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0)
두 번 사는 미대생 10화(10/93)
*
전디전 팀원들과의 약속 장소는 석관동 인근의 어느 룸카페로 정해졌다.
카페 이름이 썩 익숙했다.
‘잠자는 다락방이라. 그래. 이 시기에는 아직 영업하고 있었지.’
동화 같은 인테리어와 예쁜 유니폼으로 대학가에서 잘 나갔던 프랜차이즈였는데, 미래에는 쫄딱 망해버렸다.
모처럼 다시 보니 반갑다.
그렇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지정된 방의 커튼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실례합니······ 다?”
아는 얼굴이 좀 많았다.
두 명의 천재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커피를 쪽쪽 빨며 생각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한예원이 맞긴 하구나.’
조원들의 얼굴을 살폈다.
서글서글하고 키도 크니 교회 오빠 소리 잘 듣게 생긴 남학생이 한 명.
그리고.
그와 반대로 작은 키에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여학생이 한 명.
얼핏 보기에 정반대인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다 아는 얼굴이네.’
내가 전생에 봤거나 만난 적 있는 사람들이란 것이었다.
먼저 저 남학생.
‘주지훈. 3학년 건축과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
좋은 성격과 잘생긴 얼굴에, 뛰어난 실력은 타 학년에도 명성이 자자했다.
‘공부도 엄청나게 잘했다지.’
듣기로는 한예원과 한국대를 동시에 붙고 여기에 왔다고 하는데, 두 학교의 입시 전형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생각해 보거든 그야말로 엄친아라 불러 마땅한 남자.
그게 주지훈이었다.
‘하지만 그깟 건 아무것도 아니지.’
여기까지는 지금의 그일 뿐.
주지훈의 진짜배기는 따로 있었다.
‘스타트업 건축회사, 주지 건축디자인의 사장. 주지훈.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그렇다.
그는 훗날 전공인 건축을 한껏 살려 대형 건축회사에 입사한다.
그리고, 불과 5년 만에 퇴사한 뒤 자기 회사를 차리고 대박을 터뜨린다.
주지 건축디자인.
그의 회사는 개인 주택 설계를 전문으로 취급했는데, 어느 연예인의 집을 만들어 준 게 방송에 올라 입소문을 탄 것.
그렇게 몇 년.
주지훈은 불과 30대에 불과한 나이에 백억 대 자산가가 되었다.
‘이후 스타트업 대박 사례로 강연회를 뛰면서 자서전마저 대박을 터뜨리지.’
어쨌든 유능하다.
전시 디자인 공모전에서 그가 같은 팀원이라면 든든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저 선배는······.’
한편, 또 다른 여학생 한설은 조소과생이다.
그녀는 해외에 진출하더니 설치 미술로 대박을 터뜨렸다.
20대에 작품 경매가가 1억을 넘겼다나.
한국 젊은 예술인의 쾌거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를 봤었다.
‘어느 쪽이든 전디전에 잘 맞는 인재다.’
이번 전디전은 단순히 디자인 기획서를 작성하는 수준을 넘어, 실제 모형까지 제작해야 했다.
그것도 가로세로 2미터 이상의 모형을.
이런 상황에 한설 같이 손재주가 좋은 사람은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
좋은 예감이 들었다.
‘역시 한예원에 인재가 많긴 해. 이런 인재가 떡하고 나오다니.’
하긴, 당연한 일이다.
이미 입시를 통해 전국에서 한 번 거르고 최상위 인재만 모인 게 한예원.
그중에서도 전디전에 추천됐다는 건, 한국 미대생 전체에서도 최상위 엘리트라는 말이니.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번 전디전 대상은 한국대에 뺏기지 않았나?’
그렇다.
분명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번 전디전의 대상팀은 한국대에서 나왔다.
그래서 교수님들이 한참 예민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유가 뭘까. 팀원들이 이렇게 잘났는데.’
전시 디자인은 철저하게 실기로 승부를 보는 분야다.
그렇다면 전국의 실기 괴물들이 뭉친 한예원이 수상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국대에 밀렸다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 설마?’
한 가지 짐작이 갔다.
그것도, 매우 가까운 짐작이.
‘서지원 때문은 아니겠지?’
그렇다.
이번 생에는 내가 이종이 교수의 조수 신분으로 추천을 받아서 왔지만, 전생에는 서지원이 작업실 조수였다.
