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91)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91화(91/101)
#91. 크랙(龜裂) (1)
유스티나스의 음흉한 속내는 조금도 모른 채, 릴리아나는 붉어진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괜찮은 척을.’
두 남자가 토벌의 주축을 맡는 동안 릴리아나는 줄곧 유스티나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그녀는 단순한 정보로만 알고 있던 ‘기적의 대가’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상세하게 알아 갔다.
첫째. 치유하는 상대가 중상일수록, 돌아오는 대가도 크다.
둘째. 손을 대지 않고 치유할 때 대가는 훨씬 크게 돌아온다.
셋째. 유스티나스는…….
“고민이 있는 것 같네요, 릴리아나.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부디 말씀해 주세요.”
“……글쎄.”
정말로 대단하다.
그녀는 이 주일간 끊임없이 타인의 고통을 흡수했다. 그 이타적인 행위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릴리아나는 이전의 자신이 얼마나 무례하고 어리석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릴리아나는 붉은 눈을 사선으로 내리깔았다.
유스티나스는 분명 앞을 볼 수 없을 텐데도, 시선을 마주하면 어쩐지 자신의 민낯이 전부 까발려지는 듯 수치심이 이는 탓이다.
입을 다물며 상념에 빠지던 릴리아나는, 문득 지금껏 건네지 않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까지 유스티나스에게 한 번도 감사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정말 없었나?’
새삼스러운 충격에 빠져 기억을 뒤적여 보아도, 직접적으로 감사를 표한 적은 정말 없었다. 심지어 유스티나스가 어머니를 치료해 주었던 그 어린 시절에조차 말이다.
사실 너무 당연한 부분이라 넘기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이 그토록 몰염치했을 줄은 미처 자각하지 못해, 릴리아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릴리아나?”
눈도 안 보일 텐데 대체 자신의 동요는 어떻게 알아챈 건지. 릴리아나는 특출날 정도로 감이 좋은 유스티나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 그게.”
그런데 당최 이제 와서 무슨 말을 꺼낸단 말인가?
다짜고짜 고맙다고?
그동안 해 온 언행이 있는데?
그녀의 뺨이 달아올랐다.
‘부끄럽구나.’
사실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으나, 릴리아나의 이런 태도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녀는 본래 아랫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왕녀 릴리아나에게 그런 태도는 너무나 당연했다. ‘감사 표현’이란 건 동등하거나 윗사람에게나 하는 것이지, 아랫사람에게 은을 입었다면 마땅한 보수와 함께 ‘치하’하는 게 상식이었으니까.
한편 유스티나스는 릴리아나의 이러한 사고를 전부 이해했다.
‘고양이 같다. 귀여워.’
라고 태평히 생각할 만큼.
유스티나스는 릴리아나의 귀족주의적 사고를 전부 알고 데려왔다. 오히려 ‘이유나’는 그런 츤데레 히로인이 올곧은 주인공에게 반해 점점 변해 가는 모습을 좋아했기에, 릴리아나가 그간 보인 건방진 행동에 특별한 반감을 가지지도 않았다.
또 애초에 유스티나스는 ‘사람’과 ‘도구’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
그러니 사람이면서 쓸모까지 있는 릴리아나를 싫어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세드릭이 알면 복장이 터질 만한 사유였다. 그야 현재의 세드릭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그, 할 말이 있다.”
“네에.”
아무튼 유스티나스는 안절부절못하는 릴리아나를 향해 인애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떤 것이든 받아들여 줄 듯한 자비에 릴리아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생각해 보니 내가 그동안, 그대에게 그…….”
“-잠깐만요.”
하나 두 사람 사이의 훈훈한 분위기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유스티나스 곁에서 걷던 도혜원이 돌연 멈춰 서 꼬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모포로 가려지긴 했으나 엉덩이와 머리 쪽이 치켜 올라간 게 딱 봐도 무언가를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계속 얌전히 걷던 녀석이 왜 저럴까. 의아해할 틈도 없이 주위를 둘러보던 릴리아나는 돌연 위화감을 느꼈다.
그들 셋은 주변에 있는 병사들과 섞여 황궁 마차가 있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덕분에 주변은 병사와 근처 백성들이 떠드는 소리로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깨닫자마자 세상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뒤덮인다. 공간의 비틀림 속에서 유스티나스가 재빨리 릴리아나의 소매를 잡았다.
“무슨,”
일이지?
그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릴리아나는 전신을 뒤흔드는 격통에 눈을 홉떴다. 불완전한 마력 회로가 불에 타는 듯이 아팠다.
이어서 전환된 시야.
“!”
한순간에 황폐한 광장에 놓인 릴리아나의 귓가에, 당황한 유스티나스의 목소리가 꽂혔다.
“이건 크랙이네요.”
“-크랙?”
“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말해, 저희가 호천에게 납치당했다는 뜻이지요.”
***
“어라, 세드릭. 맡은 구역은 다 정리한 거야? 벌써?”
“그래.”
검을 집어넣은 이즈미는 검은 망토를 펄럭이는 세드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온통 새까맣게 차려입은 세드릭은 요 이주 간 짙은 피 냄새를 몰고 다녔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위협만으로 산적들을 잡아넣은 이즈미와는 딴판이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산적들이 너를 얕보는 건가? 이쪽은 내가 검만 꺼내면 도망쳐 버려서, 전투가 아니라 무슨 술래잡기라도 하는 기분이라고.”
