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hough She is a Blind Saint, She Can See RAW novel - Chapter (99)
맹인 성녀인데 눈이 보인다-99화(99/101)
#99. 역병군주(疫病君主) (4)
이즈미는 화가 났다.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해, 나는!’
자신에 대한 화였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더욱 뼈저리게 느껴지는, 그의 무능에 대한 화.
‘왜 나는 그토록 게을렀지?’
이세계에 태어나서, 의욕이 없다는 이유로 한량처럼 지냈다.
“이즈미! 또 검술 수업을 빼먹은 거니?”
“헤헤. 죄송해요, 어머니.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요…….”
“……네가 정 원하지 않는다면 검술 수업은 빼 주마. 하여간, 몸도 튼튼하면서 왜 그렇게 움직이길 싫어하는 건지.”
귀족 영식들이 교양으로 배우는 지국 검술조차 농땡이 치기 일쑤.
결국 보다 못한 어머니는 교관을 돌려보냈다.
그때 제대로 검술을 배워 두었더라면 뭔가 달랐을까?
‘그러지 말걸.’
두 번째 삶이니 의미가 없다고 멋대로 단정 지어선, 한량처럼 무의미하게 날린 시간이 무려 20년.
그 안일한 낭비의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커헉!”
세드릭은 계속해 그를 지켰다.
그가 실수를 하거나 발을 헛디딜 때면 어김없이 도성지가 날아든다.
역병이 눈앞에 닥쳐올 때면 릴리아나가 쏘아 준 총알에 보호받았다.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음에도, 성유성은 호천에게 닿지 못했다.
‘……분해.’
그가 이를 갈았다.
‘너무 분해!’
무력한 자신이, 게으르게 20년을 날려 보낸 과거가 너무 한심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한 감정에 휩싸여 검을 휘두른다.
그러나 화로 휘둘린 검은 오히려 둔해졌다. 동작이 커진 이즈미의 허점에 다시금 역병이 다가온다.
세드릭이 다시 한번 다쳤다.
이즈미의 머릿속이 패닉으로 가득 찼다. 어쩌면 여기서 이길 수 없겠다는 절망감에 숨이 막혔다.
그리고 그때.
“전투가 시작되면, 사천의 목을 벨 수 있는 건 이즈미뿐이에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유스티나스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언제나 믿고 있답니다!”
환한 미소도.
“……그래.”
그가 검을 고쳐 쥐었다.
“할 수 있어.”
아니.
“해야 해!”
이성을 다잡는다.
흥분이 가라앉고 냉정이 돌아오자 상황이 훨씬 더 객관적으로 보였다. 이즈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보였다’.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흰 선.
그 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간다!’
이즈미는 최대한 흰 선을 따라가며 베었다. 새로 얻은 시야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아 여전히 실수는 있었으나, 방금 전보다는 훨씬 날카로운 검이었다.
‘나도 할 수 있어!’
잔뜩 풀어 죽었던 표정이 사라졌다.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몸과 다른 세상 같은 시야에 힘입은 이즈미는 상쾌한 기분마저 느꼈다.
그가 웃었다.
‘할 수 있다고!’
죽일 수 있다.
모두의 힘을 합친다면, 인간 같지 않은 이 사내도 이길 수 있다!
그렇게 여기면서.
‘봤지? 유스, 나도 할 수 있-’
뒤를 돌아본 순간.
이즈미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시야 덕에 그는 유스티나스가 어떤 모습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피. 온몸이 피였다.
특히 왼쪽 팔은 새하얬던 사제복의 원래 색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검붉었다.
유스티나스는 그런 몸으로도 어떻게든 땅을 짚으며 성력을 보내고 있었다. 푸른 눈이 십자 모양으로 반짝였다. 그녀가 각혈했다.
‘……유스? 왜 저렇게? 계속 뒤에만 있었잖아, 유스는.’
마족은 불합리하다.
그들은 성검으로 목을 베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재생하니까.
때문에 인간과 마족의 전투는 성립부터가 어려운 것이다.
이토록 불합리한 전장을 뒤집은 건 성녀의 기적.
그녀가 있으면 인간도 재생한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적인 호천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구나.’
레이븐은 역병을 다룬다.
도혜원이 저주술을 쓰듯 그들의 시선을 피해 유스티나스를 저렇게 만든 게 분명했다.
가장 방해되는 이를 치우려고.
내려진 결론에 격노가 치솟았다.
화를 내는 상대는 누구일까.
유스티나스를 해친 레이븐?
아니면, 그녀가 저 상태가 될 때까지 몰랐던 자신?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빌어먹을 레이브으으은!”
귀기 서린 외침이 성대에서 뻗어 나온다. 차가운 분노에 동요한 시야가 일렁였다.
그가 도약했다.
그 순간 보이는 흰 선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고 선명한 선을 따라, 성유성을 휘두른다.
Holy Comet
-서걱!
찬란한 별똥별이 가로로 추락했다.
***
레이븐은 당혹스러웠다.
