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4)
두 번 사는 미대생 14화(14/93)
*
한예원 건축과 작업실.
나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와. 제대로 터졌네요.”
기대했던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터졌다.
주최 측에서 열심히 홍보를 날라줬던 덕분에 반동이 더 컸다.
내 앞자리에 앉아 과제를 하고 있던 주지훈 선배가 물었다.
“재하야.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아까부터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그는 내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자세히는 모르는 눈치였다.
지난번에는 나도 생각할 게 있고 해서 말을 아꼈기 때문.
‘그래도 이제는 일단락됐으니까 말해도 되겠지.’
나는 한결 후련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외국 사이트를 거쳐서 대포 메일 계정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언론사마다 접촉해서 사진을 뿌렸어요.”
“······ 진짜로?”
나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이죠. 인터넷 사이트란 사이트에는 전부 올려놨습니다. 쫘악.”
주지훈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정말 악마다. 내가 걔네들이었으면 자퇴한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이게 내 생각이었다.
한국대가 대상을 가져갔다고 치자.
다른 모든 참가자의 상이 하나씩 뒤로 밀린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 번 부정을 맛본 그들이 이번에만 그럴까.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했다.
‘한 번 헬퍼에 손을 댄 게이머는 바닐라로 돌아가기 어려워지는 법이지.’
맞을 매라면 미리 맞는 게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나았다.
물론 그들 잘 되라고 한 건 아니었다.
나 잘 되라고 했지.
결과적으로, 내 작전은 성공이었다.
‘시기를 미루기를 잘했어.’
손에 들어온 폭탄을 터뜨리기 전에, 나는 두 가지 사항을 고려했다.
첫 번째.
내가 피해를 보지 않는 것.
그날 바로 주최 측을 찾아가 고발해 봤자 나는 큰 재미를 못 봤을 공산이 컸다.
기껏 해 봐야 내부적으로 수상 자격을 박탈시키는 정도에서 끝날 텐데, 그 대가로 나는 자칫하면 한국대 측 인사에게 찍힐 가능성도 있었다.
안 될 일이다.
이 업계에서 한국대를 적으로 돌리면 두고두고 피곤해진다.
‘아무리 가능성이 작더라도 적을 늘리는 건 안 될 일이지. 감정 문제 하나로 수억을 놓칠 수도 있는데.’
내가 바라는 건 정의의 고발자가 아니다.
은밀한 수혜자였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수상 소식으로 떠들썩해졌을 때를 노렸다.
어떤 퍼포먼스든 반전이 중요한 법이니까.
‘아마 내가 신고했다고는 상상도 못 할 테지.’
그렇게 흡족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한설이 내게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재하야.”
“네.”
“대체 왜 사진만 올렸어? 너 동영상도 가지고 있잖아.”
그렇다.
난 동영상을 촬영했었다.
하지만 나는 동영상째로 올릴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사진만 올렸다.
“그건 왜냐면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폭풍은 두 번 치는 법이거든요.”
“······ 응? 폭풍이 두 번 쳐?”
한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말했다.
“저 믿어줘요. 아직 끝난 거 아니에요.”
“뭐,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
한설도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내가 사진을 퍼뜨리고 하루가 지났다.
한국대는 공식적으로 입장을 발표했다.
[석도욱 교수는 행사장 인근을 방문하던 중, 학생들의 다급한 요청에 잠시 방문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
물론 이것만으로도 공모전의 취지를 벗어난바, 한국대는 본 공모전에서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꼬리 자르기에 들어갔다.
석도욱 교수는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응했을 뿐, 크게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밝힌 것.
그는 한국대 예대의 핵심 인사이니 감싸고 가려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게 내 두 번째 노림수였다.
*
한국대는 얼마 전부터 줄곧 비상이었다.
예대에서 갑작스럽게 대리 출품 논란이 터졌기 때문.
“학교 이름에 똥칠하는 석도욱 교수를 해임하라!”
“해임하라!”
“진상을 규명하라!”
“규명하라!”
한국대 학생들은 이번 사태를 규탄하며 대자보마저 붙였다.
아니, 아예 농성까지 펼쳤다.
농성.
한민족의 방식이자, 대한민국 학생 운동의 역사를 함께한 한국대의 DNA에 새겨진 방식이었다.
그렇게 입구가 틀어막힌 건물.
그 안에서 두 교수가 대화를 나눴다.
“석 교수.”
“에. 총장님.”
이번 사태의 장본인인 석도욱 교수와 예대 총장이었다.
“내가 석 교수에게 유감이 없어.”
