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Art Student Who Lives Twice RAW novel - Chapter (15)
두 번 사는 미대생 15화(15/93)
*
손님 없는 카페 테이블을 둘러싸고 네 명의 수컷이 앉았다.
가장 먼저 내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응.”
“이 가게는, 확실히 말해서 촌스러워요.”
“그렇니······.”
사장님이 조금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이라면 시작부터 하고 들어가는 게 나았다.
“잠깐 둘러보고 생각한 건데, 여기는 요즘 카페보다는 옛날 다방에 가까운 것 같아요.”
사방에서 레트로한 감성이 물씬 풍겼는데, 옛날 명동이라면 몰라도 대학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 감상에 사장님은 아련한 눈길로 가게를 둘러보며 답했다.
“내가 학생 때는 이런 분위기의 카페에 자주 갔었거든. 그때만 해도 카페라는 말도 드물었지. 다 다방이었어.”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네.’
사장님은 자기 경험에 의존해서,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가게를 차린 듯했다.
이 부분이 잘못됐다.
흔히, 카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인을 고려해야 했다.
입지와 인테리어, 그리고 홍보.
‘다행히도 이 가게의 입지 자체는 괜찮아.’
사장님은 입지를 걱정했지만, 내 생각은 그 반대였다.
대학가 근처는 언제나 최선은 못 되더라도 차선은 되는 환경이다.
그렇다면 다른 게 문제였다.
왜 이 입지를 살리지 못했는가를 고민해야 했다.
‘아까 학생 시절에 이런 카페에 자주 갔다고 하셨지.’
이 부분이 문제였다.
‘인테리어를 자기 입맛에 맞추셨어.’
잘못된 발상이다.
인테리어라는 것은 점주 입맛에 맞춰서 하는 게 아니다.
돈이 목적이라면, 철저히 고객에 맞춰야 한다.
여기는 대학가.
노골적이리만치 대학생들의 눈높이를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 첫 단계로, 눈앞의 책상을 짚으며 말했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이 책상이에요.”
내 말에 사장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책상?”
“네.”
나는 책상 위를 손으로 훑다가, 모서리의 식탁보를 집어 올리며 말했다.
“이 식탁보가 별로예요. 카페보다는 식당에 가까운 느낌을 줘요.”
이 부분이 첫 문제였다.
체크무늬 식탁보.
얼핏 업장에 고풍스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접근성을 낮춘다는 단점이 있었다.
“요즘 학생들은 카페에 커피만 마시러 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다른 일을 하러 온 김에 커피도 마시는 거지요. 식탁보가 있으면 일보기가 불편해져요. 가능하면 의자랑 책상도 작업에 편하게끔 고치면 좋을 것 같아요”
“음······.”
사장님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럼 학생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지 않을까?”
아무래도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끔 가게를 고치자는 제안이 걸리는 모양.
아직 카페의 개념을 커피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소로 바라보는 듯했다.
‘스타벅스가 한국을 점령하면서 뒤집힐 생각이지.’
아직은 과도기이니 어쩔 수 없었다.
사장님의 입장에서는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못마땅한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수요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어. 여기는 대학가니까.’
억지로 무시해서야 기껏 챙긴 입지의 메리트를 하늘에 날릴 뿐이다.
받아들여야 했다.
다만, 받아들이는 방식이 따로 있었다.
“메뉴 하나당 시간제한을 걸면 괜찮을 거예요. 한 잔당 두 시간이라던가. 그게 학생들한테도 마음 편할 수 있고요.”
“음······ 그 정도라면 적자는 안 나겠네.”
적자만 안 날까.
이론적으로 카페 주인에게 이득이었다.
‘통계상 손님 한 명이 카페에 체류하는 시간이 102분을 넘어갈 때부터 손익분기점이 갈린다.’
평균치를 따질 때, 대학 인근의 커피숍은 이보다 회전율이 좋았다.
‘주로 시간표가 빌 때 방문하기 때문이지.’
일부 장기 체류자를 제외하고 평균을 따지면 대다수의 경우 이득.
그나마 장기 체류자도 두 시간에 컷할 수 있다.
“일단 이 부분은 너희에게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했으니 알겠고, 다음은?”
