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95)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95화(95/101)
#95. 크랙(龜裂) (5)
‘……호천의 크랙 구조가 카리프 미궁과 비슷한 게, 정말 기분 탓일까?’
릴리아나가 뚫어 준 길을 걸으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나친 원작 편향.
늘 계획을 세울 때마다 ‘원작 중심적 사고’를 배제하려 노력했다.
내가 가진 건 단순한 정보. 미래가 아님을 확실히 인지하고, 모든 상황을 경계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여느 매체 속 빙의자들처럼 정보의 함정에 빠진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정보는 우월감과 안도, 방만을 선사하기 마련이니까.
“그나저나 이 미로는 산맥에서 봤던 미궁과 비슷하군. 구조가 유사하다면 배수로에서 나가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는데.”
릴리아나의 대수롭지 않은 중얼거림이 머릿속 빨간불을 한층 더 강하게 작동시켰다.
무언가 잘못됐어.
배수로에 들어오면 안 됐나?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크랙은 마족의 세계.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현세에서 아득히 떨어진 공간.
한 번 발을 들인 순간 빠르든 늦든 마족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것과 진배없다.
“오랜만의 재회로군.”
“…?”
오싹.
귓가에 들리는 중저음에,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지를 수 없다, 가 맞으리라.
“아, 너는 기억하지 못하나?”
“…! 유스티나스!”
순식간에 목뒤가 잡혔다. 내 모습을 본 릴리아나가 경악하며 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발포하지는 못했다.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고 있었는데, 인간치고는 머리가 좋더구나.”
릴리아나의 총은 범위 공격.
이 남자를 맞추는 순간 나 역시 화마에 휩싸인다. 마족의 초재생능력을 고려하면 그저 나만 죽을 뿐인 참담한 결과가 기다린다.
나는 시야를 돌렸다.
그러자 게임 화면 같은 시계(視界)에, 까마귀 가면을 쓴 남자에게 붙잡힌 유스티나스가 들어온다. 한 손으로 목을 붙잡은 그는 반대 손으로 내 눈가를 매만졌다.
“음, 확실히…….”
휙.
남자가 거칠게 내 몸을 회전시켰다. 뻐근한 감각과 함께 나는 그와 마주 보는 상태가 되었다.
시야를 눈 쪽으로 맞추자, 내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남자의 입매가 보였다. 그는 내 몸이 망가지는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 듯 우악스러운 손길로 나를 허공에 고정했다.
“이건 보람이 있어.”
보람?
머리가 차게 식었다.
‘무슨 뜻이지?’
당혹스러운 상황에도 이성은 스스로 놀랄 만큼 날카롭다.
검은 머리에 까마귀 가면.
이자는 틀림없이 호천이다.
지켜 줄 전위가 없는 우리들을 단번에 살해할 수 있을 만큼 강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내 몸을 붙잡고 눈을 관찰하기만 했다.
내 유리알 같은 눈을.
나는 알아챘다.
‘가치가 있는 거야.’
시력을 잃은 유스티나스의 눈은 평범한 맹인과 다르다. 일말의 미동조차 없이 투명하고 아름답다.
줄곧 이상하다고 여길 뿐 답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눈앞의 호천에게 이 눈은 어떠한 가치를 지닌다. 그것도 꽤 중요한.
여기서 문제는 하나.
‘나를 죽일 수 있을까?’
이 눈의 가치는 나를 죽이면 사라지는가.
아니면 눈만 뽑아도 되는가.
어느 쪽이냐에 따라 행동 원칙도 달라진다. 나는 잡힌 목이 느슨해진 새 호천에게 질문했다.
“보람이 있다는 건, 무슨 의미지요?”
“…….”
돌아오는 답은 없다.
‘예상 범위 내야.’
호천이 기본적으로 과묵한 탓이다. 하나 이 한 번의 질문으로 나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죽이지 않는다.’
가능성은 대략 70%?
아니면 60% 정도려나.
호천은 충동적인 창천보다는 훨씬 계획적이다.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죽였을 테니, 생포 쪽으로 사고가 기운 모양일까.
그렇다면 걸어볼 만하다.
‘관심을 끌자.’
릴리아나가 도망칠 수 있게.
“답이 없으시네요. 괜찮아요. 짐작은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동시에 릴리아나의 뇌리에 전언을 집어넣는다.
=릴리아나, 잘 들어요.
“…….”
