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87)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87화(87/101)
#87. 거슬러 오르는 후회 (19)
“네가…….”
한참을 굳어 있던 도성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는 모습에 격렬한 감정의 동요가 느껴졌다.
“네가 대체 뭘 안단 말이냐?”
다시 한번 멱살이 잡힌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진 도성지가 외쳤다.
“서원이를 죽이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해 봤을 것 같나?”
“그렇다면,”
“말했잖나!”
목에 핏대가 선다.
“죽일 수 없어! 두 사람 모두, 어떤 방법을 써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단 말이다!”
비명 같은 외침에 절박함과 무력감이 녹아난다. 생생히 진동하는 공기와 주변에 튀는 전류로, 그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방법은 있어요.”
“대체 뭔데!”
“서원 님이 죽지 않는 이유는, 저주를 발동한 마족이 계속 마력을 공급해 상처를 회복시키기 때문이지요.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마족의 회복은 성녀의 다정한 회복과는 궤를 달리했다.
내 완전 치유가 인간을 상냥히 어루만진다면, 마족의 치유는 인간을 최대한 고통에 빠뜨리기 위해 존재한다.
이유는 하나.
인간의 고통은 마족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있는 인간이 괴로워하면 괴로워할수록, 그들은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강해진다.
“…….”
내 설명을 들은 도성지는 잠시 침묵했다. 증오와 혼란으로 불타는 주홍빛 눈이 요동친다.
‘이 얘기를 들으면, 반응은 둘 중 하나겠지.’
내게 수긍해 호천(추정)을 죽이려 들거나.
그도 아니면-
“아직 살릴 방도가 없다면, 목숨을 붙여 놓은 채 시간을 더 버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하지만 더는 저 애의 고통을 방치할 생각은 없다.”
내 표정이 가라앉았다.
역시 이렇게 가는 건가?
“그러니 네가 협력해 줘야겠군.”
“저를 잡아 두시게요?”
“그렇다.”
그녀가 오만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한 손으로 내 옷을 잡은 채였다.
“네 녀석이 계속해 치유 능력을 사용하면, 최소한 아프지는 않겠지.”
“죄송하지만 무리예요.”
방긋!
나는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의미 없는 짓에 어울려 드리기에는, 저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너무 많답니다.”
“부탁으로 들렸나?”
그녀가 낮게 긁히는 어조로 웃었다.
“이건 명령이다. 나는 너를-”
“거기까지!”
“-무슨?”
낭랑한 청년의 목소리에, 도성지는 내 멱살을 잡은 채 고개를 휙 돌렸다.
“아무리 황제 폐하라도 더 이상 유스를 압박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놓아주시죠?”
“허어.”
당연하게도 끼어든 사람은 이즈미였다. 그는 성검을 척, 앞으로 든 채 걸어왔다.
‘검 그렇게 드는 거 아닌데.’
J-애니메이션 주인공답게 쓸데없이 폼 잡기 연출에 능하구나.
“감히 황제를 미행하다니, 네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글쎄요.”
그가 왼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자가 진단 결과, 저는 간염과 간 부종 없이 깨끗한 몸인데요. 간덩이가 붓지는 않은 듯?”
“-아(我)를 우롱하는 것이냐?”
“어레? 딱히 그렇지는?”
고개를 갸웃한 그가 씩 웃으며 검을 쥐었다. 도성지 역시 내 멱살을 거칠게 놓고는 이즈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냐, 좋다. 우선 네놈과 동료부터 잡아 죽인 후에 신녀를 ‘사용’하면 되겠구나.”
“…그렇게는 못 하죠.”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금방이라도 격돌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내가 위층에 있을 세드릭에게 전언을 보내려던 때였다.
“그만.”
“……혜원?”
도혜원이 도성지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만해요, 언니.”
3세기를 살았음에도 변성기가 오지 않은 여린 미성. 도혜원은 그런 목소리로 떨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도성지에게 애원했다.
“신녀님 말이 맞아요. 설령 계속 치료를 한다고 해도, 저런 모습으로 목숨만 붙어 있는 게…….”
“…….”
“……의미가 있을까요.”
“혜원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도혜원을 내려다보는 도성지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달싹인다.
“혜원아. 너도…….”
“…….”
“……아니, 되었다.”
정적 후 도성지는 손을 거두었다. 살기에 반응해 저릿저릿했던 공기 중 마력이 서서히 흩어진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질문을 추측해 보았다.