“저거예요.”
나는 이번에는 천장을 가리켰다.
“가게 조명이 너무 어두워요.”
전등이 은은하게 빛났다.
은은하면 안 됐다.
카페라기보다는 술집에 가깝지 않은가.
뼛속까지 옛날 다방 느낌.
“요즘 대학생들한테 카페는 밝고 세련된 공간이에요. 사무실보다 조금 못한 정도로 밝았으면 좋겠어요.”
조명 하나로 가게의 분위기를 360도 바꿀 수 있다.
예전 내 테이프 아트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의외로 이 부분은 사장님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 눈치였다.
“전구만 갈아 끼우면 되겠지? ”
돈이 얼마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조금 전에 의자와 책상 이야기에 부정적이었던 것도, 사실은 돈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가만. 그렇다면 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해결책이 떠올랐다.
이건 조금 뒤에 다시금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건 적임자가 따로 있는데······.”
나는 규태를 바라봤다.
“규태야. 너 혹시 유니폼 같은 거 만들 수 있어?”
“갑자기? 유니폼은 왜?”
“카페에서는 또 이런 게 중요하거든.”
유니폼 하나로 매출이 위아래로 출렁일 수도 있었다.
특히 여성 고객들은 카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중요시하는데, 그들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드로잉북을 꺼내 스케치를 그리며 말했다.
“이런 느낌으로 두 벌이 필요해.”
“영화에 나올 것 같네.”
“그렇다고 너무 화려하게 만들면 안 돼. 손님들이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말쑥하게 만드는 게 핵심이야. 어때. 할 수 있겠어?”
“음. 주문이 좀 까다로운데. 차라리 동대문에서 떼 오는 게 낫지 않을―.”
“너는 이걸로 과제 때우자.”
“당장 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대화가 더 오갔다.
하지만, 이후에는 대개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테이크아웃 메뉴를 따로 구성하라느니, 쿠폰 시스템을 만들라니, 원두 샘플을 놓으라니 하는 것들.
“여기서 쓰는 원두가 어떤 원두인지 메뉴판에 적어두는 것도 좋을 거예요. 같은 커피라도 산지를 적어두면 마실 때 느낌이 달라지거든요.”
알고 마시는 것과 모르고 마시는 건 천지 차이였다.
단순히 기분의 차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기분을 파는 게 카페 장사.
“메뉴를 너무 다양하게 팔 필요도 없어요. 손님들이 있으면 마시지만, 없으면 또 안 마시거든요.”
“술은 치워야겠구나.”
“예. 오히려 술이 분위기를 해치는 걸지도 몰라요.”
여러 가지 조언이 쉴새 없이 쏟아졌다.
그런 내 모습에 사장님은 조금 의아한 듯 말했다.
“학생이 나보다 카페를 훨씬 잘 아는 것 같아.”
“······ 아.”
너무 아는 척했나 하는 찰나였다.
“큰 대회에서 수상했다더니, 확실히 다르기는 다르네. 전문가 느낌이 난다.”
그가 흐뭇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상 경력 하나가 큰 역할을 해주네.’
저게 내 얼굴이 되어준 셈이었다.
노력하길 잘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친구의 친구가 이쪽에서 일하고 있어서요.”
그 친구의 이름은 김대원이고, 김대원의 친구는 나다.
“옛날부터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배운 게 많았어요.”
“나한테는 행운이네. 아마 나 혼자였다면 이런 건 생각도 못 했을 거야. 대원이가 좋은 친구를 뒀어.”
사장님은 피식 웃다가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렇게 바꿔서 장사가 잘 풀렸으면 좋겠다.”
“딱 이 주일이에요.”
“이 주일?”
나는 장담하듯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 주일만 시도해 보시고,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원래대로 되돌리셔도 좋아요.”
이렇게 장담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 앞서 말한 카페의 성공 요인 셋 중 둘이 갖춰졌다.
입지와 인테리어였다.
남은 건 홍보뿐.
그리고.
이를 해결할 방법도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이 카페의 성공은, 예정되어 있다.
*
“뭐야. 이런 곳에 가게가 다 있었어?”
어느 장신의 미남이 카페 안으로 들어오며 중얼거렸다.
