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I the only one in the apocalypse who thinks the genre is weird? RAW novel - chapter 276
“…야. 쏴.”
개소리를 들어서 귀를 씻고 싶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고,
투콰앙―!!
이번에는 진짜로 함포가 쏘아졌다. 주포가 아니었지만, [비공정] 측면에 달린 함포에서 동시에 쏘아진 마력이 개소리를 하는 고블린을 닮은 놈의 전신을 노리고 쏘아졌다.
“저걸로 뒈지진 않을 거야. 이상하게 기운도 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고. 그러니까 다들 준비하라고 해.”
“네! 보스!”
“엘라.”
“네. 반려.”
“그것을.”
“네!”
엘라는 내 지시에 아공간을 열고 팔을 쑥 집어넣고 무언가를 찾았다. 허공에 팔이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몇 초 정도 지났을까?
그녀의 손에 깃발이 놓여 있었다. 어딘가 낡은 것 같으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오래된 골동품 같은 깃발이.
저것은 무려 500 페타 카르마가 들어가서 신으로 추정되는 존재의 손에 의해 업그레이드 된 장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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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太古)의 깃발 [Rank: God-]]아주 먼 옛날.
한 지성체가 자신의 땅이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 땅에 꽂은 장대입니다. 깃발이라는 이름이 없던 시절에 땅의 주인임을 주장하기 위한 장대는 이름난 수집가이자, 위대한 계약의 신이며 동시에 마법의 신인 존재가 거둬들여 특별한 기운을 주입해 재탄생했습니다.
1. 장대를 땅에 꽂으면 그곳을 중심으로 반경 100km 범위의 환경이 장대 주인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변경됩니다.
2. 장대를 꽂은 주인이 마력을 주입한다면, 주인이 원하는 환경을 임의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환경이란, 식생과 기후 같은 단순한 것뿐만 아니라 마력 농도와 원소 포화는 물론이 특별한 식생을 구현하는 것 역시 포함됩니다.
3. 장대의 범위 안에서 아군으로 지정된 대상은 모든 회복 속도가 2배 빨라지며, 모든 전투 행위에 1.5배의 보정이 붙습니다.
4. 장대의 범위 안으로 적대적인 존재가 침범할 경우, 모든 스탯이 50% 감소하고, 모든 공격적인 행위와 방어적인 행위의 효율과 성능이 33% 감소합니다.
5. 장대의 주인은 ‘같은 무리’로 최대 9명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같은 무리로 지정된 대상은 장대의 사용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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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청난 장비도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땅에 꽂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지구나 언데드의 차원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곳은 〈심연〉이다. 게다가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주변은 온통 거무튀튀한 불길한 안개가 진득하게 깔렸다.
물론,
“소피아. 알코르.”
“네. 여보. 빛이여―!!”
“봉행하겠나이다.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삼라만상의 모든 악적과 삿된 것을 토벌하는 파군성(破軍星)이시여.”
깃발을 꽂을 곳 일부만 정화할 준비와 계획은 당연히 준비해 두었다.
“무, 무슨 짓이냐?!”
그리고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고블린을 닮은 외모로 믿기 힘들 정도로 거인과 같은 덩치를 자랑하던 놈이 당황하는 사이,
푹―.
엘라가 손에 들고 있던 [태고의 깃발]이 정화된 [심연]의 땅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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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되게 웃긴다?
277. 너네 되게 웃긴다?
“아아아―. 이 멍청하고 아둔한 인간 놈아!”
깊은 절망은 한탄을 터트리면서도 자신이 안배한 것을 작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깊은 절망이라는 그의 진명이자 아이덴티티.
그리고 그가 정신을 놓은 사이에 현재 〈심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외곽]에 잔뜩 쌓인 절망의 기운.
본래라면 차원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멸시키는 〈심연〉이라는 차원은 그 넓이가 지구 같은 차원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넓었다.
그렇기에 [외곽]으로 그 범위가 제한되지 않았다면, 깊은 절망은 지금쯤 심연의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측근과 몸을 숨기고 버티고 있었을 거다. 이렇게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싸우는 게 아니라.
