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8)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8화(8/101)
#8. 흑사병 (3)
시작은 옆집 노인이었다.
“세, 세상에!”
“아버지의 피부가 돌아왔어!”
내 치유력을 본 집안사람들은 입을 떡 벌리더니, 이내 다 함께 내 발치에 엎드렸다.
“이 늙은이, 성녀님 덕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별것 아니지만 약소한 보답이라도 받아 주시지요.”
“어서 일어나세요.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반동으로 찾아온 아픔을 꾹 누르며 웃었다.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선행 포인트 +100]와! 포인트!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물론 내게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니, 연신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도 어찌 이런 은혜를 입고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성녀. 성녀라.
성녀라는 직업을 얻으려면, 역시 신실한 모습을 보이는 게 좋겠지?
“저는 위대한 신을 모시는 한낱 종입니다. 신의 위업을 대신하여 행하는 것뿐인데, 어찌 계속 보답하려 하시나요? 그저 앞으로 저 대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 주신다면 그만입니다.”
교수님을 모시며 기름칠된 대학원생의 아부 실력은 무섭다.
몇 번 입을 털었더니 노인과 그 가족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성녀님!”
그다음.
세 번째 집은 쌍둥이 아이와 아내 모두 자리보전하는 중이었다.
세 명 전부 말끔히 치료한 뒤 처음과 비슷한 말을 전했더니, 그 가족들도 내게 엎드렸다.
‘이게 이세계식 도게자?’
J-애니메이션, 무섭다.
나중에 주인공이 낫토 만들어서 먹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난 한국인으로서 김치의 우수성을 알려야 하나?
“쿨럭.”
아차.
현실 도피가 끝나자 격통이 밀려왔다. 내가 비틀거리자 마르스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받쳤다.
“성녀님, 그만 저희 집에 가서 쉬시지요. 치료는 내일 이어서 하셔도 됩니다.”
“아, 아직 안 돼요.”
나는 몸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두 집만 더 할게요.”
“하지만.”
닥쳐, 이 안내자야.
내 포인트 벌이를 방해하지 마!
-라고 말할 순 없으니, 내 입에선 사근사근한 대사가 튀어나왔다.
“흑사병은 진행이 빠른 병이에요. 제가 가만히 있는 동안 누군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근데 XX 더럽게 아프네.
신체적인 고통으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러자 마르스의 눈이 잘게 떨렸다.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
마르스의 마을 주민을 전부 치료하는 데 꼬박 2주가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치료가 이어질수록 내 인내심이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루 열 명 정도는 거뜬해.’
아, 아픈 건 그대로다.
그냥 참는 거지.
‘내일부터는 좀 더 페이스를 올려야겠어.’
포인트 적립 속도가 너무 느렸다.
하루 열 명이 아니라 스무 명, 나아가 서른 명을 치료해야 한다.
‘집에 돌아가려면.’
다행히 뭔가 거하게 착각해 준 마르스 덕에 의식주를 해결할 필요도 없고, 마을 사람들도 내게 잘해 주지 못해 안달이라.
“유스 언니!”
치료 계획을 세우던 중 에이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빨간 머리를 늘어뜨린 소녀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층 건강하고 싱그러웠다.
“아빠가 아침 먹으라고 불러요.”
“응, 지금 나갈게.”
에이미에게 대답한 나는, 컨셉 유지를 위해 지팡이를 들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어린이용 지팡이는 마르스의 작품이다. 내가 여기 온 지 일주일이 되었을 때 그에게 선물받았다.
탁, 탁.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옮기는 발걸음은 경쾌하다. 경박하지는 않고, 어디까지나 가벼운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여요, 언니.”
“이제 마을 사람 중 환자는 없으니까.”
나름 1차 목표 달성이다.
오늘부터는 힘내서 하루에 스무 명… 아니 서른 명… 젠장.
‘뒤지게 아프겠구나.’
갑자기 우울해졌다.
“언니?”
“아, 미안해.”
나는 불안해하는 에이미를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마을 밖에도 아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을 텐데, 너무 기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때 등 뒤에서 마르스가 튀어나왔다.
그는 산적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앞치마 차림이었다. 막 아침을 차린 그가 담백한 손길로 나를 이끌었다.
“성녀님이 아니었다면 저도, 에이미도. 다른 사람들도 전부 소중한 사람을 잃었겠지요. 이미 수많은 사람을 살리신 셈입니다.”
“…고마워요, 마르스.”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이런 직접적인 호의를 받을 때는 조금 찔린다.
‘사기꾼이 된 것 같잖아.’
나는 대가 없이 착한 일을 할 만큼 선인이 아니다.
흑사병 치료는 어디까지나 포인트 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
나는 퀘스트창을 띄웠다.
[메인 퀘스트]사람 10억 명을 구하시오.
현재: 1,192명
‘…음.’
달성 목표는 10억 명.
현재는 약 1,200명.
9억 9천만 넘게 남았군.
‘앞으로 열심히 해야지.’
갈 길이 참 멀다.