주지훈이었다.
그의 뒤로 몇몇 학생들이 중얼거리며 들어왔다.
“와. 여기 앞에 매일 지나다녔는데 여길 몰랐네.”
“가게가 어두워서 술집인 줄 알았다.”
“좀 옛날 느낌이네.”
주지훈의 학교 동기들이었다. 정확히는 건축과 동기들.
내가 그들을 이 카페로 불러냈다.
“형들. 오래간만이에요.”
“어이구. 우리 후배님 자주 만나네? 기왕 만난 김에 건축과로 전과 안 할래?”
“안 해요.”
“어른이 말을 하면 다 이유가 있는―.”
“우선 여기 앉아 보세요.”
내가 오늘 이들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여기 가구를 만들어 보라고?”
가구였다.
건축과를 불러놓고 무슨 가구를 맡기냐고 물어볼 수도 있겠다만, 원래 건축과는 가구 디자인에 한쪽 다리를 걸친 학과이기도 했다.
인테리어와 일맥상통하기 때문.
“네. 혹시 만들어 보신 적 없으세요?”
“처리가 곤란할 수준으로 만들지.”
“여기에도 만들어 주세요.”
“음.”
그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공임비는?”
결국에는 돈이 문제였다.
제아무리 안면을 튼 사이래도 아예 무료로 일을 도와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장님이 주실 거예요.”
“사장님이?”
“네. 저한테 인테리어 예산을 맡기셨어요. 물론 막 엄청나게 챙겨 드리거나 그러지는 못해요. 그래도 어지간한 아르바이트보다는 나올 거예요.”
내 말에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우리 기말과제 중에 인테리어 실습 있지 않았냐.”
“있었지.”
“그걸 이걸로 때우자.
“좋네. 돈도 벌리고 꿀이다.”
아무래도 그들도 우리 과와 비슷한 과제를 받았던 모양.
아닌 와중에 운이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종이 몇 장을 쓱 내밀며 말했다.
“디자인은 이렇게 맞춰 주세요.”
북유럽풍 가구 디자인이었다.
지나치게 돋보이기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한 디자인.
그 무난함이 지금 이 시기에는 돋보였다.
“이거 진짜 네가 디자인한 거야?”
건축과 선배들이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괜찮은데? 그렇지?”
“머릿속에 뭐가 들었나 궁금하네. 뚜껑 한 번 열어 보고 싶다.”
“······.”
이렇게 문제 하나가 해결됐다.
건축과 선배들과는 지훈이 형을 통해 소통하기로 했다.
‘좋았어. 그럼 다음은 장식품이다.’
조소과가 나설 차례였다.
모처럼 만난 한설 선배가 싱글벙글 웃었다.
“우리 재하. 또 무슨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어? 지난번에는 속이 다 시원했는데.”
“누가 들으면 제가 장난꾸러긴 줄 알겠어요.”
“응? 아니었어?”
그녀가 킥킥 웃었다.
지난 일이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 모양.
‘지훈이 형이랑 성격이 정반대네.’
처음에는 지훈이 형이 강한 성격에, 설이 누나가 소극적일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같이 지내보고 나니까 이렇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누나, 혹시 작품 전시회 하나 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내 첫 번째 자식
“작품 전시회?”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한강에서 참치 잡는 소리냐는 표정.
하지만, 그 표정의 아래에는 분명 흥미가 깔려 있었다.
난 설명을 이었다.
“여기 사장님께서 학생들 작품을 걸 수 있게끔 허락해 주셨어요.”
“진짜?”
한설 선배가 눈빛을 반짝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말했다.
“네. 그런데 사장님 말씀 듣자마자 딱 누나부터 생각나는 거예요. 혹시 누나가 여기에 전시하실 생각만 있으시다면―.”
“나야 좋지! 나 할래! 시켜줘!”
한설 선배가 눈에 띄게 기뻐하며 말했다.
내 예상이 정확하게 먹혀들었다.
‘미대생이란 사소한 전시 하나라도 열 수 있다면 환장하는 생물이다.’
한설 선배가 미대생이라는 부분을 공략했다.