‘혜원에게도 죽고 싶냐고, 물으려던 걸까.’
그것만큼은 아니어도 도혜원 역시 사람도 짐승도 아닌 채 오랜 시간 죽지 못해 살아왔다. 삶에 회의를 가진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내 입장에선, 글쎄.
그래도 살고 싶겠지만.
“유스, 괜찮아요?”
도성지가 잠잠해진 사이 달려온 이즈미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목에 멍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상태를 확인하던 그의 표정이 굳었다. 적대감을 품은 녹색 눈이 도혜원을 바라보는 도성지에게 향한다.
나는 그를 붙잡았다.
“화내지 마세요, 이즈미.”
“어떻게 화를 안 내요?”
“소중한 사람이 위험에 처하면, 누구나 절박해지기 마련이랍니다.”
내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다. 온기를 나누어 주면서, 나는 잔잔히 웃었다.
“그렇게 감정에 휩싸이면 결국 이기적으로 굴게 되지요. 타인을 희생시켜서라도 가족을 구하고 싶으니까.”
“……유스.”
이즈미가 탁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하지만 저는,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타인을 희생시키는 사람은 좋아할 수 없어요.”
“…….”
“비열한 짓이잖아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군갈 이용하는 건.”
“그건,”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그러곤 고소(苦笑)와 함께 대답했다.
“네. 그 말이 맞아요.”
***
도성지는 도혜원과 이즈미를 밖으로 물렸다. 반발할 듯하던 이즈미는 의외로 순순히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도서원이 있는 방 안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남았다.
“신녀.”
“예.”
머리 하얀 신녀는 도서원의 곁에서 연신 흰빛을 내밀어 주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절규하지 않는 동생을 보니 마음이 울린다.
도성지는 그런 신녀를 찬찬히 보았다. 그녀에게는 타고나길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상대의 심상을 보는 눈.
살아 있는 것이라면 누구든 저마다의 심상세계를 지닌다. 그 심상은 때때로 하나의 자연물이기도 하며, 여러 색이기도 했고, 어떤 때는 그저 냄새나 소리처럼 볼 수 없는 종류이기도 했다.
저 신녀의 심상은 그중에서도 몹시 특별했다.
‘한없이 차갑다.’
신녀의 푸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너무 놀라 몸을 일으킬 뻔했다.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덧 빠져드는 거대한 설산.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눈밭에는 가시 돋친 빙벽이 무한대로 펼쳐진다. 그 빙벽은 정교하고 아름다우나, 지나치게 예리한 나머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피부가 벗겨졌다.
간신히 앞으로 나가면 점차 눈보라가 심해져 시야를 가리고 가시의 밀도는 높아진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갔을 때, 신녀는 빽빽하게 세워진 얼음 가시 한복판에 서 심상에 멋대로 들어온 침입자를 바라본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푸른 눈은 공포스러운 무저갱과 같았다.
도성지는 살면서 이런 심상을 가진 인간은 처음 보았다.
그렇다. ‘인간’은 처음이다.
먼 옛날, 아직 예현친왕이 되기 전의 도선우가 딱 저처럼 공허한 심상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의 심상은 한없이 어둡고 질척거리는 늪으로 가득해, 들어가는 순간 길을 잃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래서 도성지는 눈앞의 ‘신녀’를 마족이라 판단했다. 다만 곧바로 잡아 죽이지 않은 것은 사랑하는 동생의 증언 탓이었다.
하지만, 글쎄…….
“서원 님은 치유의 빛을 참 좋아하네요. 이대로 오랜 시간이 지나면 이성을 되찾을지도 모르겠어요.”
동생을 향해 자애롭게 웃어 주는 모습은 도무지 마족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쯤에서 도성지는 깨달았다.
도선우가 지닌 심상은 타인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나 신녀의 심상은 그보다는 자학에 가깝다.
빙벽에 스스로를 가두고,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리는 무서울 정도로 계획적인 인간.
마족만큼이나 심상이 커다란 건 눈앞의 방대하고 신비로운 힘이 한몫했으리라. 도성지는 신녀의 성력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대의 이름이 유스라고 하였던가?”
“유스티나스라고 해요.”
“긴 이름이군.”
남역인들의 작명 방식은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도성지의 작은 투덜거림에 신녀가 웃었다.
“저는 좋아해요.”
“그런가.”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이내 치유받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투명하게 비치는 동생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었다. 안심이라도 된 듯 천천히 흐르는 혈액을 보며, 도성지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좀 전의 일은 사과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