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78)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78화(78/101)
#78. 거슬러 오르는 후회 (10)
“네. 뭘 도와드릴까요?”
“저기, 그게.”
잘 말하던 여우 꼬마는 내 흔쾌한 승낙에 어물거렸다.
“……제 동생을 도와주세요.”
“동생이요? 여우 군이 아니라요?”
“저는 여우 군이 아니에요.”
여우 꼬마가 고개를 저었다.
“혜원이라고 불러 주세요.”
나는 잠시 멈칫했다.
혜원이라면 여자 이름이다.
요즘 들어서야 남녀 구분 없이 중성적인 이름을 짓거나 하지, 예전만 해도 돌림자며 획수며 작명 규칙이 꽤 많지 않던가. 성별 구분도 철저하고.
“네에, 혜원 양. 제가 동생을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 말에 여우 꼬마, 아니 혜원이 걸친 모포 자락을 꾹 쥐었다.
“황궁에…….”
“황궁이요?”
“네. 황궁에 가야 해요.”
황궁이라.
이건 또 예상 못 한 요청이다.
‘수국 황실은 지국 왕실이랑 느낌이 너무 다른데.’
지국 왕가는 뭐랄까.
원작에서 계속 얼굴을 비치는 만큼 친근한 맛이 있다. 그걸 제외해도 기본적인 이념 자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현대인으로서 큰 거부감이 들지 않는 장점도 있다.
당장 릴리아나나 세뇌가 풀린 디올드만 봐도 죄다 정상인이다. 국왕 부부야 말할 것도 없이 내게 호의적이고.
반면에 수국 황실은, 조금. 그.
영 거시기하지.
애니메이션에서도 수국 황실에 관한 이야기는 다루지 않았다.
떠도는 역병과 호천이 벌인 사건을 해결했음에도 황가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던지라, 왕족 출신 릴리아나가 의아해하긴 했다.
이에 한 관리가 답하길.
“천한 백성들이 죽든 말든, 천자께서 신경 쓰실 일이란 말이냐?”
꽤 임팩트가 강했던 대사라 기억하고 있다. 단 한 마디로 수국이 어떤 나라인지 각인시키기도 했고.
“황궁에 몰래 숨어 들어가야 하나요? 제가 몸이 불편해서, 그런 작업은 어렵답니다.”
“이걸 받아주세요.”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자 혜원이 품속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그 패를 받아 든다.
차가운 금속 감촉으로 된 패는 국화 모양이었다. 불을 토하는 봉황 한 마리가 국화(菊花) 안을 꽉 채운 형태로 양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 달린 실.
지수화공 네 개의 마력을 상징하는 색상의 실타래가 각각 꼬여 하나의 줄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입을 벌렸다.
“황제의…… 패?”
국화와 봉황.
국화(菊花)는 수국의 국화(國花)이며 봉황은 여성 황족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짐승이었다.
즉, 이 나라에서 이 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3세기 전 황제의 금지옥엽 막내딸로 태어나, 오라버니 다섯을 죽이고 스스로 황위에 오른 황상.
현제 도성지.
늘 평정심을 유지하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놀랐다. 손끝이 잘게 떨린다.
‘주술이 맞았나? 인체 주술?’
아냐. 다시 생각해 보자.
만일 저 애가 황실 암투에 휘말려 저주에 당한 피해자라면, 내게 자신을 고쳐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하나 혜원은 자신의 동생을 살려 달라고 말했다. 그것도 아주 다급하고 절박하게.
‘어쩐지, 아까 내가 광역 치유를 쓸 때 계속 보고 있더니만.’
이것 때문에 배까지 따라왔나?
톡, 톡.
생각에 잠긴 나는 무의식적으로 흰 매트리스를 두드렸다.
먼저 정리를 해 볼까.
1. 혜원은 주술의 피해자다.
이 가설은 거의 확실하다.
특히 수국 황실이 엮였다면 불가능한 건 거의 없다. 당장 주술사라는 개념조차 오로지 도씨 황실이 만들어낸 게 아니던가.
그들은 온갖 창조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게 하는 데 도가 텄다. 인간의 골격을 뒤틀어 짐승과 섞어 놓는 짓도 충분히 할 법했다.
2. 혜원의 동생은 투병 중이다.
이것도 거의 확실하다.
혜원이 목격한 내 기적은 죽어가는 사람을 순식간에 치유하는 것.
그렇다면 혜원의 동생도 흑사병, 혹은 그에 준하는 불치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과묵한 애가 스스로 말문을 열고 도움을 청할 리 없다.
