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89)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89화(89/101)
#89. 자선 사업 (1)
“누가…….”
긁는 듯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누가 이랬어?”
“세드릭, 잠시만요.”
“누가 이랬냐고.”
세드릭은 이즈미의 만류를 무시하고 일렁이는 눈으로 유스티나스를 응시했다. 그가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목에 든 시퍼런 멍 외에도 자잘한 상처가 선명하다. 세드릭은 눈알이 뒤집히려는 심정을 간신히 참아 내었다.
그때 릴리아나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흥분하지 마라.”
“하, 참견인가? 무슨 권리로?”
“유스티나스가 곤란해하고 있는 건 안 보이나?”
미간을 찌푸리며 빈정대던 세드릭의 눈에, 난처해 보이는 유스티나스가 들어왔다. 앞이 보이지 않을 그녀는 자신과 묘하게 빗겨 난 방향을 바라보며, 두 손을 좀처럼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렸다.
“…….”
화가 난 와중에도 이성이 돌아온다. 그러자 어째서 릴리아나가 그를 만류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황제의 짓이군.’
사실 처음부터 답은 하나였다.
그가 이즈미 폴리를 질투하는 것과 별개로, 저 순해 빠진 갈색 머리 사내는 결코 남을 해칠 위인이 아니다. 뚜방뚜방 걸어 대는 하찮은 도혜원이나 살아 있는 것도 아닌 도서원이 범인일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황제밖에 없지 않은가. 간단한 이치다.
‘제기랄.’
마음 같아서는 당장 검을 빼 들고 감히 유스티나스의 목을 조른 황제를 베어 넘기고 싶다.
하지만 유스티나스가 저토록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는 건, 그의 이런 생각을 전부 알기 때문이리라.
세드릭은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마음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
“흐음.”
무언가 변했다.
남자는 자신의 ‘작품’에 쏟아지는 빛을 보며 웃었다. 그것을 통해 바라보는 시야에 조각처럼 아름다운 맹인이 비친다.
그래. 그 푸른 눈.
약간의 감정도 내비칠 수 없는 홍채를 바라보다, 그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십자 문양?’
왜 저런 게?
십자로 갈라진 동공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나 그 변화는 단순히 넘길 만한 게 아니었다.
“…….”
심히 거슬린다.
눈살을 찌푸린 남자는, 이내 옷을 변화시키고는 허공을 밟아 훌쩍 도약했다. 새까만 밤하늘로 수려한 미남자가 떠올랐다.
‘이번 기회에 취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에 걸리는구나. 서대륙으로 가 조사해 봐야겠어.’
지금 수국을 떠나도 크게 상관은 없을 터였다.
어차피 저 여자가 살든 죽든, 그 건방진 검은 머리 사내는 자신에게 찾아올 수밖에 없으므로.
***
황제의 허락하에 용사 파티는 황실 귀빈으로서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본래부터 황제의 애완동물로 알려져 있던 도혜원은, 황궁 한쪽에 있는 귀빈실에서 유스티나스에게 꼭 붙어 있었다.
“혜원 님, 제가 마음에 드시나요?”
유스티나스가 여우 상태인 그녀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예민한 귀를 간지럽힌다.
여우 상태로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없어서, 도혜원은 그저 두 귀를 눕힌 채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따뜻하다.’
푸른 여우가 노곤히 늘어졌다.
그녀의 언니는 모르는 일이었으나, 도혜원은 본래 다시는 황궁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윽, 하아. 이게 무슨.”
평소처럼 언니를 따라다니며 애완동물 행세를 하고 있을 무렵, 급작스러운 통증이 찾아왔다.
거품을 물고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통증은 확실하고 짙게 그녀의 일상을 사로잡았다.
그때 도혜원은 깨달았다.
‘예현친왕의 조종이다.’
그녀의 불사는 예현친왕 도선우와 연결되어 있기에 발생하는 부작용이었다. 다만 3세기가 다 되어 가도록 특별한 감각을 느끼지 못해, 단지 연결되어 있을 뿐이라 여겼다.
통증을 느끼기 전까지는.
‘…이건 경고야.’
어째서 300년이 지난 지금 악몽 같은 그놈이 찾아왔는지는 모른다. 하나 계속 이대로 있다간 돌아온 예현친왕이 황궁을 쑥대밭으로 만들 터였다.
황궁은 그녀의 집이자 수많은 사람의 일터다. 사랑하는 언니와 동생이 머무는 장소기도 했다.
그런 곳이 무너졌다간, 단순한 해프닝으로 그치지 않으리라.
하여 도혜원은 언니조차 모르게 가출을 시행했다.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쉬웠다. 황제가 지극히 사랑하는 짐승을 감히 막아설 간 큰 인물이 황궁 내에 없던 덕분이다.
