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83)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83화(83/101)
#83. 거슬러 오르는 후회 (15)
세드릭의 숨이 다소 거칠어졌다.
그는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면서, 이즈미를 향해 되물었다.
“이유가 뭐지?”
“가시밭길이 빤히 보이는 길이라고 했잖아? 그럼 그 길을 선택한 본인이야말로 자기가 얼마나 힘들지 전부 알 거야.”
이즈미가 팔짱을 꼈다.
“사람은 힘든 길을 걸을 때보다, 옆에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가장 힘들거든.”
그는 세드릭을 마주하면서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방금 전에 말했던 그 소중한 사람일까. 틀림없이 그럴 터였다…….
“만약 그 사람이 세드릭 네게 이해를 바란다고 했다면, 아마 널 소중히 생각해서 그런 걸 거야.”
그리고 이어진 말에, 세드릭의 상념이 일시에 멈추었다.
“자신의 길이 소중한 만큼 너도 소중하니까, 신념을 지지해 주면 기쁘겠구나~ 한 게 아닐까?”
녹색 눈이 심유(深幽)하게 빛난다.
빛을 잃기 전 유스티나스의 눈이 바로 저랬던 것 같아서, 세드릭은 이즈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였다.
유스티나스에게 감히 토해 낼 수 없던 의문이 거칠게 튀어나온다.
“하지만, 진정 내가 소중했다면 자신의 길을 포기해서라도 의견을 따라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타인의 감정에 능숙한 그녀다.
이토록 티를 냈으니 걱정하는 걸 모를 리도 없는데, 유스티나스가 그를 아꼈다면 최소한 조언을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세드릭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소중히 여긴다고 해도 결국,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정도로 중요하진 않은 거다.”
이즈미에게 정면으로 반박하면서도, 사실 그는 제발 상대가 자신의 의견을 논파해 주길 바랐다.
그래. 그는 분명 저 사내와 유스티나스를 겹쳐 보고 있었다.
눈빛 말고는 조금도 닮은 게 없는 둘이지만, 그들의 본질은 틀림없이 닮았기에. 그러니까-
“음. 틀린 말은 아니네.”
하나 이즈미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말대로, 그 사람에겐 너보다 자기 신념이 더 중요한 거야.”
쿵.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는데도, 막상 말로써 확인 사살을 당하니 한층 실감이 난다.
유스티나스는 그를 아낀다.
소꿉친구로서.
…어쩌면 첫사랑으로서.
그러나 그 감정은 별로 크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 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드릭이기에 알 수 있었다.
유스티나스는,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겠어? 그 사람과 함께하고 싶으면 네가 맞춰야지. 아니면 그 사람이 신념도 목표도 포기하고 네 곁에 머무를 만큼 널 좋아하게 만들든가.”
“…….”
그는 생각에 잠겼다.
유스티나스를 억지로 끌고 가는 건 쉽다. 다른 파티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금발 왕녀의 화력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아직 조절조차 전혀 못 하는 애송이고, 눈앞의 사내 역시 평생을 한량으로 살던 자. 성검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전투 능력만 따지면 그와 차이가 현격하니.
그러나…….
유스티나스를 억지로 서대륙에 데려가 안전 가옥에 둔다고 한들, 그녀의 마음이 꺾일까?
평생 타인을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내던지며 살아온 사람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리가 불편해져도 그 심지만큼은 굳건했다.
물론 세드릭이 강압적으로 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다.
그러기 무서우니까.
유스티나스의 앞길을 막아 버리는 순간, 모두를 자애로 감싸안는 그녀의 유일한 ‘예외’가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그의 행동을 억제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미움받는다니.
이 이상으로 두려운 건 세상에 없으리라.
‘결국 나도 욕심이 가득하군.’
세드릭은 자조했다.
만일 정말로 그녀를 위한다면 앞길을 가로막는 게 맞거늘-
“그리고,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뜻을 존중해 주는 게 맞지 않을까? 아까 네가 말한 것처럼 말이야.”
“……아.”
이어지던 생각은 이즈미가 입을 열자 멈췄다.
소중한 사람이니, 그 뜻을 존중한다라.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세드릭의 인정을 받아 낸 게 기쁜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이즈미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앗! 방금 전부터 말을 놓아 버렸네요. 너무 몰입하다 보니!”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해.”
어차피 그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하대해 왔지 않던가. 세드릭으로선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였다.
하나 이즈미에게는 다르게 다가왔는지, 그는 연두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세드릭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그럼 우리 이제 친해진 거네?”
“…뭐.”
세드릭이 시선을 피했다.
이즈미를 볼 때면 늘 유스티나스가 겹쳐 보여서, 가까이 다가오면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세드릭. 친구 별로 없지?”
“있다만?”
“왜 날이 서 있어? 친구가 없는 건 세드릭의 잘못이 아니야.”