3. 혜원은 황실의 일원이다?
잘 모르겠다.
감히 저 패를 훔칠 수는 없으니 황제에게 직접 받은 건 확실한데.
어쩌면 사생아나 정치 다툼에 휘말린 후궁일지도 모르겠다. 도성지는 여성 후궁도 들인다고 했으니까.
4. 흑사병 환자의 진실
만일 혜원이 황실의 일원 혹은 연관자라면, 흑사병 환자의 승선은 내가 아닌 혜원을 노린 수작일 수도 있겠다.
5. 그래서 결론은?
대량 포인트의 냄새가 난다.
게다가 저 온갖 연구 과제로 가득한 몸을 보아라.
이런 대형 건수를 놓치는 건 멍청이나 할 짓이다.
“알았어요, 혜원 양.”
정리를 끝낸 내가 표정을 되돌렸다. 대중의 신뢰를 사는, 그야말로 “어이어이, 믿고 있었다구!”의 표본!
유스티나스 성녀 ver. 이었다.
“도와드릴게요.”
“…정말요?”
“그럼요.”
망설임 없는 대답에 혜원이 고개를 툭 떨구었다.
“감사합니다.”
고저 없는 감사 인사였다.
하나 주홍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과 희망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 도와드리기 전에 간단한 사정을 먼저 들을 수 있을까요? 곤란하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뭔가를 알고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에 용이하거든요.”
혜원이 다시 한번 주춤거린다.
그러나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제 이름은 도혜원이에요.”
이름은 아까 들었다.
그리 단순히 말하기엔, 이름 앞에 붙은 성씨가 심상치 않았다.
도혜원.
개나 소나 같은 성을 쓰는 한국과 달리 (한국에서도 고성 도씨는 희성이긴 하다) 수국은 성씨가 다양한 편이었다. 덕분에 성이 같으면 대다수 지인의 지인, 친척의 친척뻘은 되는 정말 다 아는 사이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걸 제쳐도 무려 지엄한 황실의 성씨다. 이름자조차 부르지 못하게 막는데 황가 외에 다른 도씨가 있을 리 없잖아.
3번 추리는 정답인 셈이군.
“그렇군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여 내 반응을 살피듯 한참 가만히 있던 도혜원은, 평온한 얼굴을 보고는 안심했는지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300 하고도 20년 전, 수국 황실의 후궁이 쌍둥이 남매를 출산했다.
“황궁에서 쌍생아가 태어나다니! 허어, 몰락의 징조로다.”
수국에서 쌍둥이는 불길함을 상징한다. 불완전한 존재기에 기존의 체제를 뒤집고 혼란을 야기한다는 속설 때문이다.
하여 남녀 쌍생아가 태어난다면 보통 사내아이 쪽을 죽인다. 위협의 운명을 지닌 계집보다는 사내 쪽이 위험한 탓이다.
그러나 쌍생아에 서자라고 한들 천자의 핏줄이다. 황자를 죽일 수는 없던 황실은 공식적으로 쌍생아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비가 아이를 낳다 사산하였으니, 아(我)의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구나. 성대히 제를 지내어라.”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장례를 치른 두 쌍둥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혜원아, 서원아. 언니 왔단다.”
“언니!”
“누나!”
냉궁에 유폐된 아이들이 만날 수 있던 건 그들을 돌봐주는 유모 하나와 하녀 하나, 그리고 황궁의 공식적인 막내뿐이었다.
유영 공주 도성지.
유일한 황후 소생의 늦둥이 막내 공주였던 그녀는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금지옥엽이었다. 황제의 딸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시종일관 아들들을 질책하면서도 하나뿐인 딸은 혹여라도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안절부절이었다.
그랬기에 도성지는 생모의 출입조차 금지된 냉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황제가 눈감아 주었으니까.
“언니! 같이 공놀이해요!”
“누나, 저 이제 천자문을 다 떼었어요. 다음 책을 가르쳐 주세요.”
“알았어, 알았어. 둘 다 해 줄 테니 우리 차근차근 하자.”
덕분에 두 남매도 생각보다 외롭지 않게 자랐다. 서로가 있는 데다, 일곱 살 터울인 공주가 새로 생긴 동생들을 끔찍이 아낀 탓이다.
그렇게 십여 년간은 몹시 평화로웠다. 비록 칼날 위 평화였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랴.
하나 행복한 시간은 언젠가 끝나는 법.
남매가 열넷, 공주가 스물하나가 되던 해.
황제가 붕어(崩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