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92)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92화(92/101)
#92. 크랙(龜裂) (2)
크랙(龜裂).
일본산 라노벨답게 균열(龜裂)이라 쓰고 크랙(Crack)이라 부르는 그것은 차원의 틈이었다. 현실에 있는 공간을 복제해 자신만의 세계, 즉 던전을 만드는 것이다.
이론상 크랙을 만들 수 있는 건 창천, 호천, 민천, 상천을 비롯한 사천과 그들을 부리는 마왕뿐이었다.
‘이론상’인 이유는 창천 하루가 한 번도 크랙을 만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인데…… 정신계 특화인 그녀의 특성상 크랙을 만들어도 정신 공격보다 위력이 약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일단 크랙에 휘말리면 빠져나갈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시전자인 마족을 죽이거나, 혹은 크랙의 핵을 파괴하거나.
“이건…… 정말 곤란하네요.”
차원의 틈이라는 명칭답게 크랙에 들어온 순간 외부와의 소통은 전면 차단된다. 다행히 마지막 순간에 어찌저찌 멀리 있는 이즈미에게 구조 요청을 했지만서도.
‘오려면 꽤 걸리겠지.’
당장 수도로 달려온대도 한 번 생긴 크랙 내에 침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라기 보다는, 솔직히 불가능에 가깝다.
오죽하면 별별 상황이 다 나오는 원작에서도 크랙 침투는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내가 유독 긴장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악취가 대단하군.”
“…그러게요.”
나와 함께 크랙에 휘말린 건 릴리아나와 도혜원.
포지션으로 따지면 1원딜(전투 경험 없음) 1힐(다리 절음) 1귀여움(쓸모없음) 조합이다. 은신 원툴 *돚거만 다섯 있는 파티도 이것보단 밸런스가 나을 거다.
*돚거: 도적 클래스를 뜻하는 은어.
X랄 났네, 진짜!
‘안일했지. 최소한 흑사병이라도 먼저 퍼지고 호천이 끼어들 줄 알았더니만.’
나는 재빨리 마음을 다잡았다.
자기반성도 좋지만 중요한 건 주인공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 버티느냐다. 나는 릴리아나를 돌아보았다.
부활하면 그만인 내 목숨은 어떻게 돼도 좋다.
하지만 릴리아나는 살려 놔야 해.
도혜원은… 뭐, 살면 사는 거고.
“릴리아나. 잘 들어요.”
“그래.”
“이 악취와 탁한 공기. 여긴 분명히 호천이 만든 크랙이에요.”
“아까부터 궁금했다만, 크랙이라는 게 정확히 뭔가?”
“일종의 차원 균열인데…….”
나는 릴리아나에게 간략한 설명을 끝마친 후 지시했다.
“생존율을 올리기 위해 최대한 함께 다니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말해라.”
“제가 지시하면 릴리아나, 당신이 최우선으로 도망치세요.”
그녀가 곧장 반발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왜 널 두고 도망치나? 애초에 생존율로 따지면, 네가 사는 쪽이 우리 둘에게도 훨씬 이득인-”
“릴리아나!”
내 이례적인 외침에 릴리아나의 말이 멈춘다. 나는 잠깐 한숨을 쉰 후 단단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건 제가 계산해요.”
“납득할 수 없…….”
“전에, 제가 지극히 공리주의적인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러자 릴리아나가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다문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그건, 그러니까. 내가 잘못 판단했던 거였다. 그대는 그런 단순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지나치게,”
“아뇨. 맞아요.”
상냥한 어조로 그녀를 달랜다.
“저는 공리주의자예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제게 소중한 것조차 기꺼이 내던질 수 있지요.”
“유스티나스, 나는,”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니 제 말을 들어주세요.”
남의 계획 망치지 말고.
“릴리아나는 반드시 이 크랙에서 살아 나가야 해요. 세상을 위해서.”
알았니?
“…….”
릴리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단지 등에 멘 총을 꺼내 안전장치를 해제할 뿐이었다.
***
두 사람과 한 마리가 황폐한 수도를 걸었다.
그렇다. 이곳은 수도였다.
공간을 잘라 복사한다는 유스티나스의 설명 그대로, 두 사람과 한 마리가 거니는 이곳은 수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공간은 그랬다.
그러나 컴컴한 하늘과 진동하는 악취,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라.
거리에는 사람 대신 전신이 썩어 너덜거리는 좀비와 생강시가 배회했다. 시체 특유의 짓무른 살점과 뻣뻣한 관절이 억지로 돌아가는 소리는 소름 끼치기 그지없다.
“최대한 소음을 줄여요. 호천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요.”
탕! 탕!