그에게 인간이란 하찮은 미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엘프와 비슷한 수명을 누리는 마족과 달리 인간은 고작 백 년도 살지 못한다.
타고난 재능도 미천하다.
의식을 가진 순간부터 팔다리를 휘젓듯 당연하게 마력을 보고 느끼는 마족과 달리, 그들은 무슨 수를 써도 마력을 볼 수 없다.
그나마 재능 있는 인간도 복잡한 수식을 통해 고위 마족에게 마력을 빌리는 게 한계.
검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익히는 기간이 길수록 강해지는 검에서, 마족과 인간이 가진 시간 격차는 좁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중급 이상의 마족은 지극히 오만하다.
버러지 같은 하급 마족조차 잘 단련된 기사단 하나를 단신으로 격살한다. 중급 마족은 그런 하급 마족이 떼로 덤벼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니 중급이라는 명칭을 단 순간, 인간 중 현자로 불리는 대마법사가 상대여도 가볍게 이긴다.
몇백 년 묵은 엘프 마법사가 아닌 이상 두려울 게 없는 셈이다.
하여 중급 마족과 상급 마족까지 수족으로 부리는 고위 마족 ‘사천’은 마왕을 제하면 하늘 아래 무엇에도 굽히지 않았다.
그 자존심이 얼마나 비대하냐면, 나약한 인간 따위를 상대로 ‘진심’이 되는 순간 지닌 마력이 급격히 감소할 정도였다. 마력의 원천인 자아가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자신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넘어졌나?’
아니, 넘어진 게 아니다.
그는 잘린 머리로 추락하며 사고했다.
‘머리가 잘렸어.’
머리가.
다른 곳도 아닌 머리가.
그의 몸이 바둥거렸다. 팔을 휘저어 올려 보면 목 위에 있어야 할 부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
레이븐은 헛웃음을 지었다. 분한 것보다도 어이가 없었다.
인간 따위에게 당하다니.
인간 따위에게…!
검은 눈이 뒤편으로 향했다.
“이거…… 죽은 거 맞나?”
“으, 머리가 잘렸는데도 움직여요. 기분 나빠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을 두고 두런거리는 적이나 목을 벤 용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상대조차 되지 않으리라고 여겼던 새하얀 여자.
‘전부 저 여자 때문이다.’
그래.
단 한 번의 공격도 하지 않았으나, 레이븐을 죽인 건 저 여자였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눈앞의 적들은 순식간에 전멸했을 터였다.
레이븐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마왕! 그 녀석 명령만 아니었어도…….’
솔직히 그는 처음 유스티나스를 만났을 때, 당장이라도 목을 꺾고 싶었다.
저 여자는 고작 열두 살 때 자신의 역병을 해결해 버렸으니까.
오랜만에 나선 활동에서 꼬맹이 때문에 고배를 마시자 창천 그 개자식이 얼마나 자신을 놀려 대었던가.
“성녀는 반드시 살려 둬.”
마왕의 명령만 아니었어도 그는 성녀가 크랙에 들어오자마자 죽였을 터였다.
그럼 이렇게 당할 일도 없었겠지.
하지만 복기해 봐야 어쩌겠는가?
‘젠장. 이제 아무래도 좋아.’
그는 이미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복수라도 하는 게 수지에 맞지 않겠는가.
검은 눈이 억울함과 광기로 번들거렸다. 목이 빈 몸뚱이가 손을 뻗었다.
많은 조작은 필요 없다.
“죄송해요, 콜록. 이렇게 민폐를 끼치게 되어서…….”
장치는 마쳐 두었으니까.
마왕이 말했던 ‘성녀’가 그의 미궁에 들어왔을 때에, 전부.
“마족이란 참 기분 나쁜 족속이로구나. 죽는 순간까지 웃는 게, 아주 기분을 잡치게 만들어.”
콰직.
레이븐이 주먹을 쥠과 동시에 도성지가 그의 머리통을 밟아 박살 냈다. 산산조각 난 두개골은 곧 다른 마족이 죽을 때처럼 자연 상태의 마력으로 화해 흩어진다.
“…망할 마족.”
도성지는 발끝의 감촉을 느끼며 사납게 웃었다. 좀 전에 잘렸던 팔 부분이 아직도 저릿했다.
‘그래도, 겨우 끝났군.’
용케 승산 없어 보이는 싸움에 이겼다. 인정하기 싫지만 신녀와 동료들의 공이 컸다.
“후우.”
포상이라도 내려 줘야겠어.
그렇게 평온히 생각하는 도성지의 귀에, 돌연 고성이 파고들었다.
“유스! 안 돼!”
섬뜩할 정도의 절규였다.
평소 과묵한 사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듣는 사람의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발악.
“유스!”
도성지는 서둘러 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몇 발자국을 뛰니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신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야, 유스. 아니지? 거짓말이야. 안 돼. 아, 제발. 유스. 눈 떠.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저게 무슨-”
신녀의 상태를 확인한 도성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게, 신녀는.
“눈 뜨라고, 유스티나스!”
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