리는 모양이야.”
“응, 이해했어.”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니 눈에 띄게 안심한다. 표정 관리조차 못 하는 게 인상적이다.
전체적인 대처 점수는 9점 정도 줄 수 있겠군. 100점 만점에.
‘이래서 정보상을 어떻게 했담.’
사람을 조종할 때 가장 중요한 건 포커페이스다.
더해서 자신의 속내는 감추고 타인의 정보를 캐내는 것이야말로 사기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알아낸 정보를 통해 타인을 원하는 대로 유도하면, 짜잔.
어느새 훌륭한 거짓말쟁이가 탄생하는 것이다.
바로 나처럼.
“하긴, 세드릭은 마음이 약하고 상냥하니까. 일반적인 암흑가 조직처럼 사람을 해치는 건 무리겠다.”
“어, 그, 그렇지.”
개소리 1.
“역시 좋은 어른이구나?”
“…으응.”
개소리 2.
이렇게 입만 열면 거짓말과 개소리가 나오는 경지야말로 천하제일 사기꾼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선 세드릭이 허술한 면모를 보여 줄 때마다 안심된다.
그가 보이는 허술함은 어디까지나 내 앞이기 때문이라. 그 안에 내 영향력이 크다는 방증이니까.
***
‘빌어먹을.’
릴리아나는 퀭한 눈으로 기상했다.
아니, 기상했다는 표현은 부적절했다. 그건 간밤에 푹 잔 사람이 쓸 수 있는 단어 아니던가.
‘한숨도 못 잤어.’
원인은 다름 아닌 고통이다.
유스티나스와 떨어진 직후부터 스멀스멀 아프기 시작하더니, 엘프 마을에 들어오면서 통증이 극심해진 탓이다.
심지어 밤에는 더 아파지는 탓에 간밤에는 기절했다 깨기를 반복했다. 유스티나스의 이름을 부르며 훌쩍이기도 했다.
‘곁에 있을 땐 아프지 않았지.’
달리 말하자면 이 정도의 통증을, 언제나 유스티나스가 대신 떠맡아 주고 있었다는 뜻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체감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고. 릴리아나는 유스티나스의, “마력 회로 파괴 전과 후의 삶은 전혀 다르다.”라는 말을 천천히 체감했다.
마력 회로는 치료 방도가 없다.
그러니 빠르게 이 고통에 익숙해지는 게 나을 것이다.
유스티나스를 영원히 끼고 살 수는 없으니까. 결혼할 것도 아니고.
…순간 그녀가 남자였다면, 하는 마음이 들다가 사그라들었다. 저 한 몸 편하자고 남에게 평생 대신 아파 달라는 말만큼은 할 수 없던 탓이다.
“릴리아나! 얼굴이 왜 그래요?”
“…잠을 설쳐서.”
“끙. 밖으로 나갈 수 있겠어요?”
다프네가 준비해 준 샐러드를 먹으며 이즈미가 물었다.
두 사람은 오늘 아침부터 마물 토벌에 나설 계획이었다. 릴리아나는 머리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아니. 어렵겠어.”
“무리하지 말아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미안하군.”
그녀가 순순히 사과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즈미, 나도 같이 가!”
식사가 끝난 후 이즈미와 다프네는 마물 토벌을 위해 떠났다.
덕분에 릴리아나는 다프네의 어머니와 어색하게 남겨졌다.
뭐, 어색함보단 여전히 전신을 찌르는 아픔이 더 크긴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몸이 불편한가?”
“…음.”
릴리아나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몸이 아프다고 해도 왕족으로서 품위가 있다. 이런 식으로 사방팔방 아프다는 걸 들킨다는 게 상당히 수치스러웠다.
“엘프의 의술은 인간보다 훨씬 발전했지. 어차피 기연을 얻은 김에 편히 말이나 해 보게나.”
하지만 이런 말을 들었는데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다.
릴리아나 역시 엘프의 선함에 대해선 익히 들은 바가 있다. 천성이 워낙 대쪽 같은 데다 거짓말까지도 못하니 엘프 노예를 못 가져 안달이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마력 회로도 고칠 수 있나?”