그렇다면 전생에는 그녀가 나 대신 이 조합에 끼지 않았을까.
‘그 성깔을 생각해 보면 협조도 더럽게 안 했을 테지. 선배들이라고 존댓말을 할 것 같지도 않고.’
강노아 교수님의 첫 수업 당시, 모네의 [양산을 든 여인]을 작품 주제로 하자는 박규태의 말에 그녀가 어떻게 반응했던가.
태클부터 걸고 봤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렇다고 대안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같은 일이 여기에서도 벌어졌다면, 아무리 조원이 훌륭해도 어쩔 수 없었겠지.’
물론, 이건 내 추측에 불과하긴 했다.
그것도 개인적인 감정이 팍팍 들어간.
‘설마 이런 자리에서도 그랬겠어. 걔가 비글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혼자 상상의 나래에 잠겨 있으려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네?”
고개를 돌아보니 주지훈이었다.
그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
“아, 저 괜찮아요.”
“괜찮기는 무슨. 다크서클 심한 것 좀 봐라.”
“과제 준비하느라 잠을 못 자서······.”
대충 둘러대는데, 주지훈은 여전히 의문스러운 눈길로 내게 물었다.
“한예원 1학년 생활이 좀 힘들지?”
“네? 어떤 게요?”
“말 안 해도 알아. 1학년 때는 원래 다 힘들어 죽으려고 하더라.”
“지훈이 오빠 말이 맞아.”
가만히 있던 한설도 주지훈의 말을 거들었다.
“한예원 커리큘럼이 1학년부터 빡세게 굴리는 걸로 유명하잖아.”
“그렇지. 나는 처음 입학했을 때 내가 꿈꿔왔던 캠퍼스 라이프가 이런 거였나 자괴감 들어서 자퇴할 뻔했다니까.”
자퇴는 농담이겠지만, 그 외에는 마냥 농담으로 넘길 수 없었다.
실제로 한예원의 커리큘럼은 철저한 과제 폭탄이었다. 학기 중에는 수면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게 당연시될 정도.
다만, 나는 예외였다.
전생에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보니 크게 버겁지는 않았다.
일부 복습이 귀찮을 뿐.
“괜찮아요. 배울 수 있을 때 배워야죠.”
“그런 말은 교수님들 앞에서 하는 거고.”
한설이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번 전시전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까, 넌 괜한 부담 가지지 말고 열심히만 해.”
나는 그 말에 그만 웃어버릴 뻔했다.
‘부담은 가질 필요 없지만, 열심히 하라는 말은 좀 모순된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가 날 걱정하는 모습은 퍽 신선한 맛이 있었다.
150cm나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덩치의 선배가 팔짱 끼고 근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란.
정신 연령과는 상관없이 든든했다.
“알았어요. 선배들만 믿을게요.”
어쩐지 이 둘에게서는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멤버를 데리고 탈락했던 전생의 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
짧은 자기소개 뒤 본격적인 기획 회의가 시작됐다.
“기본적인 구성은 미리 짜 놨어.”
주지훈이 스케치북을 이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내가 만든 제시안인데, 이걸 기반으로 모형을 만들 거야. 한 번 훑어볼래?”
“잠시만요.”
한설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두 사람은 내가 오기 전에 이미 대화를 나눈듯했다.
나는 천천히 스케치북을 살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감탄을 흘렸다.
‘나쁘지 않은데.’
자연과 전시 공간을 하나로 엮은 듯한 디자인이었다.
구성 소재는 주로 나무 재질.
보아하니 주지훈의 창작품인 듯했다.
‘미래의 건축사 사장님다운 발상이네.’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친환경적인 감각이 세련됐기도 했고, 자칫 SF마냥 미래지향적인 설계로 쏠리기 쉬운 전시회에서 의외성도 노릴 수 있을 듯했다.
한 마디로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점은, 그가 전시 디자인의 목적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흔히 전시 디자인이라고 하면 뭘 전시하는 건지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
전시 디자인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면서도 그 구조물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됐다.
진정한 주인공은 그 안에 놓을 전시품이기 때문.
전시품이 놓일 공간을 설계하는 게 전시 디자인인데, 정작 전시품을 묻어버려서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배꼽이 배보다 큰 꼴이지.’
요컨대, 지나친 화려함을 추구하다가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됐다.
프로 중에서도 이 부분을 놓치고 자기 디자인만 자랑하다가 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거든, 그의 설계는 특히 훌륭했다.