그렇게 제한된 환경에 깊은 절망은 절망했다.
그리고 그런 제한된 환경이기에 깊은 절망은 하나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냐고? 그랬다면 그의 권능이 아무리 계산해도 0에 수렴하기에 망가질 리가 없겠지?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협박의 용도로 사용할 수를 마련했다.
“그마아아안!!”
그의 목소리가 폭음과 굉음을 뚫고 전해진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포격이 멈췄다. 사실 깊은 절망의 그만이라는 말 때문에 멈춘 건 아니다.
“꽂았어?”
“네. 성공이에요. 반려.”
“그으래?”
이요한과 그의 가신들이 하려던 계획의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졌기 때문이다.
“뭐……?”
차원 〈심연〉에 갑자기 등장한 푸르른 숲. 이건 깊은 절망을 비롯한 [심연의 짐승]에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숲이라고?”
다른 차원도 아니고 이 〈심연〉에 숲?
숲이 무엇인가?
식물은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1차 생산자다. 태양 에너지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에너지를 생물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로 바꿔주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
그리고 ‘숲’은 그러한 중요한 1차 생산자가 과하게 몰려 있는 공간을 말한다.
차원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소멸시켜야만 하는 〈심연〉과는 무조건 반대편에 설 수 밖에 없는 공간이기도 하고.
갑자기 엘프로 보이는 암컷이 심연의 바닥에 이상하게 생긴 것을 꽂는 순간 나타난 울창한 숲에 깊은 절망은 자신이 준비한 무언가를 자랑할 기회를 놓쳤다.
“그래. 숲이지. 이런 거 처음 보나? 처음 보겠지. 심연 찐따니까.”
“시, 심연 찌, 찐다?!”
“그래. 어때 숲을 처음 본 소감은? 이 파릇파릇하고 싱글싱글 싱그러운 생명력에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니?”
“…….”
깊은 절망은 심연의 [외곽]이라고 해도 숲을 소환한 엄청난 일을 해놓고 저런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인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라면 엄청나게 자랑스러워 했을 업적인데 말이다.
‘설마?’
그리고 닿은 하나의 생각.
이런 일이 저 인간 놈에게는 별 감흥도 없는 일인 건가?
“자, 아까 그만하라고 처절하게 외쳤지? 어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마지막이니까 들어는 줄게.”
“이, 이이!! 후우…….”
저 얄미운 말투에 하마터면 본래 목적을 잊고 화만 낼뻔했다. 간신히 참아낸 깊은 절망은,
“절망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뭔 개소리야? 뜬구름 잡는 소리 한 번만 더하면 대화고 뭐고 그냥 죽인다?”
“그럼 묻겠네. 절망이라는 감정이 쌓이면 과연 그것은 [심연]에서 소멸시켜야 하는 감정일까? 아닐까?”
“알게 뭐야? 그딴 거? 이제 끝?”
“아직 아니네! 자네는 대화라는 걸 해본 적이 없나?! 혹시 친구가 없는 건가?”
“나 친구 많아!!”
발끈하는 인간 수컷을 보며 깊은 절망은 확신했다. 저건 친구가 없는 남자의 전형적인 반응이라고.
“아무튼! 답부터 말하자면 절망이라는 감정은 [심연]에서 주로 채집해 소멸시키는 감정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네.”
“끝?”
“그렇기에 절망이라는 감정에 대한 판정은 심연조차 애매하다네. 만약 절망이라는 감정이 심연이 채집해야 할 악의적인 것이라면, 저 [소멸의 벽]을 통과해 [깊은 곳]으로 향했겠지. 하지만 여길 보게. 어떤가?”
깊은 절망은 확장한 숲이 닿지 않은, 자신과 [심연의 짐승]이 선 땅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가 가리킨 땅에는 발목 위로 무릎 아래의 높이에서 생긴 어두운 회색 안개가 아주 서서히 흐르며 [소멸의 벽]을 향하고 있었다.
“보게나. [심연]은 이 절망이라는 감정을 배척하는 건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지. 그래서 무려 신이 설치한 [소멸의 벽]에 부딪쳐서도 절망의 기운이 소멸하지 않고 통과하는 것이고.”