“음? 마력 회로?”
엘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흠, 그건 꽤 까다롭지. 어디 회로라도 부러진 겐가? 한 번 확인해 보겠네.”
릴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의 맥을 짚은 이름 모를 엘프의 눈이 커졌다.
“…내 살다 살다 이런 회로는 처음 보는구나. 대체 어떻게 걸어 다니고 있는 겐가?”
“그게…….”
릴리아나는 자신의 선천적 체질과 유스티나스의 일을 털어놓았다.
설명을 모두 들은 엘프가 탄식했다.
“성인이라. 그래, 성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법하지. 500년 전에 나타났던 그 녀석도 그랬으니.”
“…500년 전?”
대체 나이가 몇이길래?
릴리아나의 의문이 얼굴에 나타났는지, 엘프는 약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나이가 벌써 육백 살이 넘었지. 흠, 그래. 마력 회로라…… 완전히 고치는 건 어렵다만, 어디 한번 시도라도 해 볼 텐가?”
릴리아나가 벌떡 일어났다.
“방법이 있다고?”
“있지. 한데.”
“한데?”
따아악!
호두 깨지는 소리와 함께 릴리아나는 바닥을 굴렀다.
귀하신 몸으로 태어나 난생처음으로 맞는 꿀밤이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얻다 대고 반말이야? 같이 온 그 소년은 아주 싹싹한 것이 꼬박꼬박 존대하더니만, 떼잉.”
“아으윽…….”
“그리고 참, 내 이름을 아직 안 가르쳐 주었군. 늙어서 그런지 자주 깜빡깜빡한다니까.”
벌레처럼 꿈지럭거리는 릴리아나를 내려다보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엘프가 시원스레 웃었다.
“나는 아리스라고 한다네. 존경을 담아 ‘아리스 님’이라고 부르도록.”
***
“성인은 보통 오백 년이나 천 년 주기로 세상에 나타난다지. 내가 본 건 다섯 세기 전의 하나뿐이지만.”
“그자도 유스티나스 같은 성격이었나, 습니까?”
“비슷했지.”
두 사람은 현재, 아리스의 안내를 따라 엘프 마을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점차 험해지는 길에도 아리스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여러모로 얼이 빠져선 제멋대로 희생하고. 아프지도 않은 건지 늘상 불 속에 뛰어들곤 했다네.”
하나 발걸음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엔 회한이 가득했다.
“기억에 남는 건…… 음, ‘김치찌개’라는 걸 만들어 보겠다면서 별짓을 다 했을 때였나.”
“그런가, 습니까.”
만약 유스티나스, 하다못해 이즈미가 이 말을 들었다면 깜짝 놀라 굳었을 터였다.
하나 안타깝게도 릴리아나는 ‘지구’ 출신이 아니었다. 그녀의 평온한 반응을 살핀 아리스가 도로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그 녀석도 너처럼 전신에 마력 회로가 다 깨졌었다네. 늘 괜찮다며 사람 좋게 웃었지만, 실은 아팠을 테지.”
“…마력 회로가? 전대 성인이?”
“모험이 끝나고 그 녀석이 사라진 뒤에도, 내게는 시간이 참 많았어.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마력 회로의 치료 방법을 연구했다네.”
점차 걸음이 멈춘다.
릴리아나는 어느새 바뀐 풍경을 돌아보았다.
눈앞에 있는 건 작은 통나무집.
나무 속을 파 만든 엘프들의 집과는 달리, 평범한 나무꾼이 머물 법한 오두막이었다.
“들어오게.”
끼익.
낡은 문이 열린다.
안쪽 역시 평범했다.
릴리아나가 신기한 마음에 둘러보고 있는 사이, 아리스는 찬장 서랍을 뒤적거렸다.
“여기쯤 두었을 텐데…… 아하.”
한참을 찾던 그녀가 곧이어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투명한 유리병 안쪽에 황금색 액체가 찰랑거린다.
“이게 뭡니까?”
“엘릭서.”
병을 건네받은 릴리아나의 물음에 대답하며, 아리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 세상에선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리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