=눈앞의 남자는 호천입니다. 그는 지금 저를 죽이지 않을 듯하니, 혜원 님을 데리고 도망치세요.
“눈을,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호오.”
호천의 가면이 움직였다. 흥미로워하는 건지, 아니면 정곡을 찔려 놀란 건지 모르겠다.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빨리.
시선은 결코 돌리지 않는다.
지금 호천의 관심사는 온통 내게 고정되어 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말들을 쏟아 낼수록, 릴리아나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충격은 누적될수록 작아지는 법. 시간 끌기에도 한계가 있기에.
“그렇게 짐작한 이유는?”
“저를 너무 바보로 보시네요. 그렇게 티를 내시고서는.”
“…….”
그의 입매가 비틀린다.
“처음부터 눈가에 손길이 갔잖아요. 아무리 제가 앞을 볼 수 없대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요. …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활짝 웃었다.
“마족 같은 쓰레기도 ‘생명’으로 칠 수 있는지는 논란이 있겠네요. 그 점에서 놀라신 거겠죠?”
“……네놈이, 감히.”
내 도발에 넘어온 호천이 분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사이 릴리아나는 도혜원을 든 채, 물이 고여 있지 않은 방향으로 조용히 걸었다.
그리고 거리가 멀어지자 소리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놀랍도록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머.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애초에 마족은 그저 마왕의 욕망 부산물에 불과한, 세계의 실수로 빚어진 가여운 존재인데…….”
“…….”
“하지만 걱정 마세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실수를 직접 바로잡을 만큼 자비로우시니까요. 그대에게 죽음이라는 구원을 내려 주실 거랍니다.”
내 발언을 얌전히 듣고 있던 호천은 곧 분노의 기색을 감추었다.
……아니. 감춘 게 아닌가.
그는 웃고 있었다.
한쪽 입매를 올려, 내 말이 아주 우습다는 듯이.
“아는 척 이야기했지만, 역시 전혀 모르는가 보군.”
“…제가 뭘,”
반박하려던 나는 아차 싶어 입을 닫았다. 정보의 흐름은 일방적이지 않다.
시선의 움직임. 수축하는 동공. 얼굴의 미세한 근육. 작은 손짓 발짓과 체온 변화, 흐르는 땀, 숨소리, 심지어는 ‘무반응을 보이는 행동’까지.
전부 상대에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귀중한 정보였다.
“네 눈이 귀중한 건 사실이야. 다만 ‘내게’ 귀중한 건 아니다.”
“그 말은…….”
“오히려 나는 너를 당장 집어삼켜 보고 싶은 쪽. 보복이 두려워 그렇게는 못 하겠지만.”
그가 히죽 웃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는 게 있어.’
아는 척 이야기했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것.
방금 호천의 말에는 그에 대한 정보가 ‘의도적’으로 빠져 있다. 나는 남자를 샅샅이 살피며 추가적인 단서를 찾으려 애썼다.
그때였다.
“…!”
꽈드득!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내 왼쪽 어깨가 골절되었다. 신체 내부에서 울리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너무 생생해서, 고통이 없음에도 눈이 커질 정도였다.
“용케 참는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음 한 번 흘리지 않는 내게 자존심이라도 상한 모양이다. 공포에 절어 무릎 꿇고 눈물을 보여야 마땅한 인간이, 의도적인 고문에도 아픈 내색도 하지 않으니까.
…그냥 안 아픈 건데. 하하.
“방금 전 들은 모욕의 값은 더 쳐 주어야겠지. 다리 하나는 이미 못 쓰는 것 같으니, 나머지 한쪽 팔도 가져가마.”
그와는 별개로 오른쪽까지 망가지면 정말 곤란하다. 아직 자살 쇼를 하고 싶지 않단 말이다.
내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굴리고, 호천의 다른 손이 내 오른쪽 어깨를 붙들어 잡는 순간.
서걱.
칠흑 같은 검 한 자루가 공간을 파고들어 호천의 목을 노렸다. 하나 그가 재빨리 몸을 뒤튼 탓에 검날은 목 대신 팔 한쪽만을 자른다.
나를 잡고 있던 쪽 팔을.
분수처럼 피가 튄다. 나는 잘린 팔과 함께 비틀거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몸을, 다급한 손길이 안정적으로 떠받쳤다. 고개를 들자 화가 난 표정의 이즈미가 보인다.
“…이즈미?”
“유스.”
언제나 밝은 그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낮은 어조로, 이즈미가 눈에 힘을 준 채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