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I the only one in the apocalypse who thinks the genre is weird? RAW novel - chapter 6
“네!”
집 안으로 들어온 유다연의 볼이 온기에 발갛게 상기되는 걸 힐끔 보고 전자레인지에 데운 우유에 코코아를 타서 건넸다.
“재신이 나오라고 해도 돼.”
코코아를 호호 불어 마시다가 내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살살 흔드는 걸 보면서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 어차피 결론은 내야지. 종말을 대비하든, 안 하든.”
“…네.”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대답한 유다연의 고개가 다시 툭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들린 유다연의 눈빛은 어딘가 시리고 섬뜩했다.
“그…….”
“미안.”
내가 막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대뜸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찾아온 정적.
“어?”
“미안해.”
미치겠다. 진심으로. 사과를 받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 했다. 아니, 상상도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닌 존재인 지구의 의지가 어떻게 보면 하등한 인간에게 사과를 한 셈이다.
“변명을……. 내가 변명 이런 거 딱 질색인데. 이유를 잠깐 말해도 될까?”
“좋아. 나도 궁금했어. 안 그래도.”
아까 그 협박은 조금 뜬금없이 나왔다. 소설로 치면 개연성이 없었달까?
“나를 처음 만난 날, 내가 그랬지? 사기 계약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고. 그리고 오늘 새벽까지 과거이면서 미래였을 뻔한 시간에 무슨 일이 지구에 벌어졌는지 알게 됐어.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야. 다르지, 달라. 보험으로 들어놓은 것의 곁다리 보상이라서 그런 걸까? 강제로 주입되는 느낌에 가까웠어.”
“기억이?”
“기억과 감정이. 너는 회귀를 경험했지만, 난 일방적인 덮어씌우기를 당한 느낌? 더욱이 난 인간이 아니라서 정보의 양에 한계가 없었어. 거기서 끝이 아니야.”
“뭐가 더 있다고?”
“난 단순히 내가 느꼈던 기억과 감정만 전해진 게 아니었어. 나만이 아니라, 모든 지구의 의지들이 느낀 감정과 정보를 며칠에 걸쳐 쉬지 않고 주입 당했어. 그 한탄과 후회, 자책, 절망 같은 감정들을. 내가 무슨 느낌이었을 것 같아?”
“고구마 수만 개를 며칠 동안 억지로 목구멍에 처박힌 느낌?”
“그래! 맞아! 그거! 젠장! 머저리 같은 것들! 그러니까 내가 그 계약 이상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그런데 마냥 화를 낼 수도 없고, 안 될 걸 알면서도 1분만 빨리 떠올랐으면 어땠을까? 이런 후회를 하면서 지구의 의지를 모아서 설명도 하고, 이 아이를 찾아서 너를 만나게 하고, 네게 설명도 해야 하는데 넌 자꾸 죽는다고…….”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재신이 신이 아니라, 여러 감정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보인다.
“맞아. 우리도 별반 다를 거 없어. 인간이나 마찬가지지. 실수하고, 화내고, 자책하고. 그래서 그랬어. 그리고 네 말도 맞아. 이건 우리의 실수야.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아. 미안해.”
“…좋아. 사과 받아들이지. 나도 많이 감정적이었어.”
“아니야. 내가 말이 심했지. 협박이었으니까. 그리고 고마워. 진심이야.”
유다연의 몸을 빌린 재신은 이전처럼 가식적이지 않은 진심이 담긴, 어딘가 후련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해도 될까?”
“아. 그 전에. 뭐 좀 먹자. 다연이도 배고플 거야.”
“…그래.”
해맑게 웃으며 답하는 재신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어쩌면 재신의 것이 아니라, 유다연의 것처럼 보일 정도로 순수했다.
파스타를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다는 유다연을 위해 여러 종류의 파스타를 주문해서 우리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나는 차가운 커피를 재신은 예의 그 지독하게 달아서 혀가 아플 것 같은 흑당라떼를 받아들고 대화를 이어갔다.
“종말 이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하는 건 나중에 일이야.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를 잘 한다면 너는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이길 수 있어. 그래서 우린 아니, 적어도 난. 너에게 모두 걸었어. 올인이야.”
“나한테?”
어느새 나는 이 반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재신은 지적하지 않았고.
“그래.”
“뭘?”
“침략자를 모두 물리치고 지구가 지구로서 존재하기 위한 모든 방법을.”
“어떻게?”