“끝이냐고 이 새끼야!”
금방이라도 공격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이요한을 깊은 절망은 이 악물고 못 본 척하면서 무시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방금 자네를 비롯한 지구 출신 지성체의 공격으로 내 부하가 많이 죽었지.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절망의 기운은 더 많아졌네.”
“그리고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숲을 소환했지. 그러면서 [외곽]의 공간이 더 줄어들었고, 절망은 더 짙게 내 주변에 자리했네.”
“아, 이 새끼가 그런데. 계속 무시하고. 끝이냐고!”
“아니네. 그 전에 자네, 내가 소개를 했던가?”
“관심 없어. 이제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이 〈심연〉을 지배하는 본인은 ‘깊은 절망’이네.”
그 소개에 이요한은 껄렁거리며 상대를 비웃고 있던 얼굴을 고쳤다. 그리고 잠시 짧은 시간의 고민을 마친 후,
“여태 절망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더니, 네 이름이 깊은 절망이라고 말하는 건…….”
“그렇네. 본인이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중2병?”
“아니다!”
“개씹덕?”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니라고!”
깊은 절망은 왜 자신이 화가 나는 건지 모르면서도 일단 격렬하게 부인했다. 자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은! 자네가 우리를 전멸할 각오로 공격할 경우, 우리 역시 그냥 죽을 수 없으니 준비한 것을 발동시킬 것이라는 거네!”
“음.”
그렇게 누가 칼 들고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깊은 절망이 다다다 빠르게 말을 토해낸 이후 이요한이 침음을 흘리며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그래.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무승부다!! 무승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야!’
자신의 협박이 먹혔음을 확신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무려 그 악명 높은 〈심연〉이라는 차원인데. 너무 쉽다 했어.”
“그렇지. 그렇고 말고. 그러니까 무승……!”
“열심히 하자. 다들.”
“응?”
하지만 뜬금없는 이요한의 격려와,
“네! 반려!”
“그럴게요. 여보.”
“하긴 너무 풀어졌죠? 저희가?”
…
갑자기 정련된 기운이 흘러나오는 무리를 보며 깊은 절망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양상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제안하겠네. 내 부하를 모두 넘겨주지. 그리고 난 저 안에서 절대 나오지 않겠네. 어떤가?”
자존심? 상한다. 그것도 부하들이 모두 듣고 있는 상태에서 저런 말을 꺼내는 건 정말이지 쪽이 팔린다. 하지만 어쩌겠나. 깊은 절망은 태생이 그러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니까.
다만,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를 넘긴다고? 싸워보지도 않고?”
“그럴 바에는 너를 넘기겠다! 빌어먹을 절망 놈아!”
…
이요한이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깊은 절망은 부하들의 반발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가뜩이나 부하들 앞에서 거의 목숨을 구걸하다시피 한 깊은 절망의 화를 돋웠다.
“닥쳐!!”
“너나 닥쳐!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멍청한 놈아!”
[심연의 짐승] 중, 누군가 그렇게 외쳤고,푸확―!
그 소리가 들린 주변에서 검은 피보라가 일어났다.
보통의 경우라면 여기서 소요가 가라앉아야 정상이지만,
“죽인다! 차라리 너를 죽이고 우리가 살아남겠어!”
“그래!”
…
이번에는 아니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고, 애초에 이곳은 [심연] 아닌가. 서로를 향한 공격과 동족상잔은 일상인 곳이다.
그렇게 깊은 절망과 지금까지 차출되지 않은 제법 강한 [심연의 짐승]의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투콰아앙―!!
그들 사이를 거대한 마력 광선이 가르며 그 상황을 종결시켰다.
“너네 되게 웃긴다? 왜 너네끼리 싸워?”
태연하게 얄미운 소리를 하는 이요한은 더는 깊은 절망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고는,
“너희가 우리 손에 죽어야 카르마 포인트가 들어오는 거야. 너희끼리 죽이면 우리는 여기까지 출장 나온 본전도 못 찾는 거라고.”
듣는 [심연의 짐승]의 복장이 터지는 소리를 또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