‘주지훈 이 사람, 예술 욕심을 버릴 줄 알아.’
내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 한설이 거들었다.
“이걸 기반으로 모형 제작에 들어가면, 전체적인 디자인은 지훈이 오빠가. 여기저기 놓을 소품은 내가 만들 거야.”
조소과다웠다.
나는 두 사람의 말에서 우리 팀의 역할 분배를 대충 짐작했다.
‘조합을 미리 짜 놨군.’
주지훈이 전체적인 구성을 갖춘다.
한설이 디테일을 잡는다.
전시 디자인으로서는 나름 완벽한 조합이었다.
내가 할 일이 없어 보일 정도.
아니, 어쩌면 실제로 이게 이들의 의도였을지도 몰랐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
1학년이니까 못 믿음직했으리라.
그러나, 정작 내가 무임승차할 생각이 없었다.
‘전시물을 돋보여주는 공간으로서의 전시 디자인을 꾸린다. 기본기에 충실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주지훈의 스케치북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대로 구성해놓으면 흔하디흔한 작품에 지나지 않을걸.’
전시를 수십 번도 넘게 진행해 본 내 눈에는 훤히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시기의 주지훈은 아직 부족했다.
실무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학부 수준의 이론과 기본기에만 치중하는 바가 있었다.
부족하다.
공모전에서 대상을 노린다면, 기본 그 이상까지 볼 필요가 있었다.
‘좋아. 이 부분을 내가 만져 보자.’
내 역할을 깨달았다.
보통 이런 전시전에 참가하는 대학생들이 흔히 겪는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자기 아이디어를 참신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신함은 구상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라면 다르다.
틀을 깰 수 있다.
내 머릿속에는 반칙 수준의 참신함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
계획대로만 진행된다면 대상도 노려 볼 만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문제는 이 둘이 내 말을 따를 지인데.’
흘끗 두 사람을 봤다.
여기에 추천을 받았다는 건, 학과는 물론 교수들 사이에서도 큰 신임을 얻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기 실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나는 1학년.
실적 없는 1학년으로서 고학년 선배들을 설득하려면, 그건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말보다는 실력으로 보여준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짠 뒤 입을 열었다.
“저기요. 혹시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뭐든 편하게 말해.”
주지훈이 웃는 얼굴로 받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작품이 좋은데요. 다 좋은데요. 몇 개만 고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고친다고?”
“네.”
“음······.”
주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고치는 거야 좋은데, 자세히 예를 들어줄 수 있을까?”
“잠깐 샤프 좀 빌려주세요.”
“샤프는 왜?”
“말보다 그림으로 설명하는 게 더 편해서요.”
“잠깐만.”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가방을 뒤져 필통째로 내게 건넸다.
누가 건축과 아니랄까 필통 안은 제도용 샤프로 가득했다.
그중에는 내게도 반가운 물건이 있었다.
‘이 샤프는 오래간만이네.’
프래그 1000 프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전 직원에게 보급했던 물건이다.
손에 쥐자, 익숙한 금속 질감이 내 손끝을 채우며 자신감이 차올랐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만 같은 기분.
“그럼 잠깐 실례할게요.”
나는 주지훈의 스케치북 한 장을 뜯어냈다.
그리고 주지훈이 그려두었던 스케치를 슬쩍 훑어본 뒤.
그 스케치를 기반으로 내 아이디어를 얹어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사사삭.
샤프심이 종이 긁는 소리가 좁은 방을 한가득 메웠다.
“어?”
주지훈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저 표정의 의미가 뭔지는 훤히 들여다보였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궁금하겠지.
곧 알 게 될 것이다.
‘적당히 놀라겠지.’
주지훈이 그려온 스케치를 봤다.
사실, 그림 실력에는 조금 실망했다.
나도 전생에 기획 스케치는 수도 없이 해 봤다.
‘처음에는 꼼꼼하게 그리면 장땡인 줄 알았지.’
나중에야 깨달았다.
무조건 자세히 그린다고 좋은 게 아니다.
보는 사람이 전체적인 느낌을 이해할 수 있게끔 핵심 위주로만 빠르게 그리는 게 핵심이었다.
내가 지금 그렇게 그렸다.
주지훈의 초안을 유지하되, 그 초안에서 부족한 부분은 다듬고 가시성은 올렸다.