대체 ‘내게 무엇을 봤기에 이토록 초지일관으로 기대를 거는 걸까?’ 하는 의문과 ‘로또 당첨금을 수령한 것 말고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할까?’ 하는 부담감이 경쟁적으로 차오른다.
“일단.”
따악―!
유다연의 몸을 빌린 재신이 손가락을 튕긴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변했다.
“네 몸을 치료했어. 아니, 각성시켰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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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안녕하세요.
심행입니다.
오늘도 찾아주셔서 그리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상태창?!
지구가 인간이라는 종족을 ‘유해’하다고 판정하고 말살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지구의 환경이 바뀐 건 아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다거나, 산소가 줄어들거나 하진 않았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이 내려진 순간 거의 모든 인간은 지구가 자신을 배척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종말, 멸절, 몬스터, 괴물.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인외의 존재가 지구에 나타났고 그들은 오직 인간만 노렸다. 옆에 태연하게 지나가는 소를 보고도 침을 흘리지 않고 오직 인간의 고기와 피 그리고 시체를 노렸다.
억울하게 생각하는 인간도 있다. 자신은 이런 대우를 받을 정도로 악하게 살지 않은 인간도 있으니까. 그때 지구에 다른 인격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편에 선 지구의 의지가 나타났다.
그들이 인간의 편이라는 증거이자, 선물이 내려왔다. 그게 바로 ‘각성’이다.
각성을 경험하게 되면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바뀌며,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다.
각성이 특별한 이유는 각성과 동시에 모든 인간은 기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마력이라는 기이한 힘을 다루기 위한 신체로 완벽하게 바뀐다.
그건 다시 말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지닌 질병과 질환이 완치된다는 거다.
― 가이아 게시판, 「종말의 시작 1편」 중에서.
*
“…뭐?!”
“이미 알잖아?”
“각성…이라고?! 내가 아는 그 각성?!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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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자 정보〉
1. 이름(Name): 이요한
2. 국가(Nation): 대한민국
3. 소속(Clan): None
4. 직업(Class): None
5. 카르마(Karma)
[선업(Plus Karma) None] [악업(Minus Karma) None]6. 스탯(Status)
신체[Rank: Red] [근력 1] [민첩 1] [체력 1] [내구 1] [마력 1]
〈고유 능력〉
〈일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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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상태창이다. 우와. 오랜만에 보니까 토할 것 같다. 정신 나갈 것 같다. 진심으로. PTSD 씨게 오는데?
“고작 이 정도로?”
“고작이라니! 내 지난 삶을 아는 사람 아니, 아는 지구의 의지가 할 말이야?”
지난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정신은 멀쩡한데 척추를 부러뜨리고 성대에 상처를 내서 듣는 건 되는데, 말이 안 됐다. 자극은 그대로 받는데, 정신만 또렷했다.
그 상태로 누워서 몇 년을 보냈다. 정신적으로 미치지 않은 건 내가 각성자였기 때문일 거고, 척추가 부러진 상태에서 십 년을 가깝게 죽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상태창을 보면 PTSD가 안 생기겠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럼 뭐시……!”
“중한디 같은 거 하면 진짜 실망할 거야.”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찰나의 순간에 다른 드립을 떠올려고 뇌에 과부화를 주고 있었는데, 그런 나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손을 훼훼 저은 그녀는,
“미리 각성시킨 건 네 암을 없애기 위해서야. 그 정도 눈치는 있지? 그리고 신체 스탯이 화이트 랭크가 아닌 레드 랭크인 이유는 네가 ‘차원 지구의 최초’ 각성자이기 때문이고. 자, 그럼 이제 남은 건 클래스겠지?”
따악!
묻고 싶은 몇 가지가 그냥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지나가고, 전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튕기며 이제는 각성으로 확실하게 감지할 수 있는 힘이 발현된다. 나를 중심으로 휘몰아친 마력이 온전히 내게 스며들었다.
『각성자 클래스 개화(開花).』
『클래스 「영주(領主)」 획득.』
『전용 스테이터스 [위엄] 개방.』
『고유 능력 [영지(領地)] 체득.』
『일반 능력 [영지 관리] 체득.』
어? 저기.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이거 제 거 아닌데요?
“너 진짜……. 여전하구나?”
“내가? 뭐가?”
아무래도 표정이나 말투가 전혀 좋은 쪽으로 여전한 것 같지가 않다. 유심히 보고, 대충 보고, 달리면서 봐도, 저건 한심하다는 느낌이 가득해!