‘사람 한 명도 안 오는 갤러리에 몇십만 원씩 내면서 대관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게다가 조소과는 숨만 쉬어도 작품이 쌓여.’
내 경험상 조각품은 적당히 선반에 올려만 둬도 좋은 장식이 되기 마련.
하물며 한설 선배의 작품이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뿐일까.
휴식 공간과 전시의 일체화라는 근미래의 전시 문화 트렌드와도 맞아 떨어진다.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급해요.”
“언제까진데?”
“이번 주 안에 끝내고 싶어요.”
“아 그래? 그럼 괜찮아. 안 그래도 만들어 둔 게 좀 많아서 곤란했는데 여기에 가져다 둬야겠다.”
없으면 만들어서 올 기세.
공짜로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니 못내 기뻐하는 눈치였다.
나도 공짜라서 기쁘니 우린 쌍무적 계약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기본적인 준비는 마쳤다.
조명이나 도배는 내일 기사님이 오신다고 했고, 가구와 조각품은 날을 잡아서 한꺼번에 설치하기로 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데······.’
이건 내 과제다.
그리고 무료 전시전이 달가운 건 한설 선배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
남 좋은 일만 하고 끝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기왕 전시품을 진열할 거라면, 내 작품도 하나쯤은 걸어도 좋지 않겠는가.
‘그럼······ 어떤 작품을 만드는 게 좋을까.’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됐다.
*
일과를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온 나는, 한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왜 디자인을 하려고 했더라.’
흔히 디자이너들이 신작을 기획할 때 품는 고민이었다.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뿌연 안개 속을 들여다보듯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전생에 디자이너가 되길 결심한 뒤로 이미 20년 가까이 지났다.
초심 따위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톱니바퀴처럼 일하다 보면 흐려지기 마련.
‘까라니까 깠지.’
어느 순간부터는 관성으로 일을 했다.
‘그런데 내가 진짜로 왜 디자이너가 되려고 했더라? 할 줄 아는 게 그림밖에 없어서 그랬나?’
생각지도 않게 진로 고민에 빠진 찰나였다.
자취방의 장롱 옆으로 사과 상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저건······.’
끄집어내 보자, 그 안에는 노트가 한가득했다.
드로잉북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꾸준히 모았던 것들.
조금씩 쌓이고 쌓인 게 어느덧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가득 메울 만큼 쌓였다.
가만.
머릿속으로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안에는 한참 옛날 것도 있겠지.’
읽어보면 그 안에서 내 초심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가장 아래에 묻힌 것들을 끄집어냈다.
어쩐지 타임 캡슐을 꺼내보는 듯한 기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맨 밑에 깔린 낡은 드로잉북들을 펼쳤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감상은 이러했다.
‘발로 그렸나.’
그림들이 하나같이 어설펐다.
입시생 때 그렸던 것들은 물론.
그 전에 그렸던 것들은 낙서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내가 그리고 싶어서 그렸던 그림들이었다.
‘그리라고 해서 그린 게 아닌. 내가 그리고 싶어서 그렸던 내 그림들이야.’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기억나네.’
가장 낡은 드로잉북.
그 첫 페이지에는 고물 텔레비전이 그려져 있었다.
그냥 텔레비전이 아니었다.
70년대의 빈티지 감성을 보존한 다이얼식 텔레비전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단종됐을 법한 물건.
그 그림을 본 순간 떠올랐다.
‘내가 이래서 디자인을 시작했구나.’
어렸을 때 일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고, 크게 가난하진 않았지만 도시 아이들보다 문명의 혜택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알 걸 모르겠는가.
남들이 가지고 싶은 건, 내게도 가지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부모님들을 애타게 졸랐지만, 그분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평소 내게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었는데, 정말 건강하게만 키울 생각이신 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렸다.
‘꼼꼼히 그려서 보관하거든, 그게 마치 내 물건이 된 것만 같았지.’
가지고 싶은 건 뭐든 그림으로 그렸다.
그게 현실에 있는 것이든, 아니면 없는 것이든 무작정 그렸다.