“······ 죄송합니다. 잠깐 들렸다는 것이, 우연히 사진이 찍힌 모양입니다.”
“괜찮아. 그 학생들이 어리광을 부린 거지. 석 교수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나.”
“아닙니다. 학생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제 잘못입니다.”
석 교수는 몇 번이고 총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행이다.’
어찌 되었든 그를 감싸고 가려 한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들었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점은, 이번에 풀린 사진에서 그가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어디까지나 주차장에서 함께 모형을 만지작거리는 정도의 사진들.
덕분에 변명할 거리가 생겼다.
‘대화 내용까지 흘러나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아직은 회생할 수 있다.
그는 한국대 입장에서 아직 쓸만한 인물이니까.
그리고, 학생들이야 졸업할 때가 되면 알아서 면죄부를 받으리라.
‘나이 어려서 좋은 게 이거지. 문제 터뜨려도 욕은 덜 먹는 거.’
한때의 치기로 넘길 수 있다.
문제 될 건 없다.
저쪽에서 농성하고 있는 학생들이 조금 거슬리기는 하지만, 장작 없이 타는 냄비는 시간이 지나면 식는 법이었다.
‘결국에는 시간문제다.’
그게 그의 생각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였다.
[너희들이 진짜 한국대생 맞아?]“······ 어?”
갑작스러운 소음에 정신이 확 뜨였다.
창밖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려 퍼졌다.
[메뉴얼 하나 제대로 외우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그거 하나 똑바로 못해?] [죄송합니다.]상급자가 하급자를 질책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석도욱 교수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그가 이번 전시전에서 학생들을 갈궜던 목소리였다.
‘저, 저게 왜······ 녹음본이 있었다고?’
지금까지만 해도 당황스러워 미칠 것만 같은데, 스피커에서 계속해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떠먹여 줘도 삼키지를 못하니. 내가 대학생을 가르치는 건지 애를 기르는 건지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제발 잘하자. 바쁜 사람 오라가라 하지 말고.] [죄송합니다.]단순히 오해라고 넘기기에는 어려울 말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지?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지나치게 충격적인 상황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켰다.
벌거벗은 왕이 진실을 깨달았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렇게 입만 벌린 채로 있기를 잠시.
‘······ 아차!’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는데, 조금 전까지 인자하게 그를 위로했던 총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긴장감에 입천장이 달싹 마른 석도욱 교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총장님. 제가 전부 설명하겠습니다. 이게 사실······ 그······.”
“석 교수.”
총장이 입을 열었다.
“이것도 전부 우연이라 할 셈인가?”
석도욱 교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골목카페
두 번째 폭풍이 불었다.
[한국대 측 석도욱 교수 정직 및 해임 논의.] [공모전 참가자들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 [도덕적 해이 논란.] [지성의 상아탑이어야 할 대학에서 어떻게 두 번이나 거짓말을 하는가.]사태가 폭발했다.
한 차례 거짓 발표를 했던 만큼 논란이 더 크게 불어났다.
[자체 조사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혀.] [추가 사례 발견. 석 교수의 강요로······ 내부고발해.] [정말 무고한 피해자인가?] [(특종)그들 사이에서는 어떤 거래가 있었나.]······
···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인터넷 신문에는 새로 들어갈 때마다 새로운 댓글이 달렸다.
–
– 솔직히 알면서 가만히 있었던 애들도 공범이지
– 교수가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했을 가능성도 있잖아
– 개소리지. 자기들이 수혜자니까 입 닫고 있었지, 남이 이득 봤다면 신고하면 신고하지 가만히 있었을까?
– 이거 맞다
– 남들은 다 바보라서 자기 힘으로 고생하는 줄 아나?
– 참가자들 이름 다 외워뒀다.
– 석도욱이 잘못했는지 아닌지를 왜 너네가 함부로 판단함? 이건 부검 결과 나와봐야 안다.
– 사실상 교수 vs 학부생인데 선방한 한예원만 수준 입증한걸로
– 나 그때 가서 실물 보고 왔는데 쩔더라
– 주최진은 공모전 홍보 한 번 제대로 했네 ㅋㅋㅋㅋㅋㅋ
– 내년에 공모전이 안 열릴지도 모른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홍보였다
– 어이 한국대. 네놈들에게서 명문대 자격을 박 탈 한 다
[본 기사의 무단 스크랩 및 배포를 금지합니다 – XX일보]–
심지어 아침 방송에서 언급이 되기까지.