몸이 달은 나는 스푼을 들며 자연스럽게 운을 떼었다.
“참, 마르스 님. 오늘부터는 옆 마을까지 나가 보고 싶어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쉬라고 하실 거면 그만두세요. 이렇게 식사하는 중에도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가 당황하며 이야기했다.
“옆 마을에 소문이 퍼졌는지, 성녀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 환자들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아예 마을에 막사를 설치해 그들을 도우시는 건 어떨지요.”
“아.”
꼰대 성녀짓을 했던 내 두 뺨이 붉어졌다.
“하, 하지만 그러면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은 어떡하죠? 역시 제가 가는 편이 더.”
“환자를 찾아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일 겁니다.”
“그건… 그러네요.”
확실히 포인트 수급에도 그게 나을 듯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 한 시간 뒤.
나는 내 결정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막사 쪽에 줄이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족히 일백 명은 되어 보이는군요.”
내 옆에 선 마르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앞이 보이는 나는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있는 거야.’
근처에 있는 환자란 환자는 죄다 몰려온 것 같았다.
더욱 무서운 건, 이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흑사병이 벌써 테라 전역에 퍼졌나? …설마 황실에도?’
그러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릴리아나 루이즈 테라리오.
지국의 구중궁궐에 있는 어린 그녀와 접촉할 기회는 왕비를 치료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생판 처음 보는 아이가 대뜸 왕궁에 찾아가 왕비를 치료하겠다고 해 봤자 사이비 취급이나 받고 쫓겨날 터.
‘그러기 위해선 최소한 영지 단위의 명성이 필요한데.’
나는 허름한 막사 앞에 줄줄이 서 있는 환자들을 보았다.
“…….”
저거 다 치료하면 진짜 아프겠지.
‘뭐, 어쩌겠어.’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지팡이를 짚으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마르스 님, 시작하죠.”
***
흑사병이 창궐한 지 두 달.
보일 남작가에는 우중충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남작님, 영지민들이 괴질에 걸려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영지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허어.”
부관의 보고를 들은 남작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퀭한 눈과 처진 어깨에서 그간 같은 문제로 씨름한 흔적이 보였다.
“의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처음에는 자원하는 이들이 꽤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다들 흑사병이 도는 지역에 가길 꺼려 합니다.”
“젠장. 당연히 그럴 테지.”
그가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부관의 말대로였다.
보일 남작령 끝부분에서 시작한 괴질은 순식간에 영지 전체로 번졌다.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환자들의 모습이 퍼지자, 자연스럽게 주변 영지에서는 남작령과 교류를 완전히 끊어 버렸다.
“가뜩이나 우리 영지에서는 식량 생산도 불안정한데……. 이대로는 영지민들 전체가 굶어 죽을 판입니다. 국왕 전하께 구휼을 요청하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 왕비 전하께서도 자리보전하고 계시는 판이네. 작년이 흉년이라 국고도 충분치가 않아.”
되짚을수록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다. 그가 바싹 마른 입술을 잡아 뜯었다.
“괴질만 사라져도 식량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을.”
보일 남작령은 바다와 맞닿아 있는 작은 영토다. 애초부터 농사보다는 어업을 생계로 하는 이들이 많은 만큼, 젊은이들이 자리만 털고 일어나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역시 흑사병.
“후, 차라도 한잔해야겠군. 가서 다과를 좀 내어 오라고 하게.”
“예.”
남작의 명령을 들은 시종 하나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집무실 안에는 남작과 부관, 그리고 남작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동 하나만이 남았다.
“수국에는 제법 뛰어난 의사들이 많다던데, 배를 띄워서라도 의사를 구해 보는 게 좋을까요?”
“글쎄. 지금 국왕 전하께서 왕비 전하를 치료하려 백방을 뒤지는데 아무도 흑사병의 치료법을 모른다더군. 어디서 천재 의사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서야-”
“저, 남작님!”
두 남자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한순간에 까마득한 상관의 눈초리를 받게 된 시동이 작게 딸꾹질했다.
“그, 제가 오늘 여동생에게 편지를 받아 보니 흑사병에 걸렸던 할아버지가 말끔히 치료되었다고 하십니다.”
“무어라?”
남작이 미간을 좁히기 무섭게, 부관이 시동을 꾸중했다.
“거짓된 이야기로 남작님을 방해하지 말거라. 지금 왕실 의사들조차 괴질에 속수무책인 마당이니.”
“정말입니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저희 마을에 있는 괴질 환자들이 전부 나았다고 들었습니다.”
시동이 억울한 표정으로 외쳤다.
단순한 어린아이의 치기로 보아 넘어가려던 남작은, 이어지는 소년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네 본가가 어디에 있느냐?”
“항구 근처에 있는 마을입니다.”
“항구 근처라.”
남작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바닷가 근처라면, 시의적절하게 타 대륙에서 의사가 넘어왔을 수도 있겠군.”
“조사해 볼까요, 남작님?”
“그래야지.”
부관을 한 번 본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처지니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