황궁으로부터 멀어질수록 통증이 약해졌기에, 발걸음이 느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황궁을 빠져나간 도혜원은 오랜만에 반인반수 형태로 돌아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았다.
그 생활에 변화를 일으킨 건 당연히도 신녀와의 만남이다.
기실 그녀가 유스티나스에게 처음부터 이토록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라고 도혜원은 생각했다.) 수국사화를 수국오화로 만들 정도의 미인이긴 했지만, 게다가 과자도 잘 내주긴 했지만, 또 자신을 보고 기겁하거나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은 착한 인간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이렇게 딱 달라붙어 있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종종 그녀의 동료들이 말하는 ‘성녀’라는 단어에 호기심이 생겼을 뿐.
한데 배에서 그 치료의 빛을 본 순간, 모든 게 달라졌다.
“바라건대, 그대에게 주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짧은 기도문을 중얼거린 그녀는 기적을 일으켰다.
손발이 까맣게 썩어 들어가던 남자를 단번에 회복시킨 힘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커흑!”
“유스티나스!”
“괜찮, 괜찮아요. 죄송하지만 손수건 좀 받아 주시겠어요?”
여자의 기적에는 대가가 따랐다.
그러나 그녀는 피 섞인 기침을 하면서도, 환자와 똑같이 검게 변해 가는 손발을 보면서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다.
“저 하나의 고통으로 수많은 이가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자비로운 교환인가요?”
오히려 감사해했다.
자신을 희생하여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로 족하다고.
도혜원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어떻게. 저렇지?’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마음씨 좋기로 유명한 호인이라도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해쳐 가며 생판 모르는 남을 돕는 일은 드물다. 그런 사람이 흔했다면 그녀의 동생은 그토록 외로운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으리라.
선박에 몰래 숨어 두 사람을 지켜보던 도혜원은 앞발로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동물의 몸이라 눈물은 나오지 않았으나, 남아 있는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아팠다.
도혜원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저 사람이구나.’
예현친왕은 저 여자와 마주치게 하기 위해, 줄곧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왔던 것이다.
직감한 도혜원은 용기를 내어 여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하면서도 과연 믿어 줄까, 믿는대도 이런 끔찍한 일에 엮이고 싶어 할까, 하는 회의감이 그녀를 잠식했다.
제 몸을 던져 타인에게 베푸는 신녀의 인품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다만 세상에는 정도라는 게 있지 않던가.
역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생길 피해는 막대하다. 반면 그녀의 동생은 치료하지 않아도, 딱히 세상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덧붙여 위험도도 다르다.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과 예현친왕 같은 자의 실험에 연루되는 건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알았어요, 혜원 양.”
그러나 신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도와드릴게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도와야 한다’라는 식으로 나온 대답에 도혜원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그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던 황가의 치부마저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건 가치가 있었다.
유스티나스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서원 님을 죽이면 어떨까요.”
설령 그렇게 말했더라도.
유스티나스의 말에 격분하여 달려드는 언니를 말린 건, 도혜원 역시 그녀에게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또 어쩌면…….
그녀는 슬슬 죽고 싶었다.
동생만큼은 아니어도,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서원 님이 죽지 않는 이유는, 저주를 발동한 마족이 계속 마력을 공급해 상처를 회복시키기 때문이지요. 딱 죽지 않을 만큼만…….”
그 상황에서 유스티나스가 내뱉은 해결책은 썩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불사가 예현친왕 때문이라면, 그건 즉.
……그의 숨이 끊어질 때, 그녀 역시 자유를 얻는다는 뜻이었다.
‘이 사람을 따라가자.’
유스티나스의 동료는 ‘용사’라고 불리는 신의 대리자라 들었다. 또한 그들의 사명은 신에게 반하는 마족들을 절멸시키는 것이다.
예현친왕은 확실한 마족.
그러니 이 사람을 따라가면, 그 빌어먹을 자식의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뭐, 사실 그걸 제쳐 두고도.
“아하하. 간지러워요.”
도혜원은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언니가 새긴 푸른 멍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맑은 웃음이 퍼진다.
‘그냥 이 사람이 좋아.’
이유는 여럿 있겠지.
하지만 어쩐지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못내 마음에 밟혔다. 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더욱 커졌다.
‘언니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유스티나스는 수국에서 할 일을 마치면 다시 다른 나라로 모험을 떠나리라.
거기에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간, 자신을 아끼는 언니가 노발대발할 게 뻔했다. 도혜원은 유스티나스의 품에서 뒹굴며 어떻게 언니를 설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에 맞춰 도혜원을 만져 주던 유스티나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혜원 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꾹.
도혜원이 말해 보라는 듯 분홍 앞발로 유스티나스의 입가를 눌렀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제안했다.
“저랑 자선 사업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