[공모자들에 대해서는 징계 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현재는 무기정학이 유력해 보이나, 향후 경과하기에 따라서는 징계 제적 처리가 될 수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강하게 나가네요.] [제가 볼 때는 적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정이 조금씩 쌓이면 관례가 되고, 관례가 쌓이면 문화가 됩니다. 그럼 한국 예술계는 끝장나는 겁니다.] [이번 사태가 공정한 경쟁을 장려함과 동시에, 왜 부정이 잘못된 것인지 경각심을 울려주기를 바랍니다.]일개 공모전의 비리라기에는,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떠들썩했다.
‘예상대로 흘러가네.’
원래 사람이 살아날 가망이 보이거든 변명을 시도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진짜를 터뜨리면 효과가 배가 된다.
사진을 올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에 동영상 풀버전을 업로드했고, 그 결과는 지금 눈에 보이는 대로였다.
“어이가 없네.”
주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재하야. 너, 설마 이것까지 다 예상했던 건 아니지?”
“에이. 설마요.”
나는 손을 휘휘 젓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자기들 손으로 제 무덤 판 거죠. 누가 그러라고 했나. 처음부터 자수했더라면 대중이 이렇게까지 했겠어요?”
“······ 나는 이제 네가 무섭다.”
주지훈이 질색하는데, 한설이 옆에서 커피를 쪽쪽 빨며 말했다.
“그래요? 전 아직 한참 부족한 것 같은데. 재하야. 더 숨겨둔 거 없어?”
“······.”
“있으면 얼른 꺼내.”
아무래도 그녀는 맺힌 게 많았던 모양.
그렇게, 이번 사태에서의 내 역할은 여기서 끝났다.
이번 논란이 크게 번졌던 만큼, 문체부에서는 대대적으로 엄포를 내렸다.
[엄격한 내부 조사를 통해 추가적인 부정이 있는지 밝혀낼 것. 공식적인 시상식은 그때까지 연기.]대상을 받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은 듯했다.
하지만.
그 상은 끝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
사태가 잠잠해졌다.
그리고.
이제 나도 인정해야 했다.
‘슬슬 미뤄뒀던 과제를 처리할 때가 왔다.’
공모전에만 모든 걸 쏟아부었던 한 달 하고도 보름.
눈 깜짝할 사이에 학기 말이 다가왔다.
이제 곧 방학. 그때부터는 생각해 둔 일정이 산더미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공모전을 이유로 미뤄뒀던 과제를 처리할 순간이 왔다.
“안녕하세요.”
[환경과 디자인] 수업이 시작됐다.본 수업을 담당한 배태환 교수가 강의실로 걸어들어오며 말했다.
“지난 수업. 우리는 디자인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가 화면 위에 영상을 띄웠다.
교도소 벽에 그림 한 장을 걸었더니 소내 범죄율이 극적으로 줄었다는 통계였다.
“사람은 환경을 만들고, 환경은 사람을 만듭니다.”
몇 가지 자료가 더 지나갔다.
미국 할렘가에 아름다운 벽화를 그렸더니 범죄율이 줄었다는 이야기.
교실의 조명 하나를 바꿨더니 반 전체의 평균 성적이 급상승했다는 이야기 등등.
말 그대로 디자인을 통해 환경을 개선한 사례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익힌 이론을 실전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그가 할 말을 알고 있다.
“세 명이 한 조를 꾸리고 특정 환경을 정해, 디자인으로 개선해 봅시다.”
대학 생활의 진수이자 발암 요소.
조별과제를 시작할 때가 왔다.
그리고.
“재하야. 혹시 우리랑 같이······.”
“밥 산다. 같이 하나만 하자.”
공모전 덕일까.
나를 노리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아아. 이게 인기라는 거구나.’
내 삶에 이렇게까지 남에게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던가.
감회가 새로웠다.
나와 한 번이라도 말을 나눠본 사람은 나를 조에 끼워 넣으려 난리였고, 대화 한 번 안 나눠본 사람도 날 찾았다.
‘환경을 꾸미는 과제에, 전시 디자인 공모전 수상자이니 그렇겠지.’
비록 잘난 선배들에게 업혀 갔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딱히 의미는 없었다.
나는 이미 과 내에서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게 더 유명해졌을 뿐.
적어도 내게 조원 선택권이 있음은 분명했다.
“형님.”
“어.”
첫 타자는 박규태였다.
“제가 시키는 건 잘합니다.”
“오냐. 이리 오너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번 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업을 같이 듣는 학생, 박규태.
그에게는 몇 가지 장점이 있었다.
‘의외로 꼼꼼하다.’
매사에 건성일 것 같은데 의외로 디테일한 구석이 많았다.
지난번 과제 때 보여줬던 활약이 운은 아니었던 모양.