아무리 재주가 없어도 그리다 보면 조금씩이나마 느는 법이고, 그러다 보면 친구들 사이에서 칭찬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사이, 나는 자연히 디자이너를 꿈꾸게 됐다.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을 종이 속에 담는 걸 넘어, 내가 상상하는 물건을 현실로 꺼내 보고 싶었어.’
여기 드로잉북에 그려진 물건의 태반은, 내가 현실 속에서 가지고 싶었던 물건들이었다.
‘한 번 만들어 볼까.’
이제야 디자이너로서 자아실현을 이뤄볼 기회가 왔다.
*
한예원 작업실.
한설 선배를 만나러 방문한 김에 물었다.
“설이 누나. 혹시 지난번에 가져왔던 목재 중에 남은 거 있어요?”
“아. 그거?”
한설 선배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교수님들이 싹 털어간 것 같은데?”
“······ 진짜요?”
“응. 하나도 안 남았어. 그런데.”
한설 선배가 큭큭 웃고는 말했다.
“쓸만한 건 미리 빼놨지.”
“어디에요?”
“내 작업실에.”
이 누나한테 작업실이 있었나.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녀의 개인 작업실에 가보기로 했다.
“남 데려오는 거 오래간만이다.”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흔히 말하는 작업실이라기보다는, 소형 창고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여기 월세 얼마쯤 해요?”
“공짜야.”
“어? 진짜요?”
깜짝 놀라서 묻는데,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빠가 구해다 주셨거든.”
아 그렇지.
역시 미대생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드물다.
나처럼 학비를 스스로 충당하는 학생이 거의 없을 정도.
‘그건 그렇고. 진짜 뭐가 많네.’
말이 작업실이지 간이 창고에 가까웠다.
그녀가 만든 조각이 사방에서 굴러다녔다.
‘노다지다.’
한두 개 슬쩍 집어가고 싶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다.
그렇게 군침을 흘리는 사이, 한설 선배가 방구석의 커튼을 걷었다.
촤락.
그 안에는 자르다 만 나무토막들이 우르르 쌓여 있었다.
“누나, 이걸 언제 다 빼돌리셨어요?”
“말조심해.”
아차.
내가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한설 선배를 바라보는데, 그녀가 나를 째려보고는 말했다.
“빼돌린 게 아니라 보관한 거야.”
“······.”
그게 그거 아닌가.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른 게 고민이었다.
“이걸 어떻게 가져가지.”
그렇다.
나무토막이 생각보다 무게가 나갔다.
여기서부터 낑낑 옮겨야 할까.
아니면 택시라도 부를까 고민하는데, 한설 선배가 뭘 그리 고민하냐는 듯 말했다.
“그냥 여기서 작업해도 되는데.”
“진짜요?”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들고 가기도 힘들 거 아니야. 네가 뭘 훔쳐갈 애도 아니고.”
그녀가 시원스레 허락해 주었다.
미대생에게 작업실 공유란 말은 한 가지 특별한 사실을 의미한다.
상대를 신뢰한다는 말이었다.
“난 오전 수업이 있어서 일찍 가야겠다. 열쇠 여기 둘 테니까 작업하다가 집 갈 거면 잠가두고 가.”
“옙.”
그렇게 한설 선배는 일찍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내일 오전 수업이 있겠지만, 나는 없었다.
그 말은 지금부터 야작이라는 말이었다.
‘어디 보자.’
나는 가장 먼저 큼지막한 나무토막 한 개를 골라냈다.
월넛(호두나무)이었다.
‘이게 좋겠다.’
크기가 두툼하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보통 나무는 굵을수록 좋은 상품인 경향이 있었다.
나무란 것이 원래 오래 자랄수록 굵고 튼튼해지기 때문.
내가 집은 건 그중에서도 유독 튼실했다.
‘이걸 통째로 다듬어서 소형 텔레비전 형태로 다듬는다.’
제작이라기보다는 조각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살짝 긴장이 돌았다.
‘조각은 실수가 허용되지 않는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해.’
머릿속으로 전체적인 상을 그려냈다.
내친김에 시뮬레이션도 한 번 돌렸다.
모든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 나는 나무 위에 연필로 설계도를 그렸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연필선을 따라 조각칼을 들고 천천히 파내기 시작했다.
까각.
잘 안 된다.