그렇게 샤프를 놀리기를 잠시.
‘됐다.’
나는 책상 위에 샤프를 딸깍 내려놓고는 주지훈에게 말했다.
“어때요?”
“······.”
내가 보인 결과물에, 주지훈은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그리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너 다른 학교 건축과 다니다가 편입한 거 아니지?”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주지훈의 반응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건 또 신선한네.’
내 그림을 보고 반박을 하거나, 아니면 가르치려 들 줄 알았다.
선배니까.
그것도 꽤 잘 나가는 선배니까.
그런데 웬걸.
순수하게 감탄하는 눈치다.
“이야······.”
주지훈은 내 스케치를 여러 각도로 살피다가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깔끔하게 그렸지? 우리 과에서도 이 정도로 따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설아. 선 그을 때마다 휙휙 잡히는 거 너도 봤지?”
“오빠는 이렇게 못 해요?”
“나는 야매로 그리잖아.”
주지훈은 한설과 의견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무릎을 찰싹 치고는 말했다.
“보니까 알겠다. 쉴 공간이 많아졌네. 되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러게요. 인간적이라고 해야 하나?”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거지?”
그는 스케치 두 장을 두고 대조하다가 내게 물었다.
“재하야. 네가 뭘 한 거지 대충 감이 오기는 하거든? 그래도 네 입으로 들어야 확실할 것 같으니까 설명해 줄래?”
아예 내 의견을 들어두려는 모양인 듯했다.
나 인간 이재하.
혀에 기름칠할 순간이 왔다는 직감이 왔다.
“제 말이 지적처럼 들릴 수도 있을 텐데 괜찮으세요?”
“에이. 뭐 그런 걸 신경 써.”
주지훈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지적이야 필요하면 하는 거지. 부모 욕 빼고 다해.”
“알았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지훈이 형 그림을 보고 느낀 건데요. 분명 느낌은 좋은데 머릿속으로 잘 그려지질 않더라고요.”
“머릿속으로 안 그려진다고?”
주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그림이 그랬나?”
그의 스케치는 분명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일반인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잘 그렸다고 말함이 옳았다.
세세한 디테일까지 잘 그려놨고, 또 미학적인 측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았다.
하지만, 다소 이론에 치우쳐진 부분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사람이 이 공간에 돌아다닐 것 같질 않다고 해야 하나.”
“사람?”
“네. 그림만 봤을 때는 느낌 엄청 좋은데. 막상 사람을 함께 떠올려 보면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혹시나 해서 그 부분만 만져봤는데······ 이렇게 됐네요. 저도 자세히는 말 못 하겠어요.”
“사람이 돌아다니는 모습이라······.”
주지훈은 내 말에 살짝 충격받은 듯 멍하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전시전에는 사람이 있어야지.”
이 부분이 그가 놓친 점이었다.
전시전을 물건을 전시하는 공간으로만 생각했던 것.
하지만, 이게 꼭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 시대가 원래 그런 시대였다.
‘가까운 미래의 전시전은, 전시와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난다.’
대중의 수요가 변했다.
그들은 이제 딱딱한 전시전이 아닌, 일상 속에서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바랐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전시전에도 편안함을 고려하게 되었다.
‘반면, 오직 전시만을 목적으로 하는 전시전들은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지.’
이 부분이 내 노림수였다.
스케치에 휴식 공간을 늘리고, 또 인테리어에 전반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더했다.
물론, 아직은 몰랐다.
내가 어떤 제안을 하든 받아들이는 건 그의 몫이니까.
“솔직히 걱정 좀 했는데. 괜히 1학년이 교수님들 추천을 받은 게 아니었네.”
주지훈은 내 스케치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설아.”
“네. 오빠.”
“내가 보기에는 이거 괜찮은 것 같거든? 너는 어때?”
“음.”
한설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저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렇지?”
“네. 오빠 그림보다는 훨씬 낫네요.”
잠깐 주지훈이 움찔했다.
“······ 그래도 후배 앞인데 체면 좀 세워주면 안 돼?”
“처음 보는 사람한테 무슨 선후배를 따져요? 누가 건축과 아니랄까 봐 촌스럽게.”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우와. 나왔다. 내 므른~ 그그~ 으느르~ 이거 아저씨들이 많이 쓰는 말이잖아요.”
둘은 회의를 하다 말고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말했다.
“재하야.”
“네.”