“글쎄.”
세드릭이 검에 묻은 핏자국을 닦으며 무심히 대답했다.
“네 성유성은 어지간히도 눈에 띄니 두려울 테지.”
“그럴 수가 있나…?”
이즈미는 세드릭이 검을 쓸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으으음. 잘 모르겠단 말이지.’
막상 생각나는 건 없었지만.
물론 그럴 만했다.
‘아니지. 돌이켜 보니 세드릭이 제대로 싸우는 걸 본 적은 있었던가? 딱히 없던 것 같기도?’
이즈미를 비롯해 파티원 그 누구도 세드릭의 진짜 실력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유스티나스의 호위로 들어왔던 곳은 성국 내부였다. 간간히 성녀를 노린 창천 측 끄나풀이 찾아오긴 했으나 유스티나스가 잠들었을 때 조용히 처리했다.
또한 이즈미와 릴리아나가 합류한 지국부터는 이렇다 할 전투 기회가 없었다. 창천인 하루는 정신 공격에 특화되어 있었는지라.
‘산적 토벌 때도, 효율성 문제로 다른 지역을 돌고 있고 말야.’
이즈미와 세드릭은 한 명 한 명이 기사단과 맞먹는다는 검기 소유자. 굳이 황궁 쪽 병사들과 같은 산에 오를 이유가 없다.
이런 실정이라 이즈미는 세드릭이 자신보다 상위 실력자라는 건 알았어도, 어느 정도로 대단한지는 영 감을 잡지 못했다.
“세드릭은 어릴 때부터 검술을 배웠다고 했지? 얼마나 강해?”
“검술이라기보단 잡기다.”
세드릭이 깨끗해진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거창히 암살이라고 해도, 그저 실전의 지저분한 생존형 전투에 익숙할 따름이지.”
“헤에.”
“쉽게 말해, 목격자만 없으면 암살이란 거다.”
“그거 맞아?!”
“뭔가 문제라도?”
“아니아니, 절대로 틀리니깐! 보통 그런 건 몰살이라고 부른다구!”
무의식적으로 *츳코미를 넣은 이즈미가 민망한 듯 헛기침했다.
*츳코미: 딴지를 건다, 라는 뜻.
지나치게 흥분한 게 부끄러웠다.
“아무튼, 그렇구나. 세드릭은 그런 일을 해 왔단 말이지.”
“거북하지는 않나?”
“응?”
이즈미가 고개를 기울였다.
세드릭은 평소처럼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조금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일까?
가장 그럴듯한 가설은, 유스티나스에게 들키면 어떤 반응일지 모르겠어서 두려워한다는 거려나.
‘어쩐지 세드릭답네.’
저 녀석이 신경 쓰는 사람은 유스티나스밖에 없으니깐.
머리 뒤로 팔을 넘겨 깍지를 낀 이즈미는, 태평하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돌려 씩 웃었다.
“아무 생각 없는데?”
“…그런가?”
“그야, 그건 어디까지나 세드릭의 일이었잖아. 네가 죽일 정도면 그 녀석도 뒤가 구렸겠지.”
그 말을 들은 세드릭이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이즈미는 그런 사내의 동공과 체온 변화를 확인하곤 중얼거렸다.
“…뭐어,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까. 릴리아나나 유스는 또 다르게 반응할지도 모르겠네.”
예상대로 ‘유스’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세드릭의 체온이 미세하게 내려갔다. 성유성의 감각으로 자연스럽게 신체 반응을 해석한 이즈미가 그를 힐끗거렸다.
‘예상대로인가.’
사실 숨길 것도 없다.
그가 유스티나스에게 품고 있는 연정은 너무 티가 나서 모태솔로인 그조차 알아차릴 지경이었다.
세드릭은 유스티나스에게 들키지 않았으리라 철석같이 믿는 듯하지만, 이즈미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야, 세드릭과 있는 그녀는…….
“세드릭, 조금만 더 이쪽으로 올래? 으응, 아니…… 조금만 더.”
“…유스.”
“손, 여기 있었네.”
“…안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줘. 굳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네게 달려갈 테니.”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고백을 들은 유스티나스는 분명 평소와 다른 미소를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스티나스는 세드릭 앞에 서면 조금씩 몸이 굳는다. 이즈미는 그 약간의 경직이 어쩌면, 좋아하는 사내가 앞에 있다는 긴장감에서 나온 게 아닐까 추측했다.
“…….”
조금 허탈해지는 추측이었다.
이상하게도.
‘어라? 내가 왜?’
이즈미는 세드릭을 따라 걸으며 자신의 감정을 곱씹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확실한데, 그게 무엇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세드릭-”
그때였다.
=이즈미. 당장 황도로,
머릿속에 유스티나스의 ‘전언’이 울리다 뚝 끊겼다.
언제나 느긋하던 것과 달리 다급한 어조였다. 이즈미의 녹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즈미? 무슨 일인가.”
“……유스와 릴리아나가 위험해. 당장 황도로 복귀하자.”
세드릭의 동공이 수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