그래도 속도에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천천히 진행했다.
‘조심스럽게. 앞서가려 욕심부리지 말고.’
흔히 조각사들은 조각을 두고 마음을 반추하는 거울이라 표현하고는 했다.
한설이 그러했듯, 나는 작업물에 완전히 몰입하며 아주 미세하게 깎아나갔다.
투둑.
조각칼이 나무를 찌를 때마다 나무 부스러기가 한없이 떨어졌다.
보통 이럴 때 나오는 나무 부스러기는 버리기 마련이지만, 나는 달리 쓸 곳이 있기에 한곳에 모아두었다.
타닥. 탁.
적막한 작업실에 나무 깎는 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다듬으려니 곧 커다란 덩어리가 잡혔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세 부분.
레트로 텔레비전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세 부분을 만들 차례가 왔다.
그중 첫 번째.
‘이건 텔레비전이다. 텔레비전이라면 역시 화면이지.’
옛날 브라운관 텔레비전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화면에 자글자글한 노이즈가 낀 것처럼 보인다는 것.
나는 그 부분을 살릴 생각이었다.
‘자. 너희들이 활약할 시간이 왔다.’
조금 전에 모아두었던 나무 부스러기를 꺼냈다.
텔레비전 화면이 될 부분에 접착제를 얕게 바르고, 그 위에 나무 부스러기를 꼼꼼히 발랐다.
‘노이즈가 낀 화면이라도 만져보면 반질반질하지. 최대한 꼼꼼하게 진행해야 한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매끄러운 유리 표면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살짝 볼록하게 만드는 것.
이게 레트로 텔레비전의 가장 큰 정체성이었다.
‘좋아. 괜찮다.’
한참을 바르고 이리저리 각도를 돌려보니, 나름 느낌이 괜찮았다.
첫 관문은 통과했다.
이제 레트로 텔레비전의 두 번째 정체성을 만들 순간이었다.
‘다이얼 손잡이.’
요즘 텔레비전에는 리모콘이 기본이다.
하지만, 리모콘은 멋이 없다.
멋은 다이얼식이 최고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한다.
멋은 다이얼식이다.
‘다이얼은 따로 조각해서 붙이자.’
마침 이 부분은 목재의 색깔도 중요했다.
월넛은 색깔이 진하다.
마치 다크 초콜릿 같은 색감.
다이얼은 그에 대비되는 색감으로 완성하고 싶었다.
‘애쉬가 좋겠어.’
애쉬는 좀 더 밝은색에 다루기 쉬운 목재였다.
찾아보자 작업실 구석에 굴러다녔다.
나는 그중 작은 덩어리 몇을 집어 들었다.
‘여기에 디테일을 올인하자.’
워낙 세밀한 작업이다 보니 실패하기를 두 덩어리.
세 번째 시도가 되어서야 구색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이대로 붙이자.’
텔레비전 전면에 다이얼을 순서대로 붙였다.
다행히도 한 번에 성공했다.
‘좋아. 이제 마지막이다.’
그다음으로는 안테나.
화면과 다이얼, 그리고 안테나까지 이 셋이 내가 생각하는 레트로 텔레비전의 정체성이었다.
그렇게 작업을 이어나가는데.
어째서일까.
내 계획이 하나하나 완성될수록 피부 위에 소름이 올라왔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 이 재미구나.’
내 상상이 현실에 나타나는 재미.
더욱이 완성한 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그것을 상상해보는 그 재미.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겹쳐, 작업물이 완성될수록 내 얼굴에 미소가 올라왔다.
흔히, 조각가들은 자기 작품을 자식이라 표현하고는 했다.
그렇다면, 이 텔레비전은 내 첫 번째 자식이었다.
‘잘 부탁한다.’
그동안 잊고 살아서 미안했다.
널 다시 만나기까지 십수 년을 거슬러 올라와야 했다.
이번 생에는 내가 디자인하고 싶은 것들을 디자인하리라.
그렇게 결심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쯤이었다.
“······ 와.”
집중을 깨고 얇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진짜 집중력 끝내준다.”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숨도 안 쉬고 만드네. 나는 너 조각하다가 숨진 줄 알았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안 알려 주지롱.”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하는데, 나는 피식 웃고는 물었다.