그다음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내 거는 버리고, 네 걸로 가자.”
“······.”
난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떴다.
‘진짜로?’
기껏 해 봐야 참고 정도 할 줄 알았더니 통째로 엎는다니.
그런데 한설도 그 의견을 뒷받침했다.
“나도 찬성. 1학년이라길래 걱정했더니 네가 지훈이 오빠보다 더 나은 것 같아. 오빠는 갖다 버리고 그냥 우리 둘이서 하자.”
“또 또 오바한다.”
주지훈은 나를 보고 피식 웃더니 말했다.
“아무튼, 이걸로 가자.”
*
한 번 전체적인 틀이 잡히자, 그다음부터는 스포츠카가 달리듯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도안은 재하가 그린 스케치를 기반으로 작업하면서 점차 보강하고, 우선은 모형 만들 재료부터 구하자.”
“나무 말이죠?”
“그렇지.”
주지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중요한 건 전체적인 구조물인데, 아무래도 목제 제품은 원재료가 좋으면 좋을수록 퀄리티도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어. 합판이나 집성목은 구하기 쉬운 대신에 퀄리티가 많이 떨어지지.”
“그럼 원목만 써야겠어요.”
“맞아.”
“돈이 많이 깨지지 않을까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예산은 신경 쓸 거 없어. 교수님이 도와주시기로 하셨거든. 몇백까지는 괜찮으니까 팍팍 긁으라고 하시더라.”
“몇백씩이나요?”
“그만큼 우리한테 큰 기대를 걸고 계신다는 거지.”
그렇다면 감사할 따름.
기왕 준다는 돈을 거절할 생각은 없다.
총알은 든든할수록 좋다.
‘그럼 이 총알을 어떻게 써야 효율적일지가 고민인데······.’
어디서 재료를 떼어 올 것인가.
주지훈에게 슬쩍 물어보자, 그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건축과에서 자주 주문하는 업체가 있어. 그쪽에서 떼오려고.”
“거기 품질은 좀 괜찮아요?”
“나쁘진 않아. 너 혹시 아름이라고 알아?”
들어본 이름이었다.
건축과에서 말하는 아름이라면, 아마 가구 회사 아름을 말하는 것이리라.
“네. 가구 회사요.”
“거기에 목재를 공급하는 곳이야.”
이런.
그러면 곤란했다.
‘아름이 나쁜 회사는 아니지만, 절대 좋은 회사라고 할 수도 없지.’
잘 나가는 회사는 맞다.
시장 점유율 2위를 다툴 정도이니.
그러나, 가구 회사는 하늘의 별처럼 많다.
그 전체를 깔고 봤을 때 아름은 중간 정도였다.
가성비로 쓰는 회사라고나 할까.
‘아마 학부생들 실습용이라고 적당한 거 썼겠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예산도 빵빵하겠다, 조금 더 좋은 매물을 쓸 필요가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떠오르는 업체가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혹시, 목재소에서 직접 떼어 오는 건 어떨까요?”
“목재소?”
“네. 제가 잘 아는 목재소가 있어요. 아마 품질로는 한국 최고일걸요.”
“그런 곳이 있나?”
“보통은 수제 공방에서 애용하는 곳이에요.”
“그것만 들어서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예시가 없으면······.”
손에 익은 재료를 버리라니까 아무래도 불안한 모양.
그래서, 나는 그에게 확신을 주기로 했다.
“청와대에도 여기 목재가 들어가요.”
“뭐? 청와대?”
내 말에 주지훈이 덜컥 놀라서 외쳤다.
역시 믿음과 신뢰의 정부 기관.
한 방에 먹혔다.
“그런 곳을 어떻게 알았어?”
난 웃으며 답했다.
“친구의 친구가 그쪽에서 일했었거든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 친구는 박규태고, 박규태의 친구는 나니까.
주지훈 선배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너 나이대에 그런 곳에서 일하는 친구가 다 있네. 이야······ 나는 그때 뭐했냐.”
백억대 재산을 구가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 둘이 재료를 준비하고 큰 틀에서 구조물을 제작하는 동안, 한설 선배는 다른 일을 담당하기로 했다.
“내가 조각 하나는 진짜 잘하거든. 그냥 나만 믿으면 돼.”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녀의 역할은, 소품 제작 일체였다.
“내가 이래 봬도 손재주가 쪼금 좋아.”
쪼끔은 무슨.