사실, 그런 건 차치하더라도 대화를 나누기 편하다는 점이 최고의 장점이었다.
조별과제 조원으로서 대화하기 편한 사람만 한 건 없으니.
‘그럼 세 번째 조원이 고민인데······.’
과 내에 특별히 친한 사람은 없다.
누굴 받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곧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나랑 하자.”
“······ 콜.”
“콜?”
“좋다는 뜻이야.”
김대원이었다.
특별히 친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학생들보다는 나았다.
무엇보다도 성실했다.
지난번 크리틱을 대충 때웠다가 크게 당했던 뒤로 각성해, 이제는 과 수석을 노리는 듯한 기세로 과제를 제출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발목을 잡진 않겠지.’
그렇게 두 사람과 조를 구성한 채로 수업이 끝났다.
강의실을 나오려는 찰나.
박규태가 우리 둘에게 말했다.
“오늘 시간 괜찮지? 기왕 모인 김에 회의까지 끝내고 흩어지자.”
이 부분은 찬성이었다.
이번 과제는 1학기 기말고사를 대체하게 될 예정.
시간 여유가 있다고 뒤로 미루기보다는, 차라리 일찍 끝내두는 편이 유리했다.
이제 곧 공부에만 미쳐 살아야 할 시기이니.
그렇게 어디에서 회의할지를 고민하는 사이 김대원이 말했다.
“내가 잘 아는 카페가 있어.”
“카페?”
카페.
어쩐지 김대원에게는 잘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미대생보다는 체대생에 어울릴법한 커다란 덩치에 무뚝뚝한 성격으로 카페라니.
10년이 지나 한국이 카페 공화국이 된 뒤라면 몰라도, 지금 시기의 카페는 퍽 고상한 이미지였다.
“가 보면 후회하지는 않을 거다. 이번 과제에도 도움이 될 곳이고.”
“도움?”
“가 보면 안다.”
김대원이 장담하듯 말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
학교 후문을 나와 그대로 김대원을 따라 걷는데, 박규태가 물었다.
“요즘 서지은 어디 갔지?”
“서지은이 아니라 서지원.”
“아무튼, 걔 수업에 통 나오질 않던데. 뭐 아는 거 없어?”
“몰라. 작업실에도 안 오더라.”
“교수님한테는 물어봤어?”
“자세한 말씀 없이 웃기만 하시던데. 그쪽에도 무슨 사정이 있나 보지. 요즘은 작업실도 혼자 쓴다.”
이런저런 잡담을 떨며 걷기를 잠시.
학교 후문에서 5분 거리, 인적이 드문 골목에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다.
‘이런 곳에 카페가 다 있었네. 아니, 이거 카페였어?’
골목 카페라고나 할까.
밖에서 보기에는 워낙에 음침해 카페인 줄도 몰랐다.
상호도 조금 이상했다.
[Heaven’s door]헤븐즈 도어.
일명 천국의 문.
카페라기보다는 차라리 술 마시는 바로 느껴지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이었다.
‘다방?’
인테리어가 독특했다.
카페라기보다는, 옛날 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타주던 다방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내가 지금 타임머신에 들어왔나?’
살짝 놀라 주위를 돌아보고 있는 순간이었다.
김대원이 익숙한 목소리로 외쳤다.
“삼촌. 저 왔어요.”
“······ 뭐? 삼촌?”
박규태가 놀란 목소리로 말하며 그를 쳐다보자, 김대원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삼촌이 하는 카페야.”
“이렇게 안 어울릴 수가 있나.”
박규태가 내가 할 말을 대신 해 줬다.
김대원은 화를 내기보다는, 그저 묵묵하게 말했다.
“그런 말을 내 앞에서 하면 상처받는다.”
“······.”
박규태는 잠시 당황했다가 침착하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알았으면 됐다.”
그렇게 자리에 앉자, 곧 김대원의 삼촌.
그러니까 카페의 사장님 되시는 분이 옆으로 오셨다.
“대원이 친구들이니? 반갑다. 우리 대원이가 무뚝뚝해 보여도 사람이 나쁘지는 않아. 잘 부탁한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잠시.
김대원은 사장님에게 오늘 받은 과제를 자세히 설명했다.
사장님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이 가게를 과제용으로 쓰고 싶다는 말이구나.”
이게 김대원이 의도한 바였다.
환경을 바꾸는 과제에 이 카페를 통째로 써먹는 것.
“에이.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니까 부담스러우시면 사양하셔도 괜찮아요.”