“누나, 이거 어때요.”
“음.”
한설은 근엄하게 팔짱을 끼고 내가 만든 텔레비전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기를 한참.
나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 혹시 다른 학교 조소과에서 편입한 거 아냐?”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지금 그거 지훈이 형 따라 한 거죠?”
“까불지 마라. 이재하.”
우리 둘은 서로를 보고 킥킥 웃었다.
그러기를 한참.
한설이 말했다.
“가자. 아침밥 사줄게. 뭐 먹을래?”
“국밥이요.”
“······.”
10년 차 바리스타
조각이 당장 완성된 건 아니었다.
전체적인 형태야 잡았다지만, 세부적으로 다듬고 마감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문장이 퇴고하면 퇴고할수록 나아지듯, 조각도 다듬으면 다듬을수록 나아지는 법.
‘천천히, 여유를 가지자.’
그렇게 막바지 작업이 약 91.7% 정도 진척되었을 무렵이었다.
그간 뿌려두었던 씨앗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어때? 열심히 만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책상과 의자였다.
양손으로 붙잡고 흔들어 보니 견고했다.
“튼튼하네요.”
내 말에 건축과 선배들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당연히 튼튼하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교수님한테 내 턱주가리가 흔들리는데.”
“······.”
진담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작업물의 질은 나무랄 게 없었다.
‘좋아. 이만하면 목표 예산의 절반 이하로 때웠다.’
그다음은 한설이 가져다준 조각들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나무 조각이 어림잡아 스무 개 이상.
나무로 만든 동물이나 바이올린 조각 등이었다.
한설은 그걸 무슨 시장에서 장본 것마냥 비닐봉지에 담아 와서는 말했다.
“그래서 싫어?”
“아뇨. 딱 좋은데요.”
그저 내 설트코인이 카페로 간다는 게 아쉬울 따름.
눈물을 머금고 놓아줬다.
‘어디서 장식장 좀 구해와야겠다.’
때마침 조명 기사도 어제 방문했다가 갔다.
미리 얘기해 두었듯, 적당히 밝으면서도 눈부시지는 않은 수준으로 잘 해주었다.
탁!
켜 보자 딱 적당했다.
‘좋아. 역시 급한 대로 때우기에는 조명만 한 게 없지. 짜릿해. 최고야.’
이번에는 카운터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 위에는 김대원이 제작을 맡은 메뉴판이 꽂혀 있었다.
[헤븐즈 도어 스페셜: 콜롬비아 원두를 베이스로 아라비카 블렌딩. 오크통의 바디감에 플로럴한 향을 더했다. 초콜릿의 쌉싸름함 뒤로 바닐라의 여운이 감미롭다.]“음.”
나는 장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내가 적어준 문장인데도 감이 안 온다.
쓴맛이면 쓴맛이지, 초콜릿은 뭔가.
그래도 큰 문제는 없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럼 학생들은 더 모르겠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이 가게의 커피가 한약 맛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장님 말로는 좋은 원두를 사서 쓰고 있다나.
애당초 커피 맛의 절반은 분위기.
마시다가 뱉을 수준만 아니라면 학생들이 알아서 좋게좋게 해석하리라.
‘이만하면 기본은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사장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요?”
“어떻기는.”
사장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혼자 골머리 싸매던 때보다 훨씬 낫다. 진즉 너희를 못 만난 게 아쉽네.”
그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지저분했던 스타일을 미용실에서 다듬고, 박규태가 만들어다 준 유니폼을 입었다.
그 조합이 퍽 근사했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1년 차 초보 사장님이라고 생각하겠어.’
지금의 그는 10년 차 바리스타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이 사람이 타주는 커피는 맛있겠지.
아님 말고.
내가 이렇게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렇게 카페의 개업 준비가 슬슬 끝을 맞이했을 무렵이었다.
딸랑.
현관의 종이 울렸다.
돌아보자, 그 자리에는 김대원이 현판 하나를 들고 있었다.
“어때?”
“보기 좋네.”
그 현판에는, [헤븐즈 도어]라는 한글 단어가 산뜻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이젠 정말로 개업할 순간만 남았다.