유스티나스의 지시에 따라 최대한 출력을 줄인 총이 생강시의 대가리에 박힌다. 머리통이 사라진 생강시는 몸통만 남은 채로 미친 듯이 까딱거렸다.
릴리아나는 여우 상태인 도혜원을 어깨에 올린 채 재빨리 숨어들었다. 유스티나스가 따라올 수 있게 최대한 평평한 지면만을 이용한 보법이었다.
‘쉽지 않군.’
릴리아나는 유스티나스가 엄폐물 뒤에 몸을 숨기는 모습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마력을 보는 눈’ 덕분에 자신을 어찌어찌 쫓아오는 듯하지만, 기본적으로 유스티나스는 맹인에 잘 걷지 못하는 몸이다. 금세 효과가 떨어지는 임시 엄폐물 외에 진짜 은신처를 찾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럼에도 릴리아나는 불평할 수 없었다. 막 크랙에 들어온 직후 유스티나스가 했던 말들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탓이었다.
“제가 지시하면 릴리아나, 당신이 최우선으로 도망치세요.”
처음에는 반발했다.
유스티나스에게는 효율의 원칙을 들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현재의 그녀가 유스티나스를 버리고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전에, 제가 지극히 공리주의적인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나 막상 유스티나스에게 자신이 했었던 말을 들으니,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사과하고 싶었다.
물론 유스티나스는 공리주의자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건 진실이다.
그러나 단지 ‘공리주의자’라는 단어 하나로 정의해 그녀를 냉정한 사람이라 평가하기엔, 유스티나스는 한층 더 선에 가까웠다.
지금도 그랬다.
“맞아요. 저는 공리주의자예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제게 소중한 것조차 기꺼이 내던질 수 있지요.”
“릴리아나는 반드시 이 크랙에서 살아 나가야 해요. 세상을 위해서.”
이성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입이 벌어지는 기적을 손수 행하는 성녀와 약간 똑똑할 뿐인 왕녀.
어느 쪽이 살아남았을 때 세상에 이로운지는 다섯 살 꼬마가 보아도 명백하다.
그런데 유스티나스는 자신을 살리려고 들었다. 자신의 신념과 선의를 공리주의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전부 릴리아나,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한 표현이리라.
‘……전부 내 착각이었어.’
이런 사람을 두고 그간 얼마나 책임회피와 자기합리화를 해 왔던 건지. 수치심에 깨문 입 안쪽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철컥.
릴리아나는 총을 들어, 몸통이 사라진 채 유스티나스를 쫓는 생강시를 다시 한 번 저격했다.
탕!
붉어진 탈리스만이 불을 뿜었다.
화계마도로 뒤덮인 탄환은 생강시의 몸에 불을 붙였다. 과연 아무리 끈질긴 생강시라도 불은 어쩔 수 없는지, 어기적거리다 곧 바닥을 뒹굴며 리타이어된다.
릴리아나는 잠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불?’
그간 그녀가 쏘아 낸 탄환은 마력을 뭉쳐 터뜨릴 뿐, 별다른 마법 부산물을 만들어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방금은 달랐다.
특별히 위력이 올라간 게 아니었음에도, 보다 정교하고 섬세한 탄환.
‘…감정의 문제인가?’
하나 방금 전의 사격을 천천히 돌이켜 볼 여유는 없었다. 릴리아나는 소음에 몰려오는 좀비들을 피하기 위해 유스티나스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 실례하지.”
“앗.”
그녀를 이끌며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유스티나스는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따라왔다.
가슴 한쪽이 욱신거린다. 그때 앞쪽에서 좀비 하나가 덮쳤다.
철컥, 탕!
쏘아진 탄환이 좀비를 맞추며 푸른 화마가 되었다. 릴리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좀 전 생강시를 태웠던 적색 불꽃보다 훨씬 뜨겁고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아니, 정정한다. 이건 마도(魔道)였다.
릴리아나는 한 번 경험한 일은 절대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두 번씩이나 겪은 탄환의 마도를 확실히 체화할 수 있었다.
탕, 탕, 탕!
연이어 격발되는 총알은 모조리 푸른 불꽃이 되어 타오른다. 그녀의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그러다 사고가 났다.
“읏…!”
릴리아나는 바닥에 구를 뻔한 유스티나스를 향해 몸을 던졌다. 간신히 받아 내긴 했지만, 정작 충격을 흡수한 그녀의 팔다리는 돌바닥에 구르며 갈려 나갔다.
“릴리아나, 괜찮아요?”
“괜찮다. 그보다는 네가…….”
유스티나스의 상태를 살피던 릴리아나의 시야에, 작은 배수로 하나가 들어왔다.
건물과 도로 사이에 낮게 난 구멍은 꽤 깊어 보였다. 넘어지지 않았다면 찾지 못했을 위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