“있다고 했다.”
“헤에. 믿기 어려운걸…….”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세드릭이 이마를 짚었다.
신분제 사회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기 나라 왕녀와 친해졌다는 이유로 서슴없이 공격을 퍼붓는 놈이었다. 딱히 악의가 없어 보이는 저 맑은 눈 때문에 더 열받는다.
“세드릭? 왜 누워? 자게?”
“…말 걸지 마라.”
***
나머지 파티원들이 전부 잠든 시각, 릴리아나는 홀로 근처 숲에 서 있었다.
“…흠.”
슈우우.
위력을 조절해 발사한 총구에서 연기가 흘렀다. 탄내에 뒤덮인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찌릿, 찌릿.
기분 나쁜 통증이 올라온다.
‘이 정도 위력에 이 정도 통증인가. 아직은 견딜 만하군.’
유스티나스에게는 엘릭서를 먹고 전혀 아프지 않다고 말해 두었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엘릭서가 치유해 준 것은 어디까지나 일상 속 고통.
조금이라도 마력을 운용하고자 하면, 그에 비례해 벼락을 맞는 듯한 충격이 찾아왔다.
‘……뭐, 이제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니까.’
만일 유스티나스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분명 아프지 않게 도와줄 터였다.
그러나 역시, 더 이상 신세를 질 순 없다.
그 결심은 유람선에서 그녀가 행한 치료를 지켜보며 더욱 굳어졌다.
유스티나스가 짊어진 짐은 이미 지나치게 무겁다. 릴리아나는 그 위에 올라타기 싫었다.
무엇보다도.
‘또다시 비겁해질 순 없지.’
저 좋을 때는 양껏 수혜를 받다가, 죄책감을 덜어 보고자 유스티나스를 깎아내리려 애썼던 당시는 여전히 가시처럼 남아 있다.
그러니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비열한 생각 따위는.
탕, 탕!
아무도 없는 숲에서 홀로 몇십 번 더 총을 겨눈 릴리아나는, 야심한 새벽이 되어서야 조용히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
야호! 힘세고 좋은 아침. 만약 내게 묻는다면 나는 유스티나스.
‘잘 잤다!’
역시 잠은 보약이다. 잘 자고 일어나니 어젯밤 복잡했던 머릿속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가장 큰 성과!
“…정말로 나았군.”
바로 깨끗해진 손발이다.
릴리아나는 연신 내 신체 말단을 뒤집으며 살피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낫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너는 거짓말에 능숙하니까.”
그녀가 내게 장갑을 끼워 주며 말했다.
“적어도 너 자신에 대해선. 그러니 아프면, 그냥 아프다고 말해라.”
앗. 그 얘기였구나.
순간 너무 찔린 나머지 릴리아나를 후려칠 뻔했다. 나는 슬그머니 살심을 집어넣었다.
후려치면 이길 순 있냐고?
못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두 남정네들과 달리 신체 능력에 있어선 릴리아나는 그냥 일반인이다.
기습에 당하면 죽는다고.
“좋은 아침, 릴리아나! 좋은 아침이에요, 유스!”
“…좋은 아침.”
객잔 앞으로 내려온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인사했다. 릴리아나가 생경한 눈으로 세드릭을 보았다.
“좋은 아침이긴 하다만, 네 녀석이 먼저 아침 인사를 나누다니 의외군. 그 정도로 사회성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것 참. 잘난 척하는 왕족 나리만 하겠나?”
“하하. 둘 다 농담도 참. 어느 쪽이든 사회성 없으신 건 같은데 뭘 그리 싸우세요?”
사소한 다툼은 이즈미의 악의 없는(정말 없는 걸까?) 폭언에 소강되었다. 왠지 나도 조금 찔리는데, 기분 탓이겠지…….
“자, 무사 나리들. 황궁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만 믿으세요!”
아침 식사 후로는 예정대로 표국 행렬에 끼어 가게 되었다.
산길이었으나 포장은 제법 잘되어 있었다. 명백히 드러나는 문명의 이기에 이즈미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상단에 이런 호위까지 필요할까요? 우리야 좋긴 하지만, 지국에선 평민이 움직일 때 특별히 호위를 두진 않았는데.”
그러기 무섭게.
“히히, 이제 더는 못 가! 가진 걸 다 내놓거라!”
산적 무리가 튀어나왔다.
산적 떼를 본 이즈미가 앞장서 검을 뽑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검에서 새하얀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검기! 그런다고 내가 겁먹을 줄 알았더냐!”
그 모습을 본 산적 떼의 두목이 외쳤다.
“모두 돌격! 뒤로!”
그리고, 산적들은 뒷걸음질 쳐 다시 수풀 속으로 숨어 버렸다.
“오우.”
검을 들고 있던 이즈미가 태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