한예원 조소과에서 손꼽힐 인재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의 미래를 알고 있고.
‘미래의 한국 대표. 지금이야 학부생밖에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학부생 중에서는 깡패겠지.’
그런 그녀에게 주지훈은 이렇게 말했다.
“키가 쪼끄매서 손재주도 쪼끔만 좋나 보다.”
“오빠!”
“어디 소리가 아래에서 들리나?”
가차 없다.
이후로도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고, 장엄했던 첫 회의는 좋은 분위기에서 끝났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앞으로는 번거롭더라도 필요할 때마다 만나서 진행 상황을 검토하자.”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끝이었다.
오늘 하루를 되새겨보면, 대학생들의 기획 회의라는 걸 생각해 보거든 훌륭했다.
그렇게 잠자는 다락방을 나와 습관처럼 집에 가려는 찰나였다.
“아!”
한솔이 아랫배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배고프다.”
“그러게. 밥 먹을 때 됐네.”
주지훈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재하야. 너 뭐 먹고 싶어? 내가 사줄게.”
아무래도 첫 만남이고 하니 밥을 사 주려는 모양.
회귀한 이후 선배들한테 밥을 얻어먹은 적이라고는 없었기에 어딘가 어색했다.
나는 무심코 말했다.
“국밥이요.”
“더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괜찮아요. 국밥이 먹고 싶어요.”
“그래? 진짜지?”
주지훈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후배님이 먹고 싶다면 국밥 먹어야지. 가자. 우리 과 애들이 야작할 때 자주 가는 국밥집이 있어.”
적당한 가성비와 24시간 영업으로 유명한 국밥집이었다.
이후, 밥을 먹다가 두 사람이 왜 이렇게 친한지가 궁금해 슬쩍 물어봤더니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지훈이 오빠 나랑 같은 학원 출신이야. 한예원 실기시험도 같이 봤어.”
“어?”
그 말이 좀 의아했다.
분명히 오빠 동생 사이 아니었나.
그런데 같이 시험을 봤다니, 어딘가 문맥이 안 맞았다.
나는 슬쩍 물었다.
“형 재수했어요?”
주지훈 선배는 민망한 듯 목을 긁적이더니 말했다.
“삼수했다.”
“삼··· 수······?”
디자인 창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고작 입시 가지고 삼 수나 했다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내 말에 그가 헛기침을 뱉었다.
“크흠. 내가 실기가 좀 약하거든. 부족한 걸 입시 성적으로 때웠지. 그림은 제자린데 수능 성적은 계속 오르더라.”
이건 더 말이 안 됐다.
“우리 학교 입시에서 수능 배점은 엄청나게 낮잖아요.”
그렇다.
한예원의 입시는 실기 80%에 수능 20%.
심지어 수능 등급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환산 점수가 바닥까지 낮아졌다.
오직 실기만으로 사람을 뽑겠다는 의지를 강렬하게 표출하는 대학이었는데, 오죽하면 수능은 3등급만 찍고 실기 준비에 매진하는 게 정설일 정도.
“아, 그거?”
주지훈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수학 빼고 만점 받으니까 괜찮던데?”
세상에.
공부 열심히 했다는 사람한테 이렇게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었다.
‘이 업계 엘리트라고 무작정 실기 천재만 있는 건 아니었구나.’
반대로 말하자면, 입학한 뒤 실기 우수자까지 올라온 그의 노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지훈은 큭큭 웃으면서 말했다.
“아참. 나 한국대도 붙었다. 거기 버리고 온 거야. 한국대는 공부만 해서 학교생활 재미없다고 들었거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 경험상 남이 자랑할 때 맞장구쳐줘서 손해 볼 일은 없는 법이었다.
특히 상대가 밥을 사 줄 때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우와. 정말 대단해요.”
“그렇지?”
“네. 멋져요. 최고예요. 대견해요. 존경스러워요. 형이 자랑스러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칭찬을 퍼붓자 그의 콧대가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듯했다.
“봤냐? 내가 이렇게 잘난 사람이다.”
“오빠. 재수 없어.”
“응. 저음이라 안 들려.”
“저음? 내 목소리가 저음인가?”
“낮은 곳에서 들리면 저음이지.”
“······.”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회귀한 이후로 이렇게 시끌벅적한 식사는 처음이네.’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도 처음이고.
아무래도, 이들과는 조금 오래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