박규태가 사양하려는데, 삼촌이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나야 좋지. 사실 안 그래도 한 번쯤 가게 인테리어를 싹 바꿔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익숙한 용어가 튀어나왔다.
인테리어.
그 말에 내가 끼어들었다.
“인테리어요?”
“그래. 여기가 위치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장사가 좀 안되거든.”
사장님이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듣기로 그는 작년까지 회사에서 일했었는데, 일찍 은퇴한 뒤 퇴직금에 대출을 얹어 카페를 차린 듯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사가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어찌어찌 월세는 나오는데 내 인건비까지 생각하면 손해 보는 장사지. 차라리 정리하고 재취업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한다니까.”
그래서 김대원에게 종종 하소연했고, 때마침 과제와 맞물린 김에 그가 우리를 데려온 것.
“재하라고 했나. 네가 그렇게 과에서 유명하다면서?”
“제가 조금.”
“그래? 유명한 공모전에서 우승했다던데.”
“운이 좋았습니다.”
김대원이 날 좋게 말해둔 모양.
겸손하게 넘기려고 했지만, 나도 사람이다 보니 올라가는 입꼬리를 완전히 통제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어떤 게?”
“저희 맘대로 가게를 만졌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잖아요.”
이 부분이 중요했다.
나중에 뒷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다.
김 사장님은 웃는 얼굴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리 망해봐야 설마 지금보다 더 망할까.”
“······.”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뭐 어떻겠니.”
많이 비관적이었다.
“안 그래도 업자를 불러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너희들이 잘 해주면 그럴 필요도 없겠다.”
사장님은 외려 이 상황이 즐거운 듯했다.
그렇다면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당사자가 좋아한다는데 뭐.
그리고, 카페 리모델링은 나한테도 썩 좋은 건수였다.
‘다른 학생들이 자기 자취방이나 동아리방 정도 고칠 때, 우리가 가게 하나를 바꿔 버리면 느낌부터 다르겠지.’
이보다 좋은 표본은 없다.
무엇보다도, 이 일은 전생의 내 본업과도 맞닿아 있었다.
과거 나는 디자인 컨설팅 기업에 근무했고, 카페야말로 우리 기업의 주력 분야 중 주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최고의 패가 갖춰졌다.
이 과제를 단순히 과제에서 끝내지 않고, 내 발디딤대로 삼는다면 어떨까.
‘디자인은 경력과 입소문이다. 이거 하나만 잘 풀어도 좋은 경력이 될 수 있어.’
대학생이 경력을 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공모전에라도 나가는 건데, 공모전이라는 게 의외로 신뢰성이 떨어졌다.
적어도 프로들 사이에서는 그랬다.
공모전이란 주로 아마추어가 나가는 것이기 때문.
이번 전디전만 해도 그러했다.
한예원이나 한국대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보면, 전체적으로 프로에 한참 못 미쳤다.
‘공모전은 어디까지나 학부생 싸움. 잘 쳐 줘도 프로가 되는 과정에 불과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없진 않았다.
전디전이 나를 이 일감으로 이어준 셈이었으니.
내가 공모전에서 수상자가 아니었더라도 김대원이 나를 데리고 왔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사장님이 이리 흔쾌히 허락하지는 않으셨을 터.
고로, 지난 공모전이 내게 도움을 줬다고 판단함이 옳았다.
커리어가 커리어를 부른 셈이었다.
아마 이 카페를 성공적으로 고치거든, 이 카페가 또한 내 커리어가 될 터.
‘잠깐, 그렇다면 이 가게를 적당히 고치기만 하는 것보다는······.’
순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예 확 대박을 내 보면 어떨까?’
디자인 컨설팅
그래.
뭐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법이지.
이 가게가 잘 되면, 나도 잘 될 수 있다.
어쩌면 관련 업종으로 인지도를 확 높일 수 있을지도 모를 일.
전생의 특기 분야를 그대로 살릴 기회다.
그럼 로또다.
‘대박을 터뜨려 보자. 이 순간부터 나랑 이 가게는 운명 공동체다.’
몇십 분 전까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카페에 주인의식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사장님.”
“응?”
“이 카페, 제가 목숨 걸고 한번 살려 보겠습니다.”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는데.”
“예로부터 필사즉생 필생즉사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원아, 이 친구 성격이 좀 재밌다.”
사장님이 허허 웃었다.
“학생. 혹시 잘 안 되더라도 원래대로 돌리면 그만이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말고.”
내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
하지만, 나는 농담이 아니었다.
증명할 생각이었다.
카페만큼 트렌드에 민감한 업종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만큼 트렌드에 민감한 인간은 없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