“성격이 그렇게 물러터져서 망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래? 딱 봐도 예전 것보다 좋아 보이면 입을 싹 닦고 있어야지. 에휴. 니가 무슨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나무꾼이야?”
아니, 그래도 완전히 다른 클래스를 주면 어쩌자는 거냐고. 그럼 회귀한 이점이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진데?
내가 과거에 얻었던 클래스는 언젠가도 언급했지만, [지주(地主)]였다. 단어 그대로 ‘땅 주인’이지.
효과는 고유 능력의 랭크에 따라 지정한 곳을 중심으로 반구 형태의 쉘터, 그러니까 게임으로 치면 PVE가 제한되는 안전지대가 생성된다.
투명한 반구가 뒤덮인 쉘터 안은 ‘쉘터에 등록된 인간’에게 해로운 모든 것을 차단한다. 단순하게는 외부의 공격부터 시작해서, 물과 공기까지도 정화한다. 그건 다시 말하면 쉘터에 등록되지 않으면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적’으로 규정된다.
쉘터 안으로 침범한 적은 랭크에 따라 온갖 디버프가 걸린다. 단순히 레드 랭크에도 육체 스탯이 50% 깎였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서울에서 가장 넓은 쉘터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땅 주인은 자신의 땅 안에서 ‘위해에 면역’이라는 점이다.
그럼 왜 반신불수가 됐냐고?
그거야…….
“밖에서 당했지? 과거에? 뭐, 그 새끼들의 논리가 틀린 건 아니지? 너도 카르마 포인트가 필요했고, 그걸 통해서 스탯을 올려야 쉘터가 더 넓어질 테니까. 두 번째 등장한 그 쓰레기들은 플러스 카르마를 제법 줬으니까.”
밖에서 당했기 때문이다. 쉘터 밖에서. 쉘터로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클래스 [지주]의 랭크를 올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니까.
솔직히 지금에서야 하는 말인데, 시나리오가 좋았다. 설득력이 있었다고. 낚일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
“지랄한다. 어휴.”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한심하게 보는 시선을 피해,
“그래서 이건 뭔데? 영주? 그 중세 시대의 그거? 한자가 딱 그건데?”
질문을 던졌다.
“말 돌리기는. 맞아. 그럼, 여기서 질문. 영주(領主) 그리고 지주(地主). 모두 주인 주(主)자가 들어가지? 무언가의 주인이라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영주와 지주는 무슨 차이일까? 더 명확하게 묻는다면, ‘영지’는 그냥 땅(地) 하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
쉬운 것 같은데,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아니. 감각적으로는 대충 이해하겠는데, 명확한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다는 게 맞으려나?
“인간이 동물과 차이점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문자의 사용이지. 그럴 때는 문자를 들여다봐. 영지, 영주라는 단어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글자가 거느릴 영(領)이잖아.”
“응?”
교수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더 이해가 안 되는뎁쇼?
“쯧. 뜻을 나타내는 머리 혈(頁)과 소리를 나타내는 령(令)이 합쳐진 게 거느릴 영(領)이잖아. 여기서 혈(頁)이라는 단어는 ‘머리’, ‘목덜미’를 뜻하지. 그리고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인 령(令)은 옛 갑골문자에서 무릎 꿇고 앉은 사람 머리 위에 지붕이 그려진 형태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을 표현한 거라고 할 수 있지. 자, 이쯤 되면 이해가 되나?”
뭐라는 거야. 그게 어떻게 이해가 돼?
“아, 이런 빡대가리가!”
“그래! 이제 너도 알아주는구나?! 나 빡대가리에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개호구라니까?!”
“좋겠다! 왜? 현수막이라도 걸지?!”
“그정도는…….”
“어휴. 영주, 영지. 모두 단순히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와 달리 ‘명령’을 할 수 있는 권리와 힘을 가진 게 영주이고 영지라고! 재산권만 가진 게 아니라, 사법권과 행정권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작은 국가! 그 국가의 절대권력자! 그게 영주다.”
“아, 예에~.”
그래서 그게 뭐? 과거에도 내게는 명령권 비슷한 게 있었다. 당연하지. 쉘터 자체를 내가 만드는 건데. 내 땅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서 뒈질 수밖에 없는데?
“야!! 너는 어떻게 그 머리로 취직해서